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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박물관·전시관·성지·국보 등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분토기 특별전시

by 즐풍 2023. 11. 8.

2023_180

 

 

 

2023. 10. 8. 일요일 오전

 

 

함안 말이산 고분군을 두 번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함안박물관에 전시된 말이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 등 부장품을 보고 싶었다.

처음 갔을 땐 코로나가 횡행하던 시절이라 문을 닫았고, 두 번째는 너무 늦은 시각이라 운영이 끝났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함안 말이산 고분 42호 상형토기와 경주 황남동 토우 등 약 300여 점 전시된다는

소식에 마감 하루를 앞두고 목우와 함께 찾았다.

 

 즐풍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박물관을 방문한 기억은 세네 번에 불과할 만큼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이번 말이산 고분의 상형토기와 경주 황남동 토우장식 토기는 보는 게 처음이다.
 전시물에 안내문을 찍어 한글을 옮기되 아이패드에서 인식한 한문도 그대로 옮긴다.
 그런 만큼 개별적으로 각각의 전시물에 안내문이란 언급은 별도로 표기하지 않는다.
 3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었으나 그 전부를 찍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양이 많으니 지루한 분은 바로 나가시길 바란다.

 

 

 

 

 

사슴모양 뿔잔

가야는 3세기, 함안 말이산 45호 무덤, 함안박물관

 

사슴의 등 위에 작은 뿔잔을 올린 제의용 그릇이다.

위엄을 나타내는 뿔의 상징성을 담아 장송의례에 사용하였다.

사슴이 긴 목을 돌려 뒤돌아보는 모습으로 경계심이 많아 주위를 자주 살피는 습성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높은 굽다리에는 아라가야 토기의 특징인 불꽃모양 구멍이 뚫려 있다.

 

 

배모양 토기

 

큰 강을 오가던 배를 본뜬 토기이다. 배의 앞뒤에 파도를 막기 위한 높은 가로판이 설치되었고,

왼쪽과 오른쪽을 합해 모두 10개의 노걸이가 있는 구조선이다.

배의 바닥이 깊어서 액체를 담을 수 있고, 주둥이가 있어서 물을 따를 수 있는 그릇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이 배를 타고 다음 세상으로 떠나갈 수 있기를 기원하며 만든 것 같다.

 

 

금동관 金銅冠

가야 5세기, 함안 말이산 45호 무덤, 함안박물관

 

말이산 45호 무덤 주인의 금동관이다. 새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는 모습이다.

삼국시대 여러 금속공예품에 묘사된 봉황의 모습과 비슷하다.

새의 눈, 부리, 몸통, 날개, 다리 등의 모양을 얇은 동판에 표현하고 도금했다.

이 금동관은 무덤의 주인이 아라가야의 최고 권력자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등잔모양 토기 燈盞形士器

가야 5세기, 함안 말이산 45호 무덤, 함안박물관

 

무덤 안에서 어둠을 밝혀준 등잔이다. 5개의 긴 원통에 심지를 끼워 넣어서 불을 붙인다.

중앙에 있는 병의 주둥이를 통해 기름을 넣을 수 있는 구조이다.

긴 원통이 아래까지 뚫려 있어서 모두 하나로 연결된다.

무덤에 놓인 등잔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죽음 이후 살아갈 공간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집모양 토기 家形士器

가야 5세기, 함안 말이산 45호 무덤, 함안박물관, 보물

 

말이산 45호 무덤에서는 집모양 토기 2점이 발견되었다. 한 점은 부서진 상태였고, 다른 한 점은 온전한 상태였다.

두 점 다 9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고, 양쪽 지붕 면이 경사진 맞배지붕이다. 벽의 가운데에는 빗장문이 있다.

부서진 채로 발견된 1점에는 지붕이 없다.

토기를 부수어서 무덤 속에 묻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을 위해 마련한 공간에서 치르는 의식이었다.

 

 

 

영원한 삶을 위한 선물, 상형토기

 

인생의 마지막 통과의례는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사후의 세계로 가는 장송의례입니다. 고대의 장송의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도 현세의 삶이 이어진다는 계세사상繼世思想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거대한 무덤에 많은 껴묻거리를 넣고 장례를 치르는 후장부# 풍습도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는 실제 모습을 본뜬 여러 모양의 상형토기가 묻혀 있었습니다. 새, 상서로운 동물, 뿔,

말, 수레, 배, 집, 등잔 등을 그대로 축소해서 만들었습니다. 죽은 이의 다음 삶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제의용 그릇입니다. 영혼을 하늘로 안내하고, 떠나가는 길에 동행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편안한 쉼을

위해 많은 공헌품과 함께 상형토기를 무덤에 넣었습니다. 여기에 죽음을 삶과 연속된 세상으로 바라보려 했던

1,600년 전 사람들의 내세관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변진에서는 장례에 큰 새의 깃털을 이용하였는데, 그 의미는 죽은 이가 하늘로 날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死者飛揚”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새 모양 토기 鳥形土器

삼국 3~4세기, 울산 중산리 ID-15호 무덤, 창원대학교박물관

 

머리에 볏이 크게 장식된 새 모양 토기 2점이 무덤 안에서 다른 토기와 함께 발견되었다.

