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 토요일 오후에 탐방
자만 벽화마을 입구에서 한벽굴까지 걸어서 420m 거리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내비로 찍으면 약 1.3km를 돌아가야 한다.
즐풍 전주가 처음이라 내비가 알려주는 대로 돌고 돌아 전주 자연생태관 주차장에 주차하고 걸어왔다.
먼저, 한벽굴을 보고 한벽당을 보는 게 순서에 맞다.
□ 한벽굴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전주팔경의 하나인 한벽당의 정기를 자르고 철길을 만들었다.
한벽굴은 그때 만들어진 전라선 터널이다.
1931년 10월 전주~남원 간 철도가 개통되었다.
당시 전라선 철길은 이리역에서 삼례, 덕진을 거쳐 현재의 전주시청에 있던 전주역을 지나
오목대-이목대-한벽굴을 거쳐 중바위 서쪽 아래를 타고 색장동을 통과해 남원을 향했다.
한벽당은 나들이 장소로 유명한 한벽당, 전주천 빨래터와 더불어 전주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곳이다.
많은 시민이 이곳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으나 역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안내문)
한벽길은 차량이 통제되어 지금은 사람과 자전거만 지날 수 있다.
큰길 입구에서 보는 한벽굴 우측 전봇대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만나게 되며,
계단을 내려가면 다시 한벽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한벽당을 만나게 된다.
□ 전주 8경의 하나! 한벽당
최승범 시인은 '한벽청연'에 담기었을 선비의 흥취와 그 아련함을 노래했다.
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 병풍바위 아래 아담한 정자가 한벽당이다.
과거에는 바위에 부딪친 안개를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한벽당은 5평 남짓 너른 마루와 서까래, 처마 밑을 에두른 시인 묵객들이 제영한 수많은 시는
마음에 맞는 벗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공간임을 짐작케 한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승암산 기슭의 절벽을 깎아 세운, 전주 옥류동 고개 옆 한벽당(寒碧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은
일찍이 유생들이 풍류를 즐기고, 각시바우, 서방 바우에서는 아이들이 고기 잡고 멱감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여름철 집중 호우 때면 갑자기 불어나는 물로 아찔했던 기억을 전주 사람들은 갖고 있다.
□ 명필 이삼만과 한벽당
한벽당은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을 찾았으며,
그들이 제영(題詠)한 시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호남읍지(湖南邑誌)' 등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등 20여 명의 저명한 인사들이 한벽당에서 지었다는
시문이 지금도 게첨 돼 있는 등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한벽당에는 조선 후기 3대 명필로 꼽히는 창암 이삼만(1770-1847) 선생의 부채 이야기가 전해진다.
『창암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폭염은 쏟아지는데 땀으로 후줄근한 삼베바지 적삼을 입은 부채 장수가
한벽당 그늘을 찾아들었다.
날은 더운데 부채는 팔리지 않아 잠시 다리 쉼이나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벽당 시원한 그늘에 앉으니 절로 졸음이 쏟아져 부채 장수는 코를 골며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고 일어났더니 누군가 부채에 글씨를 휘갈기고 있는 게 아닌가.
"여보시오, 보아하니 선비 같소만 남의 부채에 이러는 법이 어딨소?"
부채 장수는 화가 나서 쏘아붙였다.
"너무 노여워 마시오. 이 부채를 들고 성내로 들어가 보시오. 해 전에 다 팔릴 것이오"
부채 장수는 부채가 팔리지 않으면 변상을 시킬 요량으로 선비의 집을 미리 확인해놓고 전주부 내로 들어섰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전에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팔리지 않던 부채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값을 올려도 마찬가지였다.
금세 호주머니가 두둑해진 장수는 선비가 일러준 집으로 찾아갔다.
아까 함부로 말한 것을 사과하며 장수는 선비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 선비가 다름 아닌 명필 창암 이삼만이었다.』
(출처_전주시청, 문화관광)
한벽당 옆 요월대
한벽당과 수평되게 나란히 있는 요월대는 남동쪽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시인묵객이 달밤에 이곳에 앉아 시 한 수 읊으며 이곳의 정취를 한지에 나기는 일이 많았겠다.
□ 한벽당(寒碧堂)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흔히 한벽루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한벽청연(寒碧晴讌)이라 하여 전주8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조선 태종 때 월당(月塘) 최담(崔霮)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세웠다고 전하며,
처음의 이름도 ‘월당루(月塘樓)’였다고도 한다.
그 뒤 사람들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과 누정 밑을 흐르는 물을 묘사한 ‘벽옥한류(碧玉寒流)’라는 글귀에서
한벽당이라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도 1683년(숙종 9)과 1733년(영조 9) 등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28년(순조 28)에 크게 중수한 것이다.
불규칙한 암반에 맞추어 높낮이가 다른 돌기둥으로 전면 기둥을 세우고,
뒤쪽은 마루 밑까지 축대를 쌓아 누각을 조성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배면을 제외하고 삼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마루 주위에는
머름과 계자난간(鷄子欄干)만이 둘려져 있어 자연과 일체를 이루려는 누정건축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공포는 2익공식의 구조이다.
쇠서[牛舌]에는 당초문을 초각(草刻)하였으며 연꽃 모양의 주두가 특이하다.
한벽당 바로 동편에는 1986년에 복원된 요월대(邀月臺)가 있다.
(출처_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한벽당 기둥엔 많은 문인들이 남긴 한시가 줄줄이 걸려있다.
앞은 트여 전주천으로 흐르는 시냇물과 계절 따라 바뀌는 여러 풍경을 감상하기 좋다.
한벽당 앞으로 한벽교 다리가 보인다.
한벽당에서 요월대로 가는 길은 뒤쪽으로 가야 안전하다.
예전 같으면 전주 8경으로 많은 사람이 찾았겠지만,
이젠 시내에 볼 게 많아 이곳은 소외된 느낌이다.
이곳에 들렸을 때 주변에 근무하는 사람 서너 명이 잠시 자리에 누워 쉬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들도 이내 자리를 뜨자 즐풍만이 이곳을 감상한다.
한벽당을 내려서며 한벽교에서 이곳의 풍취를 바라볼 생각이다.
전주천은 유유하게 흐르다가 한벽당 앞에서 ㄱ자 형태로 꺾이며 속도를 늦춘다.
한벽교에서 조망하는 한벽당과 요월대
한벽굴과 한벽당은 사실 굴 하나에 정자 두 개일뿐이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볼 게 없지만,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면 도움이 된다.
우리네 문인들의 정기가 서린 이곳의 정기를 끊으려 바위를 뚫어 철도를 놓은 일제의 만행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한 일본의 해상자위대 창설 70주년 국제 관함식에 윤석열 정부의 해군이 참석해
일본 욱일기에 경례하는 사단을 벌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최근 UN은 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 진척이 없어 유감이라며 사과를 재차 촉구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일본 정부의 사과와 상관없이 배상금을 일본 기업 대신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재단'이
기부금을 모아 대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니 기가 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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