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6 (일) 모악산 등산 끝내며 탐방
언제든 1월 초면 가장 추울 때다.
오늘 새벽의 전주지역 최저 기온은 영하 5℃, 낮 최고 기온은 영상 4℃로 별로 추운 날씨는 아니다.
산 위 날씨는 지상보다 훨씬 춥겠지만, 이날 정상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추워 보이지 않는다.
겨울이라 날씨도 대체로 선명하다.
산행 끝내고 내려가는 길에 심원암 북강3층석탑과 심원암을 잠시 둘러본다.
□ 금산사 심원암 북강삼층석탑(北崗三層石塔) (보물 제29호)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금산사 동쪽의 심원사 북쪽에 위치한다.
북강(北崗)이란 곧 북쪽 산등성(언덕)을 뜻한다.
탑의 받침부나 1층 몸체는 여러 조각의 돌을 조립한 것으로 통일신라의 양식이다.
각층 지붕과 2층 이상의 몸체를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고
받침부 위아래의 너비가 일정한 점은 고려 탑의 성격이다.
층마다 지붕은 넓고 경사가 급해 전체적인 안정감이 덜하며, 곳곳에 장식한 기법도 거칠다.
깊은 산속에 위치하여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안내문)
북강3층석탑을 보니 심원암으로 700여 m를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만난 대숲은 겨울인데도 여전히 푸른 잎이 그대로다.
대나무는 휘지 않고 곧게 자란다고 하여 선비의 지조를 나타내는 데, 잎도 푸르다.
심원암
□ 심원암
이 암자는 신라 36대 해공왕 당시 진표 율사가 금산사를 중건하면서 선객들의 수도 도량으로 건립한 암자다.
많은 선객이 도를 이룬 호남 유일의 선도량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인조 13년(1636)에 수문선사가 복원하였으며,
철종 원년(1847)에 남쪽 250m 아내인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최근에 건립한 것이다.
임 암자에는 보물 29호인 북강3층석탑이 있다.
이 탑을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조선조 때에는 서민층과 사대부집 부녀자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몇 채의 요사채를 건립하여 이들의 불편을 덜어 주었다고 하나 현재는 옛 건물터만 남았다. (안내문)
마애불상 머리에 또 부처님이 계신다.
사각형의 길쭉한 바위에 모신 부처님이시니 최근에 만든 불상일 것이다.
부처님은 더운 인도 분이니 신을 신지 안으셨겠지만, 추운 우리나라에선 현지화하여 신을 신겨드리면 좋겠다.
심원암은 사실상 북강3층석탑을 책임지는 청지기 역할을 한다.
단출한 심원암에서 부지런히 1.6km를 이동해 금산사로 들어간다.
시내에서 금선사로 들어갈 땐 일주문부터 통과하겠지만, 산행 후 만나는 사찰은 늘 거꾸로 들어선다.
먼저 산객을 맞는 것은 오래된 부도탑이다.
□ 금산사
금산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되어 14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까지 법등을 밝혀온 유서 깊은 명찰이다.
금산사 일원은 사적 제4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호남평야 가운데 우뚝 솟은 모악산 서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는 등 수난을 겪었으나
이후 많은 문화재가 조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599년)에 나라의 복을 비는 자복사資福寺로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금산사의 숭제법사崇濟法師에게 출가했다는 기록과 통일신라 초에 활동한
의적義寂(681-?) 스님이 당나라 현장스님에게 유학하고 돌아와 금산사에 머물며
25부 7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기록들을 통해 당시 금산사가 창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대사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주석하며 시작되었다.
진표율사는 미륵전을 짓고 미륵 장륙상을 조성하였으며 해마다 단壇을 열어 법시法施를 널리 베풀었다.
후삼국시대에 금산사는 다시금 역사서에 등장한다.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아들 신검 등에 의해 금산사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였다는 내용이다.
금산사에는 ‘견훤성문’으로 불리는 개화문과 석성 등 견훤과 관련된 유적이 전하고 있다.
[출처_금산사]
□ 금산사 혜덕왕사 진응탑비 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4호)
혜덕왕사 소현(1038-1096)은 고려시대의 고승으로 금산사의 중창주이다.
11세 때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법상종을 계승한 지광국사智光國師 해린海麟의 제자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진표율사의 중건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가람의 남쪽에 광교원을 설립하여 『법화현찬法華玄贊』『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을 비롯한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096년 12월 18일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
숙종은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여 탑비를 세웠다.
글씨는 구양순법의 해서로 썼다.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지만 당시 대표적인 문벌가인 인주이씨仁州李氏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서 왕사의 가계와 탄생 그리고 출가와 수행을 서술하고,
금산사에 광교원을 설치하여 유식 전적을 간행한 사실과 입적 후 재를 지낸 경비를 조정에서 지원한 내용이다.
그리고 음기陰記에는 왕사의 문도를 열거하였는데 승통僧統, 수좌首座, 삼중대사三重大師, 중대사重大師,
대사大師로 나누어 인명을 열거한 자가 110여 명이고 언급된 인명은 1천8백여 명에 이른다.
이 비의 음기는 고려시대 스님의 문도를 성격에 따라 구분한 예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현재 탑비는 귀부와 비신 만이 남아 있고 비의 머리 부분은 결실되었다.
대리석의 비신은 높이 2.78m, 너비 1.5m로서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해동 금석원』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비문의 글씨는 약 2cm의 크기로 구양순의 해서체인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녔다. 비의 앞면에 43행 77자씩으로 스님의 출생과 교화활동, 입적 등을 적었으며
그 둘레는 당초문으로 장엄했다.
