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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등등/사찰 탐방

영남알프스인 천황산 재약산을 배경으로 둔 표충사

by 즐풍 2021. 11. 9.

 

 

2021.10.2 (토)   오후에 등산한 재약산 하산길에 탐방 

 

 

영남알프스 1,000m 이상 9 봉우리 완등을 위해 오늘은 천황산, 재약산을 올랐다.

산행 시작할 때 표충사 경내를 통해 천황산으로 올라갔다가 재약산을 거쳐 다시 표충사로 내려왔다.

주말인 데다 영알 9봉 인증을 위해 전국에서 등산객이 밀려들므로 조금 지체하면 사진 찍기도 쉽지 않다.

하여 오전엔 그냥 통과하고 오후에 재약산을 거쳐 하산길에 들리며 살펴본 표충사다.

 

 

□ 표충사 (表忠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

원래 이곳에는 원효(元曉)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 있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 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한편으로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계(啓)를 올려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을 다시 세워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모셨다.

리고 한 전각을 사당 왼쪽에 지어 사명대사가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간 원불(願佛)을 대구 용연사(龍淵寺)에서

가져와서 봉안하고, 동서 쪽에 요사(寮舍)를 지어 수호하는 승려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 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남붕이 총책임을 맡고, 연초(演初)·취안(翠眼)·최심(最心)·상현(尙玄) 등이 도왔다.

사우를 3칸으로 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또한, 원불전(願佛殿)·노전(爐殿)·예제문(禮制門)·의중당(義重堂)·자하문(紫霞門)·명인루(明禋樓)를 세웠다.

사당의 좌우에 선원(禪院)과 교당(敎堂)을 세웠는데, 향교와 서원의 동·서 재실(齋室)과 같은 모양으로 하였다.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하여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하였다.

그러나 향례(享禮)를 지낼 때마다 바람과 비를 만나게 되고,

산세가 옹색하고 길이 험하여 살고 있는 자나 제향에 참여하러 다니는 사람 모두

이를 병폐로 생각하여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남붕이 옮기려고 뜻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 세손인 천유(天有)가

예조에 보고하여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영정사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영정사는 이미 승려가 살지 않는 폐사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사원의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하여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사우를 신축하고

사명대사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하여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正門)을 짓고

의중당 좌우(左右)를 동·서 재실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1715년(숙종 41)에 중건한 사실이 있으나 1926년에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 및 건물로는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을 비롯하여

보물 제467호의 삼층석탑이 있으며 석등(石燈) ·표충서원(表忠書院) ·대광전(大光殿) 등의

지방문화재와 25동의 건물 사명대사의 유물 3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출처_표충사]

 

 

□ 대광전

 

대광전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절로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 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 간격은 공포 간격을 배려하여 같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_표충사]

 

 

 

□ 명부전

 

명부전은 유명계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모시고 있다고 하여 시왕전(十王殿)

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모시고 있다 하여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시왕은 죽은 자들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지옥 왕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 왕이다.

지장보살은 불교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기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면서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 (六道)이다.

                                                                       [출어_표충사]

 

□ 상노전

 

표충사 대웅전을 책임지고 담당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스님들의 숙소입니다.

 

□ 관음전

 

관음전은 천수관음보살도를 모셔놓은 법당이다.

아미타불의 좌보처로서 아미타불의 뜻을 빌어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근본 서원으로 삼아 중생을 보살피고,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하는 이들을 인도하는 보살이다.

관음전은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상징하는 42수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좌우보처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 왕이 응립 해있으며,

후불탱화로는 1930년 조성된 천수천안 관음 세음 보살 탱화가 모셔져 있다.  

                                                                                        [출처_표충사]

 

 

 

우화루는 방문객들이 쉼터로 이용하는 느낌이다.

 

범종각이다,

가벼운 나무 북은 2층, 무거운 쇠북은 1층에 있다.

 

옆에서 보는 우화루

 

□ 팔상전

 

팔상전은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그린 탱화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출처_표충사]

 

□ 삼층석탑

 

기단 (基壇) 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각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탑신부(塔身部)는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형태로, 균형면에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 모서리에는 매우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2층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며 3층도 체감되어 있다.

또한 2·3층의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나 너비는 전체가 축소됨에 따라 좁아졌다.

지붕돌은 밑에 4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추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얹혀 있으나 정돈되지는 못하고,

그 위에 1m가량의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세웠다.