오래전부터 새는 영혼을 하늘로 안내하는 매개자로 인식되었다.

이 무덤에서도 새 2마리가 수호신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오래전부터 농경사회에는 새를 숭배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새는 곡식의 씨앗을 물어다 주는 곡령穀靈으로서 풍요를 상징하고,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매개자로

장례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새 모양 토기는 경주지역에서 3세기 후반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5세기부터 머리의 볏 장식이 사라지고 굽다리 대신 동물의 다리가 부착되기도 하는 등 전통적인 모양에서

변화가 나타나며, 점차 말로 대체됩니다. 하늘로 인도하는 또 다른 안내자로는 상서로운 동물이 있습니다.

물의 기운을 가지고 하늘로 승천하는 상상의 동물 용이 대표적입니다.

한편, 높게 솟은 동물의 뿔은 하늘과 연결하는 신성한 매개체로 권위를 상징합니다.

동물의 뿔 모양인 뿔잔도 장송의례에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상서로운 존재와 뿔의 권위

 

'상서祥瑞'는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라는 뜻입니다. 용은 가장 대표적인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입니다.

신라에 용무늬가 나타나는 것은 눌지왕 8년(424) 고구려와 사신 왕래 이후로,

용이 영혼을 태워 승천한다는 도교적 내세관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높이 솟은 동물의 뿔은 그 자체로 권위를 상징합니다.

신라와 가야에서는 뿔모양 토기를 받침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탈해왕脫解王' 조의

'탈해왕이 백의白衣에게 물을 떠 오라 시켰는데 도중에 그 물을 몰래 마시자 뿔잔이 입에 붙어버렸다'는

기록처럼 영험한 힘을 가진 뿔잔도 장례에 사용되었습니다.

 

 

 

 

경주 탑동 3호 무덤 | 국립경주박물관

 

 

 

 

 

말머리모양 뿔잔 馬頭裝飾角杯

삼국 5세기, 부산 복천동 7호 무덤, 동아대학교박물관, 보물

 

불잔의 앞부분이 말머리로 장식된 독특한 모양이다.

뿔잔 뒤쪽으로 작은 돌기를 붙여 받침대 없이 세울 수 있다.

동물의 뿔은 오래전부터 권위를 상징했기 때문에 다양한 재질로 뿔잔을 만들었다.

이 토기는 뿔의 권위와 말의 상징성을 결합하여 정성껏 빚어 만든 제의용 그릇이다.

 

 

사슴모양 뿔잔 鹿形角杯

삼국, 국립중앙박물관, 삼국 5~6세기

 

 

 

 

 

 

짚신과 함께 바치는 잔

 

신발은 때로는 이별이나 떠남을 의미합니다.

짚신을 정성껏 흙으로 빚어 그 위에 잔을 올린 토기가 있습니다.

신발 한 켤레가 부산 복천동 53호 무덤의 껴묻거리 맨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신발모양 토기가 무덤 안에서 발견된 유일한 사례입니다.

아마도 먼 길을 떠나는 이의 걸음에 기원을 담아 올리는 술잔이 아니었을까요?

 

 

신발모양 토기

삼국 5세기, 부산 복천동 53호 무덤, 국립진주박물관

 

짚신모양 토기 한 쌍이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두 점 중1점의 위에는 잔이 놓여있고 다른 1점에는 잔이 붙었던 흔적만 남아있다.

짚신의 바닥모양, 줄의 연결 위치와 형태 등 실제 구조가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서

당시 사용했던 짚신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먼 길을 떠날 영혼의 편안한 발걸음을 기원하고자 이 짚신을 만들어 무덤에 넣은 듯하다.

 

 

말 모양 토기

 

 

말 탄사람 토기

삼국 5~6세기, 경주 덕천리 1호 무덤, 국립 경주박물관

 

 

말과 떠나는 길

말은 고대 건국설화와 의례에서 탄생과 죽음을 알리는 신성한 동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삼국시대에 전쟁과 운송에 말이 더욱 중요한 자원으로 이용되면서 말갖춤이 무덤의 껴묻거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5세기 무렵 장례문화에도 이러한 인식이 반영되어 말 탄 사람 토기와 말모양 토기를 무덤에 묻었고,

말 그림을 토기에 새겨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말을 타기 위한 마구馬具를 갖추고 있어서 고대인에게 말은 최고의 교통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모양 토기

대구 육수동 가지구 1호 도랑 | 국립대구박물관 

 

 

말모양 토기

이건희 기증 | 국립중앙박물관 

 

 

목이 긴 항아리

 

 

말 탄 사람 불잔 騎馬人物形角杯

삼국, 이양선 기증, 국립경주박물관, 국보

 

삼국시대 말에 입힌 잡옷의 구조를 알려주는 상형토기이다.

