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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충청도·대전·세종

호두과자 원산지인 광덕산과 설경이 멋진 설화산, 그리고 맹씨행단

by 즐풍 2021. 2. 5.

2021_08(지하철 산행 순례_02)

 

 

2021.2.4. (목) 08:58~15:46(6시간 48분 산행, 30분 휴식, 이동 거리 15.9km, 평속 2.4km/h)  최저 기온 영하 8℃

 

 

산에 가면 산이 좋아 산에서 살고 싶다.

TV를 틀고 영화를 보면 하루 종일 영화만 보고 싶다.

내용이 좋은 책을 들면 책만 보고 싶은데, 눈이 침침하니 한계가 있다.

바람 좀 쐴 겸 산책을 나가면 또 마냥 걷고 싶으니 백수 생활도 아직은 견딜만하다.

 

맨날 산에 가거나 영화를 본다거나 책을 읽을 수도 없으니 적당히 섞어가며 살아야 한다.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천안과 아산에 걸쳐 있는 광덕산에서 설화산까지 산행하기로 한다.

광덕산 고도 700m에 설화산 고도는 441m로 높지 않으나 연계하면 14km 전후 거리라 부담은 있다.

게다가 며칠 간격으로 연속 산행을 하여 높아진 피로감을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

 

 

광덕산, 설화산 연계 코스

 

지제역에서 천안역까지는 5개 역을 지나며 25분 걸린다.

도심에서 벗어난 곳이라 역간 간격이 비교적 길다.

천안역에서 광덕사 입구까지 승용차로 가면 19.9km인데,

광덕사행 603번 버스는 시내를 돌고 돌아 25.4km에 65분 걸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니 천안시내 관광을 시켜주는 기분이다.

 

어젯밤 갑작스레 함박눈이 내린 후 광덕산 입구엔 제설작업이 제대로 안 돼 버스가 설설 긴다.

기사분이 관계 기관에 전화해 도로가 빙판이라며 제설제 좀 뿌려달라고 민원을 넣는다.

버스에서 내리니 시베리아로 들어선 것처럼 한기가 엄습해 배낭에서 옷을 꺼내 단도리를 해야 했다.

광덕산을 불교에서는 태화산이라고 부르는지 일주문엔 "태화산 광덕사"란 편액이 걸렸다.

뒤엔 호서 제일 선원이라고 자부심 쩌는 편액이 보인다.

□ 광덕사

 

652년(진덕여왕 6) 자장(慈藏)이 창건하였고, 832년(흥덕왕 7) 진산(珍山)이 중수하였으며,

1344년(충혜왕 복위 5)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충청도와 경기도 지방에서 가장 큰 절 중의 하나로서,

사찰 소유 토지가 광덕면 전체에 이르렀고, 89개에 달하는 부속암자가 있었다.

또한, 누각이 8개, 종각이 9개, 만장각(萬藏閣)이 80칸, 천불전(千佛殿)도 3층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타버린 뒤 1598년(선조 31) 희묵(熙默)이 중수하였고,

1665년(현종 6) 석심(釋心)이 불상과 종을 개수하였으며, 1679년(숙종 6) 상민(尙敏)이 중창하였다.

대웅전과 천불전만이 중건된 채 1980년까지 사세가 계속 기울었다.

1981년에 대웅전과 종각 등을 신축하고 천불전도 증축하였으며, 그 앞으로 석교도 가설하였다.

1996년 철웅(哲雄)이 15년 동안의 불사를 마무리 하여 대웅전·천불전·명부전·범종각·적선당·보화루 등을 중창하였다.

그러나 이 가운데 천불전은 1998년에 소실되었다.

이 절 일대에는 호두나무가 많기로 유명한데, 대웅전 앞에 있는 호두나무는 700여 년 전

유청신(柳淸臣)이 중국에서 처음 들여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왼쪽 나무가 가장 오래된 호두나무다.

