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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공원 탐방/북한산

북한산 바위에 새겨진 글자와 그림

by 즐풍 2019. 5. 20.

 

 

북한산은 오백년간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을 둘러싼 산으로 수많은 시인묵객이 지나간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북한동 계곡에 행궁과 신영루 창고 등이 설치되어 이를 관리하는 관료들의 출입도 잦아 그들이 남긴 문자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의 용학사 바로 앞에 흔적만 있는 신영루 주위의 암벽에 10여개 이상의 비문

이나 선정비를 남겨 두었는 데 백성의 자발적 의지인 지 궁금한 것도 있다.

 

비봉엔 진흥왕 순수비 복제품이, 백운대 정상엔 3.1운동 관련 한자 등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자가 있는가 하면 의상

능선엔 자명해인대, 미륵폭포 동령폭포 구천폭포에도 시인묵객의 의미있는 한자도 많다. 이 외에도 도처에 한자나

그림이 있는 바위를 만만챦게 볼 수 있는 데 하나씩 살펴본다.

 

 

 

 

 ▼ 진흥왕 순수비

향로봉과 사모바위 사이에 있는 비봉 정상에 있는 비석으로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신라 땅으로 편입한 뒤 왕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이를 판독하여 그 내용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본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지금 세워져 있는 것은 복제본이다. 자세히 보면 비석의 기단은 원래 바위를 다듬

어 만든 것이 보인다.

 

처음 이 비봉을 먼저 올라봤던 아내와 함께 오를 때 도저히 못 올라 포기했던 곳인데 지금이야 등산화가 좋아 미끄러

지지 않고 쉽게 오를 수 있다, 서기 568년 전후로 세워졌다니 신발도 변변치 않았을 당시에 돌을 다듬고 글자를 넣어

이곳에 운반하여 세우기까지 그들의 고생이 눈에 잡힌다. 

 

  

 백운대 정상 태극기 아래 목책으로 둘러쌓인 곳에 이런 한자가 각인돼 있는 글은

 

敬天愛民 獨立宣言 記事
己未年 二月 十日 朝鮮獨立宣言書 作成 京城府 淸進町 六堂 崔南善也
己未年 三月 一日 塔洞公園獨立宣言 萬歲導唱 海州首陽山人 鄭在鎔也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2월10일 서울 청진동의 육당 최남선이 썼고 3월1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만세는  해주 수양산 사람 

전세용이 선도했다.'는 내용으로 정재용의사가 쓴 글이라고 한다.  

(정재용의사: 3.1운동 전날 밤에 서울역에서 100장의 독립선언서를 '원산교회'로 부치고 남은 한 장을 가지고 있다가

다리던 시민들 앞에 뛰어나가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내 행진에 나선 독립투사였다.  나라에서는 정옹(鄭翁)의 거

룩한 공을 기려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지금은 등산화 체인에 갈리고 스틱에 긁히고 밟혀 많이 훼손되어 목책을 세워 보호하고 있으나 미봉책에 불과하다.

 

 

 ▼ 청하동문

부왕사지로 가는 길목에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청하동문은 푸른 노을이 뜨는 마을로 가는 문이란 뜻이다.

바로 바위 옆 면엔 다음 사진에 보이는 일붕기도처라고 암각돼 있다.  

  

 ▼ 일붕기도처

북한산 도처에 일붕 서경보 스님의 발자취는 여러 군데 남아있다.

바위 왼쪽을 자세히 보면 청하동문 글자가 어렴풋 보인다.

 

 ▼ 백운동문

흰구름이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문이란 뜻인데 북한산 최고봉인 백운대가 흰구름에 걸려있어 백운대란 이름이 지어진 걸까?

위치는 용학사에서 큰길로 내려가지 말고 바로 그 윗길인 샛길로 내려가다 보면 우측에 있는 바위에 암각돼 있다. 백운동문

암각화 바로 옆엔 비석 모양으로 깍아 글자를 넣었지만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데 비석머리가 자연덮개로 형성된 게 절묘하다. 