말 위에는 갑옷을 입은 무사가 앉아있고, 'U'자 모양으로 뻗은 두 개의 불잔이 붙어있다.

무사는 한 손으로 방패를 세우고, 다른 한 손엔 창을 잡고 있다. 삼국시대 말갑옷은 비늘갑옷(札甲)이다.

말갑옷의 구성품은 목을 보호하는 경갑頸甲, 가슴을 보호하는 흉갑胸甲, 몸통을 보호하는 신갑身甲,

엉덩이를 보호하는 고갑尻 등인데, 이 토기에는 흉갑과 신갑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말모양 뿔잔 馬形角杯

삼국, 이건희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배모양 토기 舟形土器 

신라 6세기 | 경주 금정중 | 국립중앙박물관 

 

금령충은 신라 어린 왕족의 무덤이다. 무덤 안에는 말 탄 사람 토기와 배모양 토기가 한 쌍씩 묻혀 있었다.

말 탄 사람 토기는 주인상과 시중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중상은 한 손에 방울을 들고 있어서 흔들어 소리를 내며 가는 것 같다.

배모양 토기에도 노는 젖고 있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금령층에 묻힌 사람은 물에서도 물길에서도 어디든 함께 가는 동행이 있어서 외롭지 않을 것 같다.

 

 

말 탄 사람 토기 騎馬人物土器

신라 6세기 | 경주 금령총, 국립중앙박물관 | 국보

 

 

수레바퀴장식 뿔잔 車輪裝飾角杯

보물

 

뿔잔의 양옆에 있는 축에 수레바퀴가 달려있다. 이 축을 중심으로 바퀴를 돌릴 수 있다.

두 개의 뿔잔 위에는 고사리무늬 장식이 하나씩 붙어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

당시 바퀴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기동력과 수송 능력을 의미했기 때문에 뿔잔의 장식으로도 사용되었다.

무덤에도 이동수단으로써의 의미를 담아 묻은 것으로 보인다.

 

 

집모양 토기 家形士器

삼국, 국립중앙박물관

 

사다리가 있는 출입구 쪽에서 보면 맞배지붕이고, 반대편에서 보면 모임지붕인 집모양 토기이다.

긴 벽과 지붕에 걸쳐 굴뚝을 닮은 주둥이가 붙어있고 속은 비어있다.

지붕의 용마루 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고, 아래에는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두 마리의 쥐가 있다.

 

 

수레바퀴장식 토기

삼국 5~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수레바퀴장식 토기

삼국 5~6세기, 함안 말이산 4호 무덤 | 국립중앙박물관

 

 

수레바퀴장식 토기

삼국 5~6세기, 이건희 기증 | 국립중앙박물관

 

 

 

이동과 운송을 위한 레 

 

고대 중국에서는 실제 수레를 장례에 사용하기도 하고, 토기로 만든 수레를 무덤에 매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조선의 무덤에서도 수레 갖춤이 발견되었던 것처럼 소나 말이 끄는 수레는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나오는 문무왕 8년(668) '김유신의 공을 치하하며 상으로 수레와 지팡이를 내렸다'는 기록은

수레를 귀하게 여겼던 당시 인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수레모양 토기는 대부분 바퀴만 뿔잔에 결합하여 상징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멀리 가는 길 편히 타고 가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배모양 토기

삼국 5~6세기 | 대구 평촌리 12호 구덩이 1 국립대구박물관

 

 

배모양 토기 3  삼국 5~6세기 / 합천 옥천 99호 무덤 / 국립진주박물          

배모양 토기 4  삼국 6세기 / 산청 평촌리 252호 무덤 / 국립진주박물

배모양 토기 5   이양선 기증 / 국립경주박물관 

 

 

 

 

배모양 토기 舟形土器

삼국, 이건희 기증, 국립중앙박물관

 

배의 앞뒤에 파도를 막기 위한 높은 판제가 붙어 먼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외항선의 모습을 본뜬 토기이다.

바닥이 뾰족하고 평면 모습은 날렵한 유신형이다.

배의 양쪽 옆면에 남작하고 동근 수레바퀴가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배모양 토기

삼국 4~5세기, 창원 현동 나지구 106호 구덩이, 국립김해박물관

 

파도를 막는 높은 판재를 배의 앞뒤에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뒷부분만 남아있다.

배의 앞쪽에는 액체를 따를 수 있는 주둥이가 있다. 양쪽 난간에 있는 돌기는 노걸이를 표현한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등잔 

 

어둠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무덤에서 잔이 여러 개가 달린 등잔이 발견됩니다.