천안 특산물 광덕호두

 

이 고장의 "호두"는 고려 충렬왕 16년(1290년) 류청신 선생이 원나라에서 왕가(王駕)를 모시고 올 때

호두 열매와 묘목을 가져와 묘목은 광덕사 경내에 심고,

열매는 광덕면 매당리 고향집 앞뜰에 심은 것이 시초이다.

그 후 선생의 후속 및 지역주민들이 정성껏 가꾼 결과 호두의 주산지가 되었다.

효능으로는 머리를 맑게 하여 주고 살결을 곱게 할 뿐만 아니라 노쇠를 방지하여 준다.

독특한 맛과 높은 영양가로 인하여 건강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안내문)

 

광덕사 대웅전

광덕사 3층 석탑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이다.

광덕사를 지나 우측 계곡으로 들어서니 개울 건너는 다리를 지나 천불전이 보인다.

최근에 만들어진 5층 석탑

계곡으로 오르는 길은 아직 아무도 가지 않았다.

저곳에 마련된 지도를 보니 이곳으로 오르면 장군바위를 거쳐 광덕산 정상까지 가려면 1km가 넘는다.

정상에서 설화산을 연계 산행하려면 길목인 장군바위를 왕복해야 하므로 한 시간 거리가 늘어나게 된다.

하여 광덕사로 내려가 급경사인 왼쪽 능선을 타고 정상을 오른다.

좀 전에 본 천불전 건물 

평택엔 2~3cm 정도의 눈이 내렸는데, 이곳은 약 3~4cm 정도의 눈이 내렸다.

광덕사 경내를 잠시 둘러보고 3.5km 거리에 있는 정상에 1시간 33분 걸려 도착했다.

4년 전 이곳에 왔을 땐 우중충한 날씨에 비도 조금 내려 조망이 별로였다.

오늘은 추워도 날씨가 맑아 사방으로 조망이 좋다.

조망은 정상에서만 가능하고 그 외 구간은 숲이 우거져 마냥 걷기만 할 뿐이다. 

정상 북쪽의 살짝 생기다가 만 상고대

 

□ 광덕산(廣德山)

 

해발 699m의 광덕산은 충남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과 아산시 배방면, 송악면 사이에 있는

산세가 수려하고 숲이 우거진 명산이다.

예로부터 산이 크고 풍후(豊厚)하여 덕이 있는 산이라 하였다.

산에는 광덕사, 잣나무 군락지, 장군바위, 강당사 등의 볼거리가 많다. 

명산으로서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거나 불길한 일이 있으면 산이 운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산자락에 있는 광덕사는 진덕여왕 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고 진산 대사가 중건한 절로

경기, 충청지방에서는 가장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리고 그 이후에 대웅전과 천불전을 세웠다.

이곳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3층 석탑이 남아 있으며,

팔각 형태의 지붕을 삽입하여 특이한 건축양식으로 지은 종각이 있다.

또한 대웅전 입구에 있는 천연기념물 398호 지정 보호수인 수령 400년의 호두나무도 볼만하다.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를 만드는 호두의 원산지이기도 하다.

광덕산 부근에서 생산한 호두는 껍질이 얇고 알이 꽉 차서 천안시의 대표적인 명산물이다.

                                                                                             (아산, 천안시청 홈피 편집)

 

정상은 천안시와 아산시 두 지자체 관할인데, 이곳 아산과 천안은 사이좋게 표지석에 나란히 이름을 새겼다.

조형물도 서로 몸을 맞댄 형상이라 보기 좋다.

정상에서 한 칸 내려와 잠깐 이 능선을 걷는 데, 바람에 무척 차갑게 느껴진다.

올라올 때 더워서 벗은 옷을 더 걸친 다음에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장군바위

 

옛날 허약한 젊은이 가이 곳을 헤매다 허기와 갈증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 소리 나는 곳을 가봤더니 큰 바위 밑에 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를 신기하게 여겨 손으로 물을 받아먹고 얼마 되지 않아 몸이 마치 장군처럼 튼튼하게 변해

그때부터 장군바위라고 한다.   (안내문)

 

옆에서 본 장군바위

별로 많이 내리지 않는 눈도 바람이 불며 비탈의 눈을 쓸고 와 여기선 등산화가 푹푹 빠지도록 눈이 많다.

