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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기 인천

평택의 삼봉 정도전 기념관

by 즐풍 2023. 3. 10.

2023_014

 

 

 

2023.2.8. (수)  오전에 탐방

 

 

새로운 왕조가 시작될 때 훌륭한 임금과 좋은 신하를 만난다는 건 국가의 기틀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조선을 건국할 때 정도전은 철저한 성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통치철학을 만든 장본인이다.

정도전은 망해가는 고려시대 때 이성계를 만나 조선을 건국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0여 년간  개혁의 주체로 조선의 건국이념을 제공한 이론가이다.

지난 산행 때 버스 시간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정도전 기념관에 일부러 찾았다.

 

 

 

□ 정도전 (삼봉, 鄭道傳)

 

이성계를 찾아가 장량이 되다


1375년 원나라의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합동작전을 상의하러 오게 되었다. 

이인임 등 친원파는 원의 사신을 맞아들이려 했지만 정도전 · 권근 · 이숭인 등 청년 그룹은 

이를 한사코 반대하며 아예 관련된 직무조차 돌보지 않았다. 

결국 조정에서는 정도전을 나주 회진으로 유배 보냈는데 그곳에서 이런 시구절을 남겼다.


예부터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인데, 목숨을 붙여 안락하게 살고 싶지 않네

이때 그는 혁명적인 꿈을 꾸고 있었다. 

그는 2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삼각산 아래에 삼봉재(三峯齋)를 지어 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그의 호도 삼각산을 뜻하는 ‘삼봉’이 되었다.

1383년 가을에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홀연히 발길을 북쪽으로 돌렸다.

이성계는 당시 함흥에서 동북도도지휘사(東北道都指揮使)로 있으면서 야인을 물리쳐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

정도전은 그런 이성계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가 이성계의 군막에 이르렀을 때 기강이 엄숙하고 대오가 잘 정돈되어 그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한나라를 세운 한 고조의 군사 전략을 일러 준 장량(張良)을 자처했다. 

이때부터 조선왕조라는 새 나라를 열기까지 9년 동안 그의 주선과 그의 꾀가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정도전은 이해 7월 조정으로부터 전교부령(典校副令)이라는 보잘것없는 벼슬을 받았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의 뒤를 우왕이 이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때 그는 남쪽 금릉(金陵)에 도읍을 정하고 무서운 기세로 뻗는 명나라의 국력을 보았던 것이다.

그는 돌아와 친명정책에 대한 소신을 더욱 다졌다. 


다음 해,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뒤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이성계는 쿠데타에 성공하여 정권을 마음대로 요리했다. 

이성계는 맨 먼저 정도전을 중앙으로 불러올려 대사성으로 삼았다. 

창왕을 내세운 것도 정도전의 꾀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때부터 그는 이색 · 정몽주와 길을 달리하게 되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지켜야 한다는 파였고, 정도전은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파였다.

정도전은 하나씩 치밀하게 일을 추진해 나간 것 중 중의 하나가 사전(私田)의 혁파였다.

당시 대대로 이어 온 귀족들은 토지를 독점하여 국가 소유의 토지보다 훨씬 더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지주들은 토지를 겸병하고서 평민들에게 소작을 주었다.

정도전은 귀양살이할 때나 지방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백성의 고통과 폐단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호족들의 사전을 일정량만 제외하고는 모두 관가에 돌리게 한 것이다.
사전의 혁파는 이성계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단행되었다. 

1389년 그는 조준(趙浚)과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새 왕으로 받드는 일을 추진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것이 2차 쿠데타였다. 

그는 공양왕에게 형벌과 상을 바르게 시행하라고 건의했다가 1391년 수구파에 의해 유배되었다. 

그는 공을 세운 기록인 공신록권(功臣錄券)마저도 빼앗겼다.

두 번째 맞는 시련이었다.
그는 이성계의 주선으로 다시 조정에 나왔다.

정도전 등 개혁파는 서둘러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제 잘못된 묵은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 오로지 그의 손에 맡겨졌다.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고 경복궁을 창건하다

 

새 왕조가 들어선 뒤 7년 동안 그는 눈부신 활동을 해냈다. 

그는 맨 먼저 국가이념을 정립하고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고 성리학을 정통의 교학(敎學)으로 내세웠고,

도교와 불교를 현실성이 적고 공허한 이론이라고 비판했다.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의 여러 이론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을 가한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었다.

이 모든 작업은 전환기에 나타나는 혼돈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체계의 정립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이러한 이념적 바탕은 결국 중화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고, 국제질서로는 ‘사대’를 표방하게 되었다. 

이 유교적 성리학과 정치적 사대가 그 당시에 있어서는 개혁의 일단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어서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을 내놓았다. 

이것은 일종의 나라의 근본과 통치체제를 정비한 것이었다.