등잔모양 토기의 잔 안에는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이 구멍은 등잔 아래에 연결된 기름을 담아두는 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심지를 넣어 불을 밝힐 수 있습니다.

이 구조는 잔 하나만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기름을 담을 수 있으므로 긴 시간 동안 어둠을 밝힐 수 있습니다.

등잔의 밝은 빛은 떠나는 이에게 길을 안내하고 위로를 전하는 듯합니다.

 

 

 김해 능동 나-6호 무덤 | 국립김해박물관

 

 

경주 덕천리 1호 무덤 | 국립경주박물관

 

 

호랑이 • 사슴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과 멧돼지

 

 

 

 

 

 

 

 

경주 쪽샘에서 찾은 토우 이야기

 

경주 쪽샘 유적은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인 대릉원에 인접한 유적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양의 토우장식 토기가 한꺼번에 묻혀있는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5개의 돌무지덧널무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중 B6호 하나의 무덤에서만 토기 뚜껑 33점에 장식된 54점의 토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적은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토우장식 토기가 무덤에 묻힌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어 더욱 중요합니다. 쪽샘의 토우들은 사람과 동물을 주로 묘사했는데, 지팡이를 짚은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뱀과 개구리 등 토우의 대표적인 여러 모습들이 보입니다. 경주 황남동 유적과 함께 신라 토우장식 토기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니•가마우지 

 

 

모자를 쓴 사람

 

 

토우는 옷자림은 단순하게 표현되어 치마나 바지 정도만 구분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머리에 뿔처럼 표현된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토우의 모자는 복발식 (覆髮式) '건(巾)'과 절풍형(切風形) 모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복발식 건은 원추형(圓錐形), 전풍형 모자는 양 옆에서 늘린 듯한 모습입니다.

절풍형 모자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 공통의 모자이지만 원추형의 '복발식 건'은 신라만의 특징입니다.

 

현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사람들

 

 

뱀과 개구리

 

 

별불가사리 • 육상동물

 

 

토우장식 긴목 항아리

신라 5세기, 경주 노동동 11호 무덤, 국립경주박물관, 국보

 

토우장식 항아리에 붙어 있는 토우는 밤과 개구리 그리고 지팡이를 든 사람이다.

지팡이를 든 사람은 제사장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람모양 토우는 황남동 유격과 쪽심지구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다.

황남대충 북쪽 무덤 봉토에서 나온 토기 조각에도 비슷한 사람의 모습이 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토속종교의 의례와 관련된 장면으로 보인다.

 

 

 

 

 

 

건巾과 립

 

건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으려고 머리를 감싸는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띠처럼 천을 머리에 동여맨 것은 대륜식臺輪式이고, 머리 전체를 감싼 것은 복발식覆髮式입니다.

립은 차양이 있는 모자를 말합니다. 토우에서는 차양이 좁은 것과 넓은 것, 두 종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토우장식 그릇받침• 항아리  

삼국 5세기 | 부산 복천동 11호 무덤 | 국립김해박물관 | 보물

 

 

 활을 들고 말 탄 사람 그림을 새긴 뚜껑

신라 5세기 | 경산 임당 7A2호 구덩이 | 국립대구박물관 

 

 

확대한 모습



동물의 행렬 그림을 새긴 굽다리 긴목 항아리  

신라 6세기 | 경주 쪽샘지구 B18호 무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말토용

 

 

말토용

 

 

말토용

 

 

여자와 남자 토용

통일신라 7~8세기 | 경주 황성동 돌방무덤 | 국립경주박물관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 그 후

 

신라는 6세기에 들어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업보에 따라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는 '윤회'의 불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거대한 무덤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후 한 무덤에 다시 추가로 매장할 수 있는 돌방무덤(석실묘)이나 화장한 뼈를 담은

그릇(葬骨器)이 유행했습니다.

껴묻거리를 성대하게 묻는 전통도 자취를 감추고 상형토기와 토우장식 토기 역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무덤에서 죽은 이를 기리는 것은 토용土俑으로 계속됩니다.

토용은 그릇이나 장식이 아닌 독립된 상像입니다.

당시 신라에 도입된 관복제에 따라 신분의 차이가 옷차림에 나타나있습니다.

 

 

신라 사람들 토용

 

 

 

가야와 신라시대의 토기들을 살펴보는 좋은 기회였다.

아직 유약을 바를 만큼 기술은 발달하지 않았으나 동물이나 수레, 심지어 집까지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금이 가거나 깨진 게 있는가 하면 열을 이기지 못해 찌그러진 것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작품 대부분은 고분에서 발견되었기에 오늘날 우리와 마주한다.

백자나 청자, 분청사기에서는 그림으로 표현하는 대신 이런 토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의 풍부한 실험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