평지는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데, 눈길은 은근히 다리에 부하가 걸린다.

아이젠을 착용하려고 장갑을 벗으면 바람이 불어 금방 손이 어는 게 귀찮아 내내 그냥 걸었다.

맨 등산화라 산등성이를 오르내릴 때 발에 힘을 더 줘야 해 다리가 받는 부담도 커지기만 한다.

키 작은 소나무에 바람이 쓸고 온 눈이 얹혀 제법 운치가 있다.

이런 운치가 높은 나무마다 다 실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낙엽이 그대로인 단풍나무도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지도엔 광덕산 장고개 삼거리다.

우측으로 가면 망경산을 거쳐 배방산까지 갈 수 있고 직진하면 설화산으로 간다.

하지만 지도를 놓고 보면 직진해야 망경산이고 왼쪽으로 진행해야 설화산 가는 길이다.

천안 광덕산을 처음 왔을 때 망경산을 들머리를 잡았으니 오늘은 설화산 이름에 끌려 설화산으로 간다.

삼거리에서 약 380m 내려오면 제법 넓어 길이 좋은 임도를 만난다.

날씨만 좋으면 쉬어가기 좋은 쉼터이지만 날이 추우니 쉰다는 것도 사치라 겨울 산행은 힘들다.

벌목한 자리에 심은 묘목이 아직은 키가 작으니 눈이 바람에 쓸리지 않았다.

설화산 입구에서 눈꽃의 아름다움을 보니 말 그대로 겨울에 어울리는 이름의 설화산이다.

삼거리에서 설화산까지 제법 긴 거리다.

집에 프린트가 없어 지도를 PC로 보고 왔어도 간혹 헷갈리는 지점이 있다.

트랭글 덕분에 산행 안내지도가 없어도 궤도를 잘 잡고 가니 세월이 좋다.

 

오늘까지 세 번째 2~3일 간격으로 연속 산행하다 보니 체력에 조금 압박이 온다.

광덕산 입구는 해발 147m로 700m인 정상까지 그런대로 무리 없이 올랐다.

긴 능선 따라 12km 지점의 설화산 전위봉인 이 작은봉은 트랭글에선 407m로 뜬다.

안부로 내려가면 362m인데, 441m인 설화산 정상까지는 불과 500m 거리밖에 안 된다.

작은봉 오른다고 기를 썼는데 45m를 안부로 내려가 또다시 약 80m를 올라가야 한다.

마지막 너무 먼 곳에 있는 설화산을 포기하자니 지금까지 걸은 거리가 아깝다. 

광덕산에서 멀리 두 봉우리가 도두라지게 불쑥 솟은 모습 설화산을 보면 누구나 당장 달려갈 만큼 멋지게 보인다.

그런 풍경이 산행 내내 숲이 우거져 찍을 장소가 없는 게 안타깝다.

작은봉에서 보는 설화산 정상이다.

광덕산에서 볼 땐 왼쪽 암봉만 허옇게 드러난 모습이라 이 사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멋지다.

 

□ 설화산(雪華山)

 

설화산은 좌부동과 송악면 그리고 배방읍에 걸쳐 있는 산으로서 서쪽 산기슭에 외암 민속마을,

동쪽 산기슭에 맹씨행단 품고 있는 해발 441m가 되는 높지 않은 산이다.

이른 가을철부터 늦은 봄철까지 눈이 덮여 장관을 이룬다 해서 설화산이라고 한다.

붓끝 같은 봉우리가 솟아 있어 문필봉이라고도 하며

그 기세가 매우 독특하여 문필가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곳에는 칠승팔장지지의 명당이 있어 예로부터 투장이 성행하여 가뭄이 들면

투장한 곳을 찾아 파헤치고 기우제를 지내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   (출처_대한민국 구석구석)

 

앞쪽 긴 능선의 우측에 제일 높은 봉우리가 광덕산 정상이다.

