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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기 인천

국립 광릉수목원과 광릉 세조릉 탐방

by 즐풍 2019. 6. 10.




2019.04.06.토  오전,  비올듯 흐림


입사 동기 정기 모임을 어제 저녁 포천 "갈비생각"에서 저녁을 먹는 것으로 시작했다. 

광릉수목원 인근 펜션으로 자리를 옮겨 강릉에 사는 동기가 공수한 싱싱한 문어회로 2차 마무리했다.

이 왕문어는 4.6kg에 달하는 거대한 놈으로 아침 식사 때 또 먹었으나 여전히 남을 만큼 많은 양이다.

동기는 매번 이렇게 푸짐한 문어를 공수하며 몇 년 째 공덕을 쌓고 있으니 정말 고마운 일이다.


식사 후 예약한 광릉수목원에 입장했으나 입장료 보다 주차비가 세 배나 더 비싼 3천원이다.

아직 꽃은 커녕 나뭇잎도 거의 돋지 않았음에도 아침부터 주차장이 만차일 정도로 방문객이 붐빈다.

입장객은 하루 5천명 한도라고 하니 꽃 피는 봄이나 단풍든 가을엔 예약하기도 쉽지 않겠다.

정기 모임 때 늘 느끼지만 모처럼 만났음에도 아직 봄꽃을 보기엔 너무 이른 단점이 있다.


 


아침에 들린 시당은 음식이 정갈한 데 맛있다.




광릉수목원


1987년 4월 5일 개원한 광릉수목원은 산림청 산하 임업연구원의 부속기관인 국내 최초 수목원으로서 광릉 주변 약 500ha에 자리 잡았다.


건립 목적: 산림에 대한 자연학습교육 및 대국민 정서순화와 산림 사료의 영구적 보존과 전시로 국민의 산림환경보전 중요성 인식

건립기간: 1983~1987년



남근석



침엽수원부터 들린다.







광릉숲의 시작


국립수목원은 조선조 제7대 세조대왕과 정희왕후가 묻힌 광릉의 부속임 중 일부로 500여 년간 왕실림으로 엄격하게 관리해 왔다. 

국권침탈 후인 1911년 국유림 구분 조사 때 능묘 부속지를 제외한 '갑종요존예정임야'에 편입시켰는데, 이것이 오늘날 광릉숲이 되었다.

1983~1987년 구목원과 산림박물관을 조성하여 1987년 4월 5일부터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도한 식물자원화를 위한 다양한 식물종의 확보가 세계적인 관심사로 대두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1999년 5월 24일에는

임업연구원 중부임업시험장 수목원과에서 산림청 국립수목원으로 신설, 개원하였다. (팜플릿 편집)















열대식물자원연구센터










인도 정부에서 기증한 인도보리수


이 보리수는 2014년 1월 "한-인도 정상회담" 후속 조치로 인도 정부에서 "전략적 동반자"로 발전한 양국 관계를 기념하고,

한국 국민에 대한 각별한 우의를 전달하기 위해 기증한 것이다.

이 인도보리수는 석가모니가 실제로 깨달음을 얻은 나무에서 씨앗을 채취하여 묘목으로 기증한 것이며,

인도 정부가 태국, 스리랑카에 이어 우리나라에 세 번째로 증정한 나무다.  (안내문)


석가모니께서 보리수 나무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기에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보리수나무를 생각했으나 꽃을 보니 많은 차이가 있다.
















산림박물관에는 여러 종류의 마누를 가로, 세로로 잘라 심재를 보여준다.

이렇게 사람 보다 큰 나무를 자른 것도 제법 많이 전시되어 있다.










이 느티나무 표본은 암동댐을 만들며 임하호 주변이 수몰될 때 채취한 150년 생 느티나무다.






피아노에도 많은 나무가 피아노 현의 소리를 울리는 작용을 한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절구통




방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나무 뿌리























광릉(세조와 정희왕후)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1453년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1455년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후 국방력 강화, 직전법 실사, 경국대전 편찬 등의 업적을 남겼다.

정희왕후는 1455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안내문)








조선 왕릉


500년 이상 이어진 한 왕조의 왕릉이 거의 훼손 없이 남아 있는 예는 세계적으로 조선 왕릉이 유일하다.

조선 왕릉은 무려 42기나 된다.

태조 이래 왕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은 사람은 27명에 불과하지만,

왕후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사망했어도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도 왕릉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42기의 왕릉 중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를 200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했고

단 1년 만에 유네스코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다.


2009년 6월 동구릉, 광릉, 태릉 등 왕릉 40기가 일괄적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조선 왕릉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는지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왕릉 40기 전체를 실사한 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야 할 가치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ㆍ유교 사상과 토착 신앙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반영된 장묘 문화 공간이다.
ㆍ자연 경관을 적절하게 융합한 공간 배치와 빼어난 석물 등 조형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ㆍ제례 의식 등 무형 유산을 통해 역사의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다.
ㆍ왕릉 조성이나 관리, 의례 방법 등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의궤(儀軌)』 등 고문서가 풍부하다.
ㆍ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출처: 과학문화유산답사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