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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기 인천

파주 자운서원과 단풍

by 즐풍 2019. 11. 1.









2019.10.27. 일  15:50~16:51  한 시간 탐방



감악산 출렁다리를 보고 벽초지 수목원으로 갈 때 율곡 이이 유적지를 지나쳤다.

율곡선생유적지가 자운서원과는 전혀 다른 곳이란 생각에 그냥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같은 장소다.

진작 알았다면 두 번 걸음 할 필요가 없었는데, 무지한 바람에 벽초지 수목원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것이다.

결국, 시간은 시간대로 기름값은 기름값대로 낭비한 셈이다.


자운서원은 작년 이맘때인 2018.10.18. 다녀갈 때 단풍이 절정이었다.

그때 본 자운서원의 단풍이 맘에 들어 감악산 출렁다리와 벽초지 수목원에 온 김에 다시 들린다.

작년보다 열흘이나 늦은 시기지만, 벽초지 수목원을 보니 단풍이 절반도 안 펴 은근히 걱정된다.

아니나 다를까, 자운서원에 들어서니 이곳 역시 단풍이 절반 정도만 든 상태라 실망감이 앞선다.



 





파주 이이유적


이 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의 유적지 이다.

선생의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출생했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모두 아홉 차례나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으며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ㆍ 병조ㆍ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은 조선 유학계에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 대군의 양성, 대동법, 사창 실시 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유적지 내에는 율곡 선생을 비롯한 가족묘역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이 자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가족묘역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노씨 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선생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이 중심 묘역을 이루며 그 외의 가족묘 등 모두 14기가 조성되어 있다.

자운서원은 조선 광해군 7년(1615)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어 효종 원년(1650) ‘자운(紫雲)’이란

현액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으로 숙종 39년(1713)에 선생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 선생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다.

이 외에도 숙종 9년(1683)에 건립된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와 ‘이이선생 신도비’ 유적 등이 있으며

율곡 선생의 유품 및 일대기를 전시한 율곡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1973년 자운서원, 율곡이이묘, 신사임당묘가 각각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2월

율곡 이이 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국가사적 제525호 “파주 이이 유적”으로 승격되었다.  (비짓코리아 인용)


율곡선생 유적지 정문을 통과하면 제법 단풍 든 풍경을 볼 수 있다.

단풍은 딱 여기까지다.










율곡이이 신도비


율곡이이 신도비는 자운서원 경내의 좌측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조선 중기 대학자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이 신도비는 율곡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앞뒷면에 걸쳐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앞면에 몇 군데의 총탄 흔적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 109cm, 두께 39cm이며 현재 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파주시청 홈페이지)






자운서원


이 서원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 유림들로 인하여 창건되었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란 사액을 받았다.

그 뒤 숙종(肅宗) 39년(17B)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2∼1695) 두 분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조선후기인 고종(高宗)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祠堂)과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높은 대지위에 세워졌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음력 8월 중정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비짓코리아 인용)


자운문















작년엔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단풍나무가 거의 동시에 단풍이 들었는데, 올해 느티나무 단풍은 이미 말라비틀어졌다.

빨리 왔거나 늦게 와도 소용없는 일이 된다. 




















나무 크기나 형태로 보면 오른쪽보다 왼쪽이 못하지만 주변 풍경과 조화가 훨씬 좋다.




오른쪽 느티나무는 좀 더 풍성해 보여도 주변 건물과 너무 가까워 다소 조화가 없어 보인다.
























맨 위 건물인 문성사에서 내려다 본 풍경




















나무에 낀 이끼가 산속 바위에 낀 이끼를 연상케 할 만큼 연륜을 느끼게 한다.















여견문 앞 작은 저수지




















여견문(如見門)의 뜻이 뭔지 찾아봐도 알 수 없다.

如에는 가다(往)라는 뜻도 있다고 하니 율곡 이이선생의 묘소를 보러 가는 문이란 뜻일까.









첫 번째 묘는 이이의 맏아들 이경림의 묘지다.





맏아들 묘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율곡이이(李珥)의 어머니인 신사임당(1504∼1551)의 묘소이다.

묘는 남편 이원수(李元秀)와 합장묘이다.

신사임당은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강릉에서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무남 5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세 때 이원수에게 출가하였는데 친정에 아들이 없어서 남편에게 동의를 구한 뒤 친정에 머물렀다.

그 후 시댁의 오랜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하기도 하였고 38세가 되어서 서울 수진방 시댁에서 시댁살림을 주관했다.

슬하에 4남 3녀를 둔 다복한 생활을 하였다.

본명은 신인선(申人善)이고 사임당은 당호(堂號:이름 대신 허물없이 부르거나 쓰기 위해 지은 이름)로써,

최고의 여성상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임당은 어려서 경전(經典)에 능통하였으며, 7세 때 이미 산수도(山水圖), 포도도(葡萄圖)를 그렸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교함을 발휘하는그의 화풍은 따를 자가 없었고, 필법(筆法)도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이자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남편을 잘 보필한 아내이다.

교양과 학문을 갖추고 천부적 소질을 발휘한 예술가로서 우리나라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다.

묘역은 봉분 앞 중앙에 묘비가 있고 묘비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일렬로 놓여있고 좌우에는 키 작은 문인석 1쌍이 자리 잡고 있다.

후에 새로 세운 까만 돌(烏石)로 만든 묘비 1기가 묘 뒤편에 있으며, 상석 앞부분은 화강암 바닥으로 단장하였다.  (비짓코리아 인용)





이이의 맏형 부부묘





율곡 이이묘


조선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묘이다.

이이는 중종 31년(1536)에 강릉 북평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서울 본가로 올라와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명종 3년(1548) 13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에 호조좌랑에처음 임명된 이후 황해감사, 대사헌,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유학자로 근본원리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학문 연구의 태도로 삼았다.

학문을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책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성리설》,《성학집요》, 《격몽요결》등이 있다.

현재 묘역에는 선생의 묘와 부인 곽산노씨의 묘가 위·아래로 인접해 있다.

묘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다.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 평범한 묘제 형식이다.

후대에 묘비 1기가 추가되었으며, 신사임당 묘를 비롯하여 가족묘 13기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비짓코리아)


위쪽이 부인 곽산 노씨 묘이고 아래쪽이 율곡선생 묘일 것으로 생각한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뜬 후 나중에 율곡 선생 묘를 만들며 공간이 없자 아래쪽에 만들었을 것이다.

크기도 더 크다.











양쪽의 문인석




















율곡선생의 묘에서 내려다본 가족묘










왼쪽에 떨어진 가족묘














율곡기념관의 구도장원공 안내문





율곡선생상과 신사임당상





시간이 넉넉하면 마장호수의 출렁다리를 볼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부족해 자운서원을 끝으로 귀가했다.

어제 북한산 단풍 산행에 이어 오늘은 파주의 감악산과 벽초지 수목원, 자운서원에 내려앉은 단풍을 보며 알차게 보냈다.



2018년 10월 18일 자운서원의 단풍 http://blog.daum.net/honbul-/1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