방금 지나온 작은봉이다.

설화산보다 불과 30여 m 작은 봉우리라 이름도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작은봉이라 불린다.

1등과 2등의 차이를 산에서도 실감하는 이름이다.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며 끝나는 작은 봉우리 

어제 입춘이 지났으니 봄이 시작된 셈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추운데, 공교롭게도 특히 더 추운 날만 골라 산행했다.

지금도 여전히 귓가를 울리며 바람이 지나간다.

설화산에서 초원설화타운 1단지 아파트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나

맹사성과 관련된 맹씨행단을 보기 위해 올라왔던 안부로 다시 내려가며 보는 작은봉

맹씨행단까지 약 1.5km를 오롯이 즐풍의 발자국을 깊이 찍으며 길을 낸다.

 

맹씨행단의 본거지인 고택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건축하였다고 전하며, 

그 이후 맹사성 일가가 살던 옛집으로 고려시대 가옥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안내문)

담장 밖에 조금 멀리 구괴정(九槐亭)이란 정자가 있다.

구태어 가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맹사성, 황희, 권진 세 정승이 느티나무 세 그루씩 심고 정사를 논했던 정자라 하여 구괴정 또는 삼상당이라고 한다.

                                                                                                                                       (안내문)

세덕사(世德祠)

세덕사는 두문동 72현인 맹유(孟裕)와 맹희도(孟希道), 조선조의 정승인 맹사성(孟思誠)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이다.

맹유는 고려 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하였고, 맹희도는 벼슬을 버리고 한민(閒民)의 절개를 지켰다.

맹사성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백성의 아픔을 함께 나눈 서민적 정승으로 유명하다.  (안내문)

맹씨행단을 지키는 소나무 군락

 

맹씨행단

 

현재의 충남 아산시 배방읍에는 맹사성의 고택이 있다.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맹씨행단(孟氏杏壇)으로 불린다.

고택의 본채는 가장 오래된 한옥 건축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적이다.

행단이란 공자가 은행나무 단 위에서 가르쳤다는 얘기에서 나온 말로, 학문을 닦는 곳을 상징한다.

본래 고려말 장군 최영의 집이었는데, 손녀사위였던 맹사성이 물려받은 것이다.

고택 뒤에는 맹사성과 부친 맹희도, 조부 맹유를 모신 사당인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택 뒤편 언덕에는 맹사성이 황희, 허형과 함께 각각 세 그루 느티나무를 심은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는 정자인 구괴정(九槐亭)이 있다.

뜰 안에는 수령이 600년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가을 낙엽과 함께 그 자태를 뽐내며,

이곳이 유서 깊은 고택임을 입증하고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쌍행수(雙杏樹, 은행나무)

충청남도 도 나무 제8-91호, 수령이 600여 년 되었다고 전해진다.

소나무 언덕에서 찍은 고택

고택

구괴정으로 나가는 출입문

현관이자 사랑방이 있는 행랑채인 셈이다.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 1360-1438)

 

본관은 신창(新昌), 호는 고불, 시호는 문정공(文貞公)

조선 세종대왕 때의 상신으로 5부 판서와 좌·우의정을 역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단식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판서와 정승의 높은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도 검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며 다닌

우리나라 대표적 청백리로 그 이름이 높다.   (안내문)

 

맹사성은 신창 사람으로 하늘이 낸 효자였다.

10세 때 벌써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어머니상을 당해서는 7일간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아니하고

애통해하였다.

장례를 모신 후 3년간 시묘[侍墓:] 살이 하면서 죽으로 연명하였다.

어머니 묘 앞에 측백나무를 심었는데 어느 날 멧돼지가 주둥이로 쑤석거려 놓아 말라죽고 말았다.

