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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경기 인천

권율 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이 된 평택 원균의 묘

by 즐풍 2023. 2. 26.

2023_013

 

 

2023.2.8. (수)  오전에 탐방

 

 

매월 둘째 주 수요일 오후 정기 회의로 모일 때를 빼면 월, 화, 수, 목, 금요일도 휴일이니 일주일 내내 논다.

처음엔 이렇게 논다는 게 더없이 즐거웠는 데, 이젠 잉여인간이란 느낌이 들기 시작하며 우울모드에 빠진다.

그렇다고 굳이 직업을 찾아 나서기도 싫어 하루하루 빈둥거리다 보니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등산이나 여행을 며칠 훌쩍 떠나면 좋겠지만, 아직 여행에 적합한 계절이나 날씨는 아니다.

 

거주지인 평택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 2년이 훨씬 넘었으나 마땅히 갈 곳도 없다.

인근지역도 뛰어난 명소나 명산이 없으니 갈 곳을 찾아가는 것도 큰일 중 하나다.

자차나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한 시간 이상을 나가야 하는 데, 목적지를 찾는 것도 일이다.

하여 오늘은 거주지를 중심으로 북진하며 소소한 볼거리 몇 군데를 둘러볼 생각이다.

 

 

□ 원균 장군묘역

 

조선 중기의 무신인 원균(元均, 1540∼1597) 장군의 묘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산에 있는 적을 공격하던 중

칠천량해전에서 대파하여 전사하였다.

이후 1604년(선조 37)에 권율·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 공신으로 벼슬이 높여졌다.

묘역은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와 합장한 원형 단분(單墳; 하나의 봉분)의 형태이다.

1981년 후손들이 묘역을 정비하면서 원형이 상당 부분 변형되었고,

묘표(墓表; 무덤 주인공의 이름 등을 새긴 비석)와 문석인을 제외한 모든 석물은 1981년에 새로 조성되었다.

봉분의 정면 오른쪽에는 묘표를 세웠다.

묘표는 이수방부형(螭首方趺形; 용문양을 장식한 머릿돌과 사각받침돌의 비석 형태)이며,

건립 연대는 새겨지지 않았으나 양식으로 보아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머릿돌에 새겨진 용조각은 구름 속에서 2마리가 여의주를 향하여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하단에는 옛 문석인 1쌍이 있는데, 양관조복형(梁冠朝服形; 머리에는 양관을 쓰고, 조복을 입은 문신의 형태)이다.

얼굴은 부드러운 인상이나, 세부장식에 생략이 많은 17세기 초반의 양식을 보인다.

이 묘역은 17세기 묘제 석물의 예술성을 유지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출처_문화재청)

 

 

 

큰길에서 원균 묘역까지는 내리저수지 둑길을 가로질러 200여 m를 걸어야 한다.

원균의 재실인 모선재는 큰길 옆에 있는데 문이 잠겨 밖에서 사진만 찍고 들어간다.

 

 

 

내리저수지 둑방에서 보는 원균 묘역

 

사실, 원균 묘역은 한두 번 가까이 지나칠 때가 있었으나 그동안 가졌던 편견(?)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곳을 들린다고 해도 그의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겠단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원균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원릉군(원균) 기념관으로 들어가 그의 임진왜란 당시 행적을 먼저 살펴본다.

 

원균은 임진왜란 당시 거제도에 있는 경상 우수영의 우수사였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 우수영이 있던 여수에서 봉직하고 있었으니 제법 거리가 있었다.

 

삼도수군 통제영은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던 해상 방어 총사령부이다.

선조 26년(1593)에 삼도수군통제사라는 벼슬을 새로 만들어 전라좌수사에게 겸임하게 하면서

삼도수군 통제영이 새로 생겼다.

이 삼도수군 통제영을 ‘통제영’으로 줄여 부르던 데에서 통영이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최초의 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의 한산진영이다.

지금의 통제영은 선조 36년(1603)에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세운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세병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으나, 

100여 동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의 안내문)

 

삼도수군통제사는 현대로 비유하면 군령권(작전권)과 군정권(작전 이외 교육, 인사, 기술행정)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군정권을 가지는 해군참모총장이 군령권을 담당하는 해군 작전사령관까지 겸

임하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한다.

 

당시 지도를 보면 고하도, 고금도, 여수,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같이 쓴 게 보인다.

이곳에 계신 해설사 님께 외 이렇게 여러 군데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붙었는지 물어보니 

검색 결과, 전시라는 특수 상황으로 군영을 옮길 때마다 지역 명칭이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전시된 천자총통, 지자총통, 승자총통

 

 

 

조경남이 기록한 난중잡록의 안내문을 보면,

"원균을 폄훼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원균이 선무 1등 공신이 된 것을 공정하다 기록하고 있다."

