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_114
경앙문(景仰門)
경앙은 "크게 우러러봄, 또는 덕을 크게 우러러 봄"이라는 뜻이다.
충의당
경절사
하공진 공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고려 충절신(高麗 忠節臣) 하공진 공(河拱辰 公) 사적(史蹟)
충절공 하공진 공은 진주 출신 고려 무인으로서 뛰어난 식견과 빛나는 충성심을 발휘하여 외적을 격퇴시켰을 뿐 아니라
국가를 위하여 40만 적군을 회군시키는 방편으로 스스로 불모가 되었으나 충절과 의를 저버리지 않고
신명을 초개와 같이 버려 죽음으로써 오히려 큰 영광 얻은 것이다.
고려사 열전과 본기에 따르면 성종 13년(서기 994년) 이승알을 처음 압록강 도구당사로 하였다가
곧 군사와 경제의 중요한 자리이므로 하공진 공을 대신 보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종 조(穆宗朝)에서는 중랑장 서반직 정 5품으로서 목종을 호위하여서 생모 천추태후 음모를 막고 현종을 뫼시다가
왕실의 위란을 구하였으므로 상서성 좌사랑중이라는 동반 5품직으로 옮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당시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거란 태조가 당을 멸망시켜 왕이 된 것은
서기 907년 신라 효공왕 때로 발해를 서기 926년에 멸망시켜 동쪽으로 세력을 뻗어 왔다.
고려 성종 12년(서기 993년)에는 고려와 송 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침입한 적을
서희의 과감한 항변으로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강동육역마저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양국 관계가 이와 같이 어려울 때 고려 왕실이 왕위 계승 문제로 어지러운 가운데 이것을 바로 잡는다는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새 왕으로 세웠는데, 이것을 구실 삼아 그 죄를 묵과할 수 없다며
고려 현종 원년(서기 1010년)에 4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왔다.
고려 조정은 이번 침입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의 침공으로 그로 하여금 방어하게 하였으나
자만한 강조 군이 대군을 당해낼 수 없어서 도리어 포로가 되고 고려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서경이 함락되고 거란군이 쇄도하므로 왕이 멀리 남쪽 나주까지 피란하게 되었다.
이때 하공진 공은 피란길의 왕을 뵈옵고,
"이번 침입은 강조의 불충 무도를 명분으로 하는 바이므로 이제 강조가 포로가 된 마당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면 반드시 회군할 것 이외다."라고 여쭈어 어려움과 위험함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청화사(請和使)의 대임을 맡아
창화(지금의 양주)에 도착하여 거란 성종에게 직접 이 뜻을 전달하였다.
거란 성종은 하공진 공에게 물었다.
"국왕은 지금 어디 있느냐?"
"국왕은 어디 계신지는 알 수 없으나 강남으로 갔나이다."
"강남은 얼마나 먼고?"
"강남은 하도 멀어서 몇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거란 성종은 하공진 공의 말을 듣고 추적을 포기하고 철병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하공진 공의 지략이 주효하였던 것이다.
이듬해 거란 성종은 하공진 공과 고영기를 데리고 철수하였다.
국왕은 나주에서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하공진 공은 능변과 뛰어난 외교로 40만 대군을 물리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고영기와 같이 불모의 몸이 되어 거란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들의 충심은 한 시도 조국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저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외면은 거란에 충성을 바치는 척하였으므로 성종은 이들을 사랑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하공진 공과 고영기는 몰래 모의하여 성종에게 말하기를
"본국이 이미 망하였으니 신들이 병을 거느리고 가서 점검하고 오리이다."라고 하였다.
성종은 이를 의심하지 않고 허락하였으나 얼마 뒤 국왕이 환도하였다는 소식이 있었으므로
성종은 고영기를 중경에 살게 하고 하공진 공을 연경 즉, 지금의 북경에 안치하여서 양가의 규수를 골라
결혼까지 시키고 생활이 안정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일편단심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조국이라 하공진 공은 틈틈이 좋은 말을 모아서 동쪽 길 중요한 역에 배치하고
들어갈 계획으로 준비하였다.
이 비밀이 알려지게 되어 그는 성종의 문초를 받게 되었으니
"이놈이 밖으로 충직을 보이고 안으로 흉계를 품었으니 너의 죄를 알겠지?" 하고 격노하였다.
"신이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꺾어 버리지는 못합니다. 신은 고려인입니다.
감히 두 마음을 먹고 조국을 배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나이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고 본심을 토했다.
성종은 웃으며
"너의 마음은 거룩하구나, 그 충성심을 나에게로 돌려 섬긴다면 후히 상하리라." 고 말했다.
"내 비록 불모가 되었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 뜻이 일월과 같거늘 어찌 절개를 굽혀서 호주(胡主)의 신하가 될 것이냐."
고 언사가 점점 격하고 불손해 갔다.
성종은 노발대발하여 모진 고문을 다하였으나 하공진 공의 충절을 끝내 꺾지 못할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공은 멀리 동남쪽 조국 하늘을 바라보면서 비장한 최후를 노정에서 마치게 된 것이다.
이는 신라 박지성이 일본에서 왕자 미해를 돌려보내고 비장한 최후를 마쳤음과 남송의 문천상이 북원에 유수되어
만고에 그 정기를 드높여 청사에 빛나더니 하공진 공의 최후 또한 이를 앞지르는 장렬한 것이었다.
후인들은 그의 심간을 씹었다고 하였으니 그의 충절이 어떠했던가를 알 수 있다.
후일 문종은 공신각 위에 그의 영정을 그려 올려 추모하였으며, 후손은 조상의 공훈으로 길이 여영을 누리고 있다.
(안내문)
"나는 고려인이다, 감히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는 뜻의 한자
하공진 공 사적비
수덕제
진주성을 탐방하며 고려시대의 충신 하공진 공의 위대한 삶을 알게 되었다.
서희가 담판으로 거란을 물리친 일과 비견될만한 업적이다.
국가의 존망에서 외교로 거란의 40만 대군을 철군에 한 그의 업적을 되돌아볼 기회였다.
KBS 역사저널 그날 하공진 편 (아래 주소를 눌러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f_ZkhCHWMg4&t=2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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