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기타 등등/사찰 탐방

여주 신륵사는 남한강과 환상적인 궁합인데...

by 즐풍 2022. 2. 22.

2022_16

 

 

2022.2.16 (수) 14:10~14:50까지 탐방

 

 

여주에서 제일 보고 싶은 관광지는 세종대왕릉과 신륵사이다.

세종대왕릉과 효종릉을 보고 버스를 바로 연결되는 버스가 없어 한 번 갈아 타며 신륵사에 도착했다.

입장료 3천 원을 내고 들어서니 "정창래는 즉각 사퇴하라"는 현수막이 두 개나 걸렸다.

사찰에서는 더 이상 입장료를 받지 말라는 정창래 주장이 맞는데,

불교계에선 일을 확대해 정부·여당과 정창래 의원에 대해 맹폭을 퍼부었다.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표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던 데, 어떻게 잘 마무리됐는지 요즘은 조용하다.

이렇게 여당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다른 대권 도전자들은 보란 듯 불교계에 추파를 던진다.

"종교는 대중에게 진리이나 현자에게는 거짓이고, 정치가에게는 이용의 대상이다."라는 말이 있다.

평소엔 사찰이나 교회, 성당엔 얼씬도 안 하던 인간들이 선거 때면 표를 얻을까 싶어 여기저기 쏘다닌다.

선거가 끝나면 서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종교시설엔 발걸음도 안 하면서,.

 

 

□ 신륵사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신륵사를 일명 "벽절"이라 부르게 한 다층 전탑이 묵묵히 여강을 굽어보고 있으며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정자 강월헌(江月軒)에서는 그 옛날 시인 묵객들이 시 한수를 읊고 있는 것 같다.

신륵사는 남한강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에 위치함으로써

대중과 접하고 구도의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곳이다.

(국가지정문화재 8점, 도지정 문화재 7점)

                                                                                                        (출처_여주시청)

 

사찰 주변을 관광지로 만든 게 사찰의 입김이 작용한 건지 아닌지 모르지만 썩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입구는 사찰처럼 꾸몄으나 도자기와 관련된 시설물이다.

 

원호 장군 묘는 여주시 북내면 장암리 산 1-1에 있다는 데, 이곳에도 신도비를 세웠다.

 

원호 장군은 이곳 여강에 주둔한 왜군과 싸워 얼마간의 승전을 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의병장이다.

 

매표소를 끝내고 신륵사로 들어선다.

 

매점

 

불이문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

 

감로수조라고 표시했으나 물은 보이지 않는다.

 

신륵사에서 제일 멋진 풍겨인 강월헌이다.

여강에 솟아 오른 바위 위에 정자를 지은 게 여강에서 뱃놀이하며 보는 풍경이 더 아름답겠다.

강 건너에서 봐도 괜찮을 풍경이다.

 

강월헌 아래 있는 여강

 

 

 

 

□ 삼층석탑 (神勒寺 三層石塔)

 

단층 기단을 갖춘 평면 방형의 3층 석탑이다. 

기단은 1매의 석재로 조성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갑석 역시 1매의 석재로 놓았는데, 각 면 3구씩 그리고 모서리에 1구씩 모두 복엽 16판의 복련을 표현하였다. 

중앙에는 낮고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을 만들어 탑신부를 놓았다. 

탑신석과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매 층 탑신석에는 양 우주를 모각했는데, 1층 탑신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다. 옥개석은 3층 모두 남아 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해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면에는 1·2층은 각형 3단, 3층은 각형 2단의 받침이,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 받침이 마련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 석탑은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언급되어 있는데, 

기록으로 볼 때 나옹스님을 장례 한 장소가 전탑과 삼층석탑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수습된 사리로 부도를 조성하고,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적인 가람 배치법에 의해 건립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념탑이면서 

여강의 지세를 바로잡기 위한 비보탑의 성격을 갖는 고려 후기 석탑이다.

                                                                                                  (출처_문화재청)

 

강월헌

 

 

□ 다층전탑 (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아래로 한강이 굽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 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 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 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_문화재청)                       

 

 

□ 신륵사 대장각기비 (神勒寺 大藏閣記碑)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 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 몸비 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 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 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 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 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 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출처_문화재청)

 

조선 철종 때의 문신이 김병익의 송덕비

 

김병익 송덕비 비각

 

구룡루는 1858년 김병기의 지원으로 중창된 건물이다.