 

선조는 왜군과 강화교섭이 진행될 때 이상하리만치 이순신의 능력과 자격을 문제삼은 적이 있다.

걸핏하면 이순신을 원균과 비교하며 두 장군을 저울질했다.

1596년 6월 어느 날 선조가 어전회의에서 이순신에 대해 회의적인 발언을 했다.

"이순신이 처음에는 분전했으나 그 뒤에 흩어진 적을 부지런히 잡지 않는가 하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을 무찌르는 일도 없어서 내가 늘 의심했오."

새로 좌의정이 된 김응남은 선조의 의도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맞장구쳤다.

원균이 개전 초기에 사람을 보내 이순신을 불렀지만 오지 않아 통곡했다고 합니다.

원균이 이순신에게 먼저 군사를 요청했는데도 전공이 이순신에게 돌아가 두 장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이순신이 공을 세운 사람인지 모르겠소."

"저도 의심이 갑니다. 이번 거제도 통제사를 뜻함)에는 원균을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그날 회의의 주제가 되었다.

원균이 옛 부하인 이순신과 합동작전을 폈으나 공이 늘 이순신에게 쏠렸고,

이순신이 수군통제사가 되어 도리어 지휘를 받게 되자 앙금이 깊어졌다는 말들이 오갔다.

이때 원균은 이순신과 갈등을 빚어 충청병사로 전임돼 있었다.

이 정도로 사태를 파악했다면 선조는 나름대로 판단이 있을 법하다.

                                                                                                           (출처_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중에서)

 

어느 나라든 전공이 많은 장군은 늘 임금의 질투와 시기를 받는다.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이슬람의 할리드 장군도 워낙 뛰어난 업적을 이루자 주변의 시기와 질투로

이슬람 제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는 불안한 마음에 할리드를 해임한다.

조선 13대 왕인 명종은 후사가 없자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을 세자로 간택해 왕이 되었다.

이렇게 왕이 된 선조는 변덕과 의심이 심하고 잘난 척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지질한 왕이니 이순신 장군과 같이 업적이 출중한 장군에 대한 질투가 심했을 것이다.

이순신을 고문하고 백의종군하게 만든 사실은 유명하다.

 

 

전쟁이 끝나자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선무공신들에게 내려졌는데,

그중 1등급이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다.

한 등급이 낮아지면 두 글자씩 뺀다.

1등 공신을 받은 사람은 이순신, 권율, 원균 세 명이다.

선조는 조정 신료들이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데도 아득바득 우겨서 원균을 상기 등급에 봉한 반면,

이순신을 최고 등급 공신으로 봉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껄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공이 천하를 덮었고,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었기에 으뜸 공신에 책봉되었다.

선조가 보여준 모습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질투와 공포가 얼마나 강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위 난중잡록을 쓴 조경남의 원균에 대한 평가는 어처구니없다.

원균은 순전히 못된 선조의 우격다짐으로 1등 공신이 되었다.

 

 

 

 

 

 

 

 

 

 

조선과 강화조약이 결렬되자 정유년인 1597년 왜놈들은 1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7월 초에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하고 이중 일부는 여수 웅천으로 들어갔다.

권율 장군은 원균에게 공격하라고 하자 원균은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공격을 명했으나 군량미 200여 석과

전선 수십 척을 잃고 물러났다.

원균은 한산도 운주당에서 애첩을 끼고 술에 취해 싸우러 나가지 않았다.

권율은 명령불복종으로 원균을 불러다 곤장을 치고 직접 전투에 나서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해군 총사령관이 볼기를 까고 군장을 맞았으니 얼마나 창피했을까.

원균은 전선 100여 척을 동원해 왜군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그들의 전술에 말려들었다.

결국 육지로 도망가던 원균은 적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되자 왜군은 하동, 광양, 남원 등지로 진출했다.

다급한 선조는 곧바로 권율의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다.

왜적은 서해로 진출해 황해안으로 나가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렇게 명량해전에 맞붙은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330여 척의 적선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임진왜란의 역사를 보면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이 많았다.

둘이 연합작전을 펴면 원균은 왜군의 귀를 수습해 전과를 올렸다는 승전고를 올리는 데 급급했다.

그런데도 원균 전시관의 안내문은 원균에 대해 우호적인 글 일색이다.

원균 전시관이니 일견 이해하지만, 너무 찬양 일색이다.

 

 

 

전시관을 나와 원균 묘로 들어선다.

 

 

 

 

 

 

 

 

 

 

 

원균 전시관에 들리며 원균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성은 갖게 됐지만, 전체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조경남이 기록했다는 난중잡록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다.

그의 편협한 시각이자 당시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갖던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원균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웠으나 1등 공신에 들어갈 만큼 뛰어나다고 보지 않는다.

이는 즐풍의 생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