 

 

 

▼ 자명해인대(紫明海印臺)

용출봉에서 용혈봉 방향으로 가면서 엄지바위 사이 우측에 있는 바위에 암각된 글자로 불교적인 용어다.

  

자명(紫明)은 산자수명(山紫水明)의 준말로 단풍이 들어 붉고 물은 맑다는 의미이고, 해인(海印)은 불교에서 깨달은 사람이 제법을

조관함이 바다가 만상을 비추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부처의 지혜를 표현하는 뜻이란다. 북한산에 단풍이 들어 만산홍엽일 때 계곡

물은 서늘하고 맑고 차가운 경관의 아름다움이 온 마음에 투영되어 고요하게 조망하는 곳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대동문 출입구 돌에 새겨진 글자로 간단한 연혁이겠지만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다.

 

사실, 북한산성엔 우리가 못 보고 지나쳐서 그렇지 도처에 수없이 많은 문자가 남겨져 있는 데 쳬계적인 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져 성벽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이건 원효봉 들레 성벽에 있는 문자 중 일부다.   

 

 ▼ 원효봉 시구문을 작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좌측 큰 바위에 그려진 두 개의 그림 중 하나로 나머지 하나는 아래 있다.

주위에 사찰이 없으니 일반 토속신앙과 연결된 그림이겠다.

  

 백마를 탄 산신님?

  

▼ 노적봉 동봉의 큰바위 바닥에 새겨진 글자로 "변치말자"란 문구가 재미있다.

친구간 우정일까, 아니면 남녀간 사랑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이상?

뭐라도 변치말고 영원하길 기대해 본다.

  

 ▼ 대동사 절 아래 바위에 각인  

  

 국녕사 계곡 폭포와 연결된 암봉에 새겨진 글자로 최동근과 ?인생이란 글자가 같이 각인된 것으로 보아

부부지간일 것이란 판단이 서는 데 우측 맨 윗글자인 성(姓)은 낙엽이 쌓여 글자 구분이 어렵다.

왼쪽 崔자의 새추字는 임금主자가 아니라 一(일)자가 하나 더 그어져야 하는 데 석수장이의 실수일까?

  

 도선사 옆 미륵폭포 상단에 각인된 것으로 미륵폭동유(彌勒瀑同游) 미륵폭포에서 같이 유람하다는 뜻.

산천을 유람하는 한자로 遊와 游가 있는 데 游를 쓴 것은 폭포 아래서 물놀이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조현명과 이주진이 조선중기인 1776년 병인년 한여름에 이곳 미륵폭포 아래서 더위를 식혔다는 말씀.

  

추현 이은 정유맹동(追顯 李은 丁酉孟冬)은 이주진의 아들인 이은이 다음해 한겨울에 아버지의 자취를 따라

이곳에 왔다란 뜻으로 아버지가 새긴 글자 아래칸에 글자를 새겼다.

 

진관폭포 옆면에 새긴 선비들의 이름

 

 사자능선에 있는 바위로 두 개의 오목한 그멍과 그 아래 홈을 이용하여 누군가 입 모양을 집어넣어 절묘하게 사람 얼굴을 만들었다. 

  

 ▼ 사자능선 막바지 보현봉이 바로 보이는 큰 바위에 1960년 대 후반에 누군가 새긴 글자로 할렐루야바위로

북한산에서도 보현봉의 기운이 가장 강하여 이곳엔 어느 종교인이 늘 기도를 하기도 한다. 

  

 

  

 노적사에서 북장대터로 가다보면 만나는 바위로 무(戊)는 긴 창에 도끼날을 붙인 형태로 휘둘러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무기로

일반적으로 '무기'라는 의미를 갖는 데 동장대 남장대와 함께 사방을 조망하고 관리하는 북장대 터에 남아 있으니 이와 관련하여 의미를 생각하면 되겠다.

