본문 바로가기
■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청주백제유물전시관 관람 후기

by 즐풍 2023. 10. 15.

2023_156

 

 

2023. 10. 1. 일요일에 관람

 

 

오늘까지 청주는 세 번째 방문이다.

앞서 두 번은 공산성과 정북동 토성 등 평소 관심을 가진 산성 등에 국한했다.

이번엔 그때 아쉬움을 남긴 박물관과 전시관을 위주로 탐방하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의 청주관에 이어 '청주백제유물전시관'에 도착했다.

 

청주에는 국립박물관 외에도 현대미술관, 백제유물전시관, 고인쇄박물관, 문의문화재단지 등이 있다.

이렇게 박물관, 미술관, 전시관 등이 산재한 것은 국립청주박물관이 작아서 기능별로 세웠나 보다.

볼거리가 그만큼 많다는 건 유물의 수집과 관리가 잘 된다는 걸 의미한다.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은 규모가 작아도 알차게 꾸며진 공간이다.

 

 

전시관 입구에는 도자기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이곳의 의미를 부각한다.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은 고분 형태의 돔을 만들어 고분에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백제문화 Baekje Culture

 

청주는 마한(馬韓)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한시대에는 철기가 널리 만들어져 사용되었으며, 새로이 굴가마에서 구운 회색 토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제철 • 농업 기술의 발달과 집단 간의 교역 전쟁이 활발해지면서 점차 고대국가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우리 지역에서 발견되는 초기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진천 송두리 무덤•청주 송절동 • 봉명동 무덤,

신봉동 움집터, 청원 송대리 무덤, 진천 산수리 가마터 등이 있다.

3세기 중엽 이후 우리 지역은 점차 백제의 영역으로 통합되어 갔는데,

청주 신봉동• 명암동의 집터와 무덤 유적을 포함하여 주변의 진천 석장리 철생산 유적, 청원 주성리 무덤

등이 당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안내문)

 

 

 

서원경문화(西原京文化) Seowonkyeong Culture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685년 청주에 서원경을 설치하고, 689년에서 성을 축조하여 지방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청주 지역에서는 많은 불고 유적이 보이고 있는데, 운천동 사적비와 동종, 용암사 불상 서히도 금동불 탑동 석탑

등과 신봉동• 명암동 • 용담동• 금천동 등지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촌락문서'는 서원경 부근 4개 마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내문)

 

 

 

고려• 조선시대 Goryeo and Joseon Culture

 

청주는 고려 초기부터 지방의 중심으로 크게 주목되는 곳이었는데,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와 함께 뛰어난 불교 예술이 꽃피웠는데, 청주 흥덕사지 • 운천동사지 • 사뇌사지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특히 흥덕사지는 1377년 금속한자를 이용하여 [직지」를 찍어낸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의 청주는 지방 행정의 중심으로, 청주읍성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있었으며,

남쪽 방어의 요충지로 수축된 상당산성이 잘 남아있다.  (안내문)

 

 

청주 용두사지 청당간이 궁금하면... 

 

국보로 지정된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의 위용

2023_55 2023.5.1. (월) 오후에 잠시 탐방 청주 여행은 '21년 12월 어느 날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당시엔 기차를 탔지만, 오늘은 더 이른 시각에 출발하는 시외버스를 이용했다. 게다가 버스터미널

electee.tistory.com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

이때, 백제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마한의 남은 영역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공격하였다.

동시에 낙동강 유역의 가야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오늘의 경기, 충청,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 황해도의 일부를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또, 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고등학교 국사(상), 53쪽]

 

 

 

 

 

 

 

 

 

 

 

청주 신봉동고분군의 무덤 모형

 

'대형 널무덤(토광묘)'은 일반 토광묘보다 규모가 크고 바닥에는 강돌을 깔았다.

관과 곽을 사용하였고 곽을 덮은 흙은 진흙과 모래흙을 교대로 쌓아 마무리하였다.

Large Coffin Tomb: The larger tomb contained and the bottom was covered with river stones.

A coffin and an outer coffin were used. The coffins were covered earth. clay or sand. (안내문)

 

 

 

 

 

 

널무덤(토광묘)은 가장 많이 발견되었다. 토광에 관과 유물을 넘은 후 마무리하였다.

일부에서는 유물을 넣는 부장칸을 따로 마련한 것도 있다.

Coffin Tomb: It is the most general pattern of tomb. The coffin and relics were placed in the hole.

Some of tombs have a separate space for relics only. (안내문)

 

 

 

 

 

 

청주·청원의 백제 유적 

The ancient sites of the Baekje kingdom in Cheongju and Cheongwon areas

 

명암동 유적에서는 백제 주거지와 토광묘가 함께 발견되었다.

3기가 발견된 주거지는 4세기 전기와 중기의 것으로 내부에는 화덕이 설치되었다.

토광묘는 신봉동고분군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나 다소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굽다리접시

 

 

 

망이산성에서 발굴된 갑옷의 복제품

 

 

 

초기 철기제품으로 말에 사용하던 재갈 

 

쇠두겁창과 큰칼 등

 

 

무덤 제작 과정 Process of Tomb Production

 

신봉동 유적에서는 3기의 돌방무덤(석곽묘)이 조사되었다.

돌방무덤은 다른 널무덤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하며, 상층 신분의 인물이 묻힌 것으로 보인다.

돌방무덤은 널길(羨道:연도)을 포함한 커다란 홈을 파고, 평면 형태가 방형이나 장방형으로 일정한 높이까지

수직으로 네 벽을 쌓은 뒤 점차 안으로 들어 쌓아 천장을 이루었다.

대체로 남쪽 방향으로 문을 내에 시신을 운반하였으며 커다란 돌로 막아 쌓은 뒤 마무리 하였다.

돌방무덤은 관대(棺臺)를 포함한 무덤방의 바닥에는 강들을 깔고 관대 위에 관을 놓고 주위에 토기와 칠기,

장신구 등의 많은 유물을 함께 묻었다.

 

 

 

 

손잡이잔

 

손잡이잔

 

손잡이잔 일부가 찌그러진 부위는 다른 곳과 달리 얇거나 단단한 정도가 부족했나 보다.

 

손잡이잔 

 

여러 종류의 굽다리접시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은 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기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당기 사진을 찍을 때 마침 해설사 님이 오셨길래 이 명문을 돌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 돌아간다고 한다.

당기를 한번 돌려서 또 찍는다.

 

 

용두사지 철당간 (龍頭寺址 鐵幢竿)

 

용두사지 철당간은 두 게의 화강암 지주와 20개의 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간은 절 앞에 높이 세워 예불이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던 곳이다.

대부분의 당간은 나무로 만들어 당간지주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고 당간이 남아있는 사례가 드물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밑에서 세 번째 당간에  당기(幢記)가 새겨 있어,

건립 목적과 조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철당간은 세운 이유는 청주사람 김예종이 병에 걸리자 철당간을 세울 것을 부처님께 맹세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사촌형인 김희일이 그 뜻을 살려 철당간을 완성했다고 한다.

또 당간의 끝부분에는 준풍(峻豊) 3년, 고려 광중 13년인 962년에 만들어 세웠다고 하였다.

철당간은 원래 30단段 60尺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높이 65cm의 청동 20단만 남아있다.

용두사 절터도 현재창주 번화가로 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당간을 제외하면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안내문)

 

 

대부분 안내문으로 첨부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