이런 이유로 위에 김병익의 송덕비를 세운 것이다.

 

극락보전으로 오르는 길목 

 

 

 

종무소

 

 

□ 극락보전 (神勒寺 極樂寶殿)

 

'극락보전'은 불교의 여러 보살과 부처 중에서 서쪽의 극락세계의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불전으로

신륵사의 중심 불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무량수전, 보광전, 아미타전 등이 있다.

이후 고려 말 나옹 선사 혜근스님이 1376년에 이곳에서 돌아가신 후 왕실의 후원을 받아 크게 다시 지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英陵)이 인근으로 옮겨지면서 왕릉을 수호하고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는 능침 사찰이 되어 1472년에 다시 크게 수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크게 수리가 이뤄지면서 1678년에 지금의 극락보전이 다시 세워졌다.

극락보전은 이후 1797년부터 1800년까지 다시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모습을 보면 평지에 길게 다듬은 화강암을 3단으로 쌓아 기단을 만들었고,

주춧돌은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그대로 사용하였다.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지붕은 옆에서 보면 ‘八(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길게 뻗은 지붕 끝을 받치기는 가느다란 기둥 4개를 설치하였다.

지붕과 기둥 사이에는 지붕 무게를 골고루 받아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공포가 설치되어 있는데

기둥 위뿐만 아니라 그 사이에도 2개씩 빼곡히 설치하였다.

건물 앞쪽에는 문을 달고 옆과 뒤쪽은 흙벽을 쌓고 그림을 그려 넣었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고주(高柱;바깥의 다른 기둥보다 높게 실내에 설치하는 기둥)를 세우고

불단을 그 앞쪽에 두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다른 사찰의 불전과 비교했을 때, 

규모는 작지만 공포를 높고 화려하게 두면서 여기에 비례하여 지붕도 크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왕실의 보호를 받고 왕릉을 지키는 역할에 따라 건물의 격식도 높이는 

조선 시대 불교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국락보전은 1678년에 세워졌고 그 이후에 수리를 거친 건물이다.

최근에 정면에 보이는 문을 전부 느티나무로 하나하나 조각한 것으로 바꾸었다.

무늬결이 살아있어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살필 수 있다.

 

 

□ 다층석탑 (多層石塔)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 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 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추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 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국보)과 돌의 재질, 조각 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_문화재청)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석탑과 종무소

우리나라에는 대리석 산지가 없는데, 조선 성종 때 어떻게 수입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서울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10층 석탑도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서울은 한강과 가까워 배로 들여오기 쉽겠지만, 신륵사도 여강으로 배가 들어와도 물이 많은 계절에나 가능하다.

 

삼성당

 

 

□ 보제존자석종비 (普濟尊者石鍾碑)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 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 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 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출처_문화재청)

 

 

□ 보제존자석종 (普濟尊者石鍾)

 

신륵사 뒤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 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출처_문화재청)

 

 

 

처음엔 부도라고 생각했으나 석종이다.

석종은 동종과 달리 소리가 나지 않을 텐데, 불교 가르침이 널리 퍼지라는 의미일까?

정상에 있는 보주가 아름답게 보인다.

 

 

□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普濟尊者石鍾 앞 石燈)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추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사진 찍을 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화사석[火舍石]도 대리석이 아닐까 추측한다.

안쪽으로 창을 내거나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하는 건 화강암으로는 어림도 없다.

 

사조전

사조전 앞으로 무슨 공사를 하는지 펜스를 쳐놓아 사진 찍을 공간이 부족해 전체를 담지 못했다.

 

멋지게 생긴 향나무

 

봉송각

 

봉송각에 모신 부처님

 

명부전

 

관음전

 

범종각

 

 

 

 

일산에 살 때 고향인 원주를 오가는 길목의 신륵사는 맘만 먹으면 쉽게 들릴 수 있는 곳이다.

원주를 오갈 때는 그저 가기에 바빠 생각만 있을 뿐 들리지 못했다.

이제 이곳은 일부러 오지 않고는 들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기회를 만들어 신륵사를 방문하며 원을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