통치체제로는 중앙집권제를, 통치철학으로는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를 그 기초를 삼았다.

무엇보다 그가 실천개혁의 하나로 중농주의에 바탕을 두어 토지개혁을 단행한 것이 가장 주목된다. 

그는 사전의 혁파를 더욱 확대하여 국가의 공전(公田) · 균전(均田)을 늘렸다. 

이것은 경제적 기득권을 박탈하여 토지를 국가나 직접 생산자인 농민이 소유할 수 있도록 전환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반발이 심했고 또 그만큼 용단이 필요한 정책이었다.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단행한 것은 천도였다. 

고려의 옛 신하와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은 언제나 저항의 기세가 깔려 있었다. 

그는 새 왕조의 참신한 분위기를 천도로 표현하고자 의지를 담아 결행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적극적인 찬동과 무학(無學)의 동의로 한양의 삼각산 아래에 도읍터를 잡았다.
1394년(태조 3) 말 한양 땅에 궁궐과 성곽의 축조가 시작되어 10개월 만에 왕도의 면모를 완성했다. 

정도전은 경복궁의 이름은 물론, 정전인 근정전,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과 숭례문 · 흥인문 등 

서울의 모든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 분할도 손수 결정했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르자 서둘러 세자를 결정했다.

이성계는 첫 번째 왕비 한씨에게서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왕자들은 모두 새 왕조 건설에 공헌했으나

수성의 책임을 맡기기에는 학문이 너무 얕거나 무장이어서 우락부락했다. 
이성계는 두 번째 왕비인 강씨에게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방석(芳碩)을 애지중지했다. 

그는 남달리 영리한 이 막내둥이를 잘 다듬어 왕위에 앉히려고 세자로 삼았다. 

이때도 정도전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는데, 정도전은 방석의 교육을 맡기도 했다. 

자연히 앞 왕비의 소생들은 정도전 등 권신들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특히 용맹과 슬기를 자랑하는 넷째 방간(芳幹)과 다섯째 방원의 감정은 더욱 들끓었다.

 


방원의 칼날에 스러지다

 

이렇게 되면 힘으로만 살아온 왕자들은 한낱 힘없는 바지저고리가 되는 꼴이었다.

이성계는 궁중에서 심한 해소병을 앓고 있었다.

방원은 더 이상 때를 기다릴 수 없었다.
궁중은 왕의 병으로 근심에 싸여 있었고, 정도전 등은 여염집에 모여 있었다. 

방원은 형 방의(芳毅)와 방간을 불러들이고 처남 민무구 · 민무질과 하수인 이지번을 동원했다. 

왕자들은 사병혁파 때 무기를 모두 버렸는데 방원의 아내가 감추어 둔 철창 따위를 들고

밤에 정도전 일파가 모여 있는 송현(경복궁 동쪽 고개로 오늘날 중학동) 남은의 첩집으로 쳐들어갔다.

정도전 등은 정자에 불을 밝혀 놓고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방원의 종 소근이 정도전을 끌고 와 방원의 발 앞에 무릎을 꿇렸다.

방원은 정도전을 칼로 치라고 명했다. 
방원은 조준 등을 앞세우고 궁궐로 들어갔다. 

왕은 궁궐 안 정자에 나가 병을 돌보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이제(李濟)가 위사들을 동원해 이들을 치자고 건의했지만 형세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정도전은 개혁파였다. 

그가 비록 고려 왕조를 저버렸지만 조선조로서는 정도전이 없는 새 나라의 건설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장량’으로 비유했는데, 장량은 나라를 세운 뒤에 “사냥개는 써먹힌 뒤 늙으면 주인에게 잡아먹힌다”며 

조정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한 탓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끝까지 일을 벌이다가 비명에 갔다. 
그는 적어도 고려말, 정치적 · 경제적 모순을 바로잡고 사회적 혼돈을 수습하려고 나선 혁명가요, 

또 실질적인 통치이념을 정립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죽으면서 이런 시조를 남겼다.

30년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출처_이이화의 인물 한국사_편집)

 

 

 

 

삼봉 교육관에 들려 정도전에 대한 10분 정도의 오디오를 보았다.

 

삼봉기념관 

 

희절사와 문헌사

 

 

 

 

 

 

 

희절사와 문헌사는 평소에 문이 잠겨 아쉽게도 들어갈 수 없다.

 

 

 

 

 

 

 

 

 

 

 

민본재

삼봉 정도전 선생의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이다.

 

 

삼봉 기념관

 

 

 

 

 

 

 

 

 

 

 

 

 

 

 

 

 

정도전이 편찬한 책들

 

정도전이 설계한 한양도성

 

 

 

 

 

 

 

 

 

 

 

 

삼봉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성계의 뜻에 따라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만드는 데 협력하여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방원이 왕이 된 후 그의 빛나는 업적은 왜곡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학계에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세상이 바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