서자(書者)와 찬자(纂者)의 이름은 판독할 수 없고 각자(刻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해동금석원』에 의하면 이오가 짓고 정윤(鄭允)이 썼으며 비음(碑陰)은 채추탄(菜推誕)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금속고』에서는 비음을 채추탄이 쓴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 위에 놓였는데 신체는 장대하나 머리는 작은 편이다.
등에는 육각의 갑문(甲文)을 새기고 등위에 비신을 얹는 삽입부를 마련했다.
역동적인 발과 비늘의 표현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여 고려시대의 탑비 가운데 우수한 작품임을 알게 한다.
[출처_금산사]
[사진 출처_금산사]
□ 천왕문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동, 서, 남, 북 네 곳을 지키게 된다.
이곳 천왕문은 1994년에 가람을 중수하면서 새롭게 조성했다.
안에는 사방에서 불법을 외호하는 사천왕상을 봉안하였다. 원교 이광사 선생의 현판 글씨가 유려하다.
사천왕은 불법 세계의 호법신으로 수미산을 중심에 둔 불국토의 사방을 지키는 하늘의 왕이다.
천왕문은 사천왕을 모셔 높은 문 형태의 건물이다.
금강문이 없는 사찰에서는 천왕문이 금강문의 역할을 겸하는데,
금산사에서는 금강문과 천왕문을 모두 설치했다.
그만큼 강력하게 불법을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표현된 것이다.
금산사의 천왕문은 최근에 새로 조성한 것이다. [출처_금산사]
□ 당간지주(보물 제28호)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출처_금산사]
□ 미륵전(국보 62호)
보제루를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국보 제62호인 웅장한 규모의 미륵전이 보인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그분의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라는 것을 상징화한 법당이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킨 것이 미륵전이요,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 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한편 오른쪽 벽에는 1890년(고종 27)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聳俊), 정선(定善), 오종(午從) 등의 금어(金魚)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출처_금산사]
□ 금산사 노주 (보물 제22호)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 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 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출처_금산사]
□ 석련대
금산사 석련대 石蓮臺 (보물 제23호)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여 m 떨어진 곳에 보물 제23호 석련대(石蓮臺)가 있다.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 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 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석련대의 위치가 지금의 제자리인지 다른 자리에서 옮겨진 것인지 알 수 없다.
규모가 워낙 거대해서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을 감안한다면 제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려시대 이후 언젠가 절을 중창하면서 석련대가 놓였던 전각은 사라지고
그 위에 봉안된 불상은 다른 전각이 새로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한편 이 정도의 대좌가 필요했던 불상이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금산사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이 대좌의 주인공은 미륵 장륙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뒤따라야 한다.
즉 석련대의 조성 시기가 미륵 장륙상을 봉안했던 8세기 후반과 맞아떨어져야 하지만
이 석련대를 대개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확한 문헌자료가 없을 때는 작품의 양식을 통해 조성시기를 판단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석련대의 경우는 충분한 역사적 정황이 성립될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 하대의 작품일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_금산사]
□ 대적광전
미륵전의 서쪽 즉 가람의 중심에 대적광전이 자리한다.
대적광전은 연화장 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대적광전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원래 대웅광명전(大雄光明殿) 또는 대법당이라고도 불렀다.
신라 때 진표율사가 창건하면서 지금의 미륵전을 금당(金堂)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자리에는 법당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대적광전이 지금의 웅장한 규모를 갖게 된 것은 정유재란 때 절이 전소된 후 1635년 수문대사의 중창에 의해서였다.
이후 영조 52년(1776)에 금파대사의 법손인 두월장로가 중수하였고,
1926년과 1938년 미륵전 보수 시에 수리되었다.
수문대사가 중창할 때 따로따로 모셨던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여섯 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대적광전 하나로 통합해 창건하였던 것이다.
거대한 규모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러한 한국 전통건축의 기능적, 예술적 지혜 덕택이다.
금산사가 미륵전을 토대로 미륵신앙을 표방하였지만,
한국불교의 이러한 통불교적 경향은 고려시대 이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마침내 대승불교의 대표적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한 대 전각을 건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외부 정면 처마 아래에 걸린 「대적광전」 편액은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이 1991년 쓴 글씨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난 황욱은 붓을 손가락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잡고 붓 맨 윗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꽉 눌러쓰는 이른바 악필법(握筆法)을 창안하였다.
이 편액의 글씨 역시 이러한 악필법으로 황욱의 글씨로는 이 외에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일주문에 걸린
「대화엄사(大華嚴寺)」와 「해동선종대가람(海東禪宗大伽藍)」 편액 등이 있다.
대적광전의 내부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5여래와 그 협시로서 6보살을 봉안하였다.
5여래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왼쪽에서부터 아미타불.석가모니불, 노사나불 그리고 약사불이다.
6보살은 역시 왼쪽에서부터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월광보살, 일광보살이다.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 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금산사의 대적광전에는 특이하게 5여래 6보살이 모셔진 것이다.
이는 한국의 불교의 특징인 통불교(通佛敎)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타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었고,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일찍부터 체득했던 때문이다.
전국의 명산대찰 어느 곳을 가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왼쪽 벽에는 1991년 당시 주지 월주 스님과 증명(證明) 월산 스님이 조성한 신중탱화를 봉안하였다.
[출처_금산사]
‘견훤성문’으로 불리는 개화문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인 금산사는 59개의 말사가 있다.
옛 영화를 말해주듯 미륵전의 웅장한 모습에 압도됐다.
많은 전각이 있으나 산행 뒤라 사진을 다 담지 못한 게 아쉽다.
이번 포스팅은 금산사 홈페이지의 내용을 복사하는 것으로 쉽게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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