  

백마부대 안쪽 계곡의 큰 바위에 새겨진 글자로 구씨 종중 종원(묘지)란 뜻으로 이곳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된 지역으로 상장능선을

낀 계곡의 합수폭포가 시원하게 흐르며 나무 그늘이 많아 여름이면 물놀이 최적 장소다. 예전엔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측으로 가던

글씨가 인류의 보편적 본능에 따라 우측으로 쓰고 근세까지 눕혀서 보관하던 책이 어느 순간 세워지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 바위 뒷면에 구가원(具家園)이 암각돼 있다  

효자골 입구 구가원 표지석에 간략한 설명이 보인다.

 

구가원 입구에서 충의길 구간에 있으나 주의하지 않으면 보기 힘든 곳에 있으며

淸潭洞이란 글자 그대로 물이 흐를 때 맑은 못이 곳곳에 있는 동네다. 

 

 

  

 칠유암(七遊巖), 북한산은 도성에서 가깝다 보니 조선의 내노라 하는 선비들이 산성계곡을 따라 오르다

이곳에서 돗자리 깔고 놀던 곳으로 숙종 영조 때의 시인 강박은 七遊聯句란 시를 남겼다고 한다.   

  

 백마대장군, 산성계곡로로 올라가다 노적사 가기 전 우측에 있는데 길이 없어 일반인은 찾기 어렵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길에서도 보인다.

그런데 백마는 풀 뜯어 먹으러 나가 자리를 비운걸까, 백마는 보이지 않고 대장군만 보이니 어쩐 일일까? 

  

 용학사 아래 산영루가 있을 당시 이곳엔 계류와 정자가 어울리는 명승지로 이름

높았는지 주위엔 수없이 많은 글자들이 암각되어 있으며 선정비도 꽤나 많은 편이다.

  

 

  

 

  

용학사 바로 아래 있는 바위에도 글자가 있는 데 뭔 뜻인지...

  

 

  

 노적사 가는 길의 표지석이 어느 순간 진국로로 변경되어 영 낯설다.

  

 삼천사 경내에 있는 마애석불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부대가 있는 효자리계곡에 숨어있는 석굴 속에 그려진 귀신과 호랑이 그림

 

한참 후에 다시 갔을 땐 칠도 다시 하고 관도 방치하여 음산한 분위기가 풍긴다.

 

이 외에도 여전히 많은 개인들이 남긴 글자가 많은 데 요즘엔 자연보호와 신고정신 때문인지 정으로 쪼아 각인하는 건

엄두도 못내기에 오히려 락카페인트로 남모르게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 소원발원한 글자가 점차 느는 추세다. 살기가

점점 팍팍해 지니 이게 아니다 싶겠지만 무엇엔가라도 기대고 싶은 심정 때문일까? 

아래 보이는 바위는 도선사 뒤에 있는 바위로 언젠지 모르지만 오래전에 소원발원이란 각자를 새겨 소원바위라고 불리는

바윈데 얼마나 절절했으면 저랬을까 싶다. 

 

 

 

덕암사 약사전

 

 

 

승가사

 

구복암 입구 바위부터 사찰 뒤 바위까지 사찰이 갖는 염원을 군데군데 많이 새겼다. 북두칠원성군, 나무미륵대불, 낙구,

하마가 갖는 의미가 뭔지 알고 싶은 데 이런 글자는 구복암에서 처음 보는 글자로 법상종 소속 사찰에 속한다.

 

 

구복암과 북두칠원성군 

 

 

심곡암은 아주 작은 비구니 사찰이나 굉장히 아름답고 예쁜 곳으로 이 마애불상 아래 작은 홈통을 만들어 샘물이 고인다.

 여래사에서 북악하늘길 가는 곳의 등선대 옆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노적봉 아래 계곡으로 하산하다 보면 산성을 쌓기 위해 암석을 채취하고 한 후 그림과 같이 부처님 세 분을 조성했으나

가운데 부처님은 목이 잘려 나가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산성 조성을 조선

숙종때 만들었다면 벌써 수 백년이 지나 역사적 유물로도 손색이 없는 데 이런 모습을 보인다니 안타깝다.

 

 

소개한 것 외에도 더 많은 글과 그림, 조각은 발견하는 데로 추가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