그는 이것을 보고 통곡하였는데 이튿날 그 멧돼지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

인근 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응[感應:]한 소치(所致:어떤 까닭으로 생긴 일)라고 칭찬하였다.

이 일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져 효행 정려(충신 효자 열녀들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가 내렸다.

 

맹사성의 집은 너무 협소하고 초라하였다.

병조판서가 사무적으로 여쭙고 보고할 일이 있어 그의 집에 갔다가 마침 소나기를 만났다.

일을 마치고 소나기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방안 곳곳에 비가 새서 의관이 다 젖고 말았다.

병조판서는 집에 돌아와서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이와 같은데 내가 어찌 바깥 행랑채를 지을 것인가.”

하고 행랑채 공사를 중지 철폐[撤廢:]하고 말았다.

 

고향 온양을 오가는 길에 결코 하급 관청에 들르는 일이 없었으며 늘 한두 사람의 종자만을 데리고 다녔다.

때로는 혹 소를 타고 가기도 하였다.

양성과 진위현의 두 원(군수)들이 맹정승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장호원에서 살피도록 하였다.

어느 날 그들은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꾸짖으며

“이 길은 곧 정승이 지나갈 길인데 누가 소를 타고 지나가는가. 빨리 소에서 내려라.” 고 호통을 하였다.

맹사성은 “온양 맹 고불이 지나가더라고 말하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급히 현의 동헌에 돌아가 각각 원에게 보고하였다.

두 원은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달아나다가 품에 간직하고 있던 관인(官印)을 언덕 아래 연못에 빠뜨리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이것을 뒷사람들이 이름 짓기를 인침연(印沈淵)이라고 하였다.

 

맹 고불이 온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용인의 한 여관에 들렀다.

딸린 하인들이 매우 많고 행색이 당당한 선비 일행이 그 여관의 다락을 먼저 차지하고 있었는데,

맹 고불은 한 귀퉁이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비는 영남 부호의 자제로 녹사(錄事:조선시대 의정부와 중추부의 종 6〜7품 관직) 벼슬을 하기 위해

시험 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그 선비가 맹 고불을 보고 오라 하여 다락 위에 같이 올라가서 담론도 하고 바둑도 두었다.

그리고 또 공(公) 자 당(堂) 자로써 문답하는 운(韻) 자를 하였다.

고불이 먼저 묻기를 “어째 서울에 올라가는 공(何以上京公)”

하니 그 선비가 대답하기를 “녹사 시험 보러 올라간 당(取才上去堂)”이라 하였다.

고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위하여 벼슬을 줄 것인 공(我爲公差除公)”

하니 그 선비가 답하기를 “하하 안 될 것이 당(嚇不堂)”이라 하였다.

뒷날 정부 관아 안의 과시장[科試場:]에 그 선비가 시험 보기 위해 들어와서 큰 절을 하였다.

고불이 그 선비를 보고 “어찌 된 것인 공(何如公)”

하니 그 선비가 깜짝 놀라 물러가서 엎드려 대답하기를 “죽으러 갑니 당(死去之堂)”

이라 하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고불이 지난날 실제 있었던 일들을 모든 대신들에게 이야기하니 모두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고불이 그 선비를 녹사로 삼아 의정부의 일을 보게 하였다.

그 녹사는 후일 고불의 신임과 추천에 힘입어 여러 차례 주군(州郡)의 수령[首領:]으로 임명되어서

유능한 관리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를 공당문답(公堂問答)이라 하였다.

                                                                                      출처_맹사성의 공당문답, 작성자: 강암

고불 맹사성 기념관에 들리면 좋겠으나 코로나-19로 거리두기가 안 풀려 휴관이다.

 

천안 광덕산에 들려 호두나무 전래가 된 역사를 알 게 되었고,

겨울엔 눈이 내린 게 더 멋지다는 설화산에선 고생 좀 했다.

하산길에 맹씨 행단에 들려 맹사성이 청백리로 검소하게 산 것과 

그의 일생을 알게 되며 존경심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