탑신부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커다란 단점이 있으나,

기단이 1단으로 구성된 신라석탑 양식을 따른 아담한 탑이다.

탑의 머리장식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출처_표충사]

 

표충사 경내에서 보는 건너편 필봉 

 

사천왕

 

□ 설법전

 

넓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표충사 사당과 마주 보고 있으며,

가운데 무설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중의당,

오른쪽에 대흥 불법도량이 걸려있으며, 설법전이란 현판은 뒤쪽에 위치해 있다.

                                                                                                      [출처_표충사]

 

다과를 파는 사자평 다원 

 

 

 

□ 국보 제75호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표충사의 대표 국보 향완이란 절에서 의식을 행하거나 불단에 올려놓고 향을 피우는 데 사용된 공양구이다.

특히 이처럼 완형(盌形)의 몸체에 나팔처럼 벌어진 자리와 원반형 받침을 지닌 형태를 향완이라 불렀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입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바깥으로 벌어진 나팔 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습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 잡힌 비례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6개의 원 안에 ‘범자(梵字)’를 은 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자(梵字)'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_표충사]

유물관은 문이 잠겼다.

 

 

국보 제75호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향완이란 절에서 의식을 행하거나 불단에 올려놓고 향을 피우는 데 사용된 공양구이다.

특히 이처럼 완형(盌形)의 몸체에 나팔처럼 벌어진 자리와 원반형 받침을 지닌 형태를 향완이라 불렀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입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바깥으로 벌어진 나팔 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습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 잡힌 비례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6개의 원 안에 ‘범자(梵字)’를 은 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자(梵字)'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명문을 새겼는데,

용으로 미루어 고려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 향완 연구에 귀중한 편년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지만

언제,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향완 사진과 글의 출처_표충사]

 

표충사 뒤 재약산의 관음봉과 문수봉

 

표충사 일주문 편액은 재악산 표충사로 되어 있다.

뒷산은 재약산인데, 재악산이라 한 이유는 뭘까?

 

 

□ 밀양 표충사, ‘재악산 산 이름 바로 세우기’ 공동 추진

 

호국성지 밀양 표충사가 밀양지역 청년단체 및 여성단체 등과 공동으로 

‘재악산(載嶽山, 載岳山)’의 산 이름 복원 운동을 전개한다.
‘재악산 산 이름(표지석) 바로 세우기 운동 추진위원회’는 7월 13일 밀양시청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는 국토지리원의 표기상 ‘천황산(天皇山)’으로 기록되고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는 표충사의 뒷산 

제1봉의 명칭에 대해 ‘재악산’으로 변경하기 위한 시민운동을 출발하는 장으로 마련됐다. 

행사에는 밀양불교사암 연합회장이며 표충사 주지 진각, 연합회 사무총장 정무 스님과 박일호 밀양시장, 

황걸연 밀양시의회 의장, 손정태 밀양문화원장, 민경우 추진위원장(밀양 마음 산악회 대표)을 비롯한 추진위원, 

도재국 향토사학자 등이 참석했다. 행사는 발기인대회, 창립총회, 결의 마당의 순서로 전개됐다.
특히 결의 마당에서는 표충사 주지 진각 스님과 재악산 산 이름 바로 세우기 운동 추진위원회가 

공동청원 협약식을 갖고 재악산 산 이름을 바로 세우기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뜻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양 단체는 재악산 정상 사자봉 부근의 돌무더기 이설 건의서를 밀양시청에 전달했다. 

이어 동참 대중 전원이 재악산 산 이름 복원 및 표지석 바로 세우기에 서명하며 서명 캠페인을 시작했다.
표충사 주지 진각 스님은 “재악산이라는 명칭은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재악산 영정 사삼층 석탑 개수비’를 비롯해 수많은 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며 

“표충사는 이 같은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지난 2017년 8월 17일 산문 준공법회 당시에도 

‘재악산문(載嶽山門)’이라고 현판을 달아 표충사와 짝을 이루는 배산(配山)의 명칭을 

재악산으로 분명히 표기했다”라고 밝혔다. 

이어 “제1봉뿐만 아니라 ‘재약산(載藥山)’으로 잘못 불리는 제2봉의 명칭도 수미봉으로 바로잡아야 할 것”

이라고 밝혔다.
박일호 밀양시장도 “향토사학자와 많은 시민의 염원을 모아 산 이름 바로 세우기를 다시 추진한다”며 

“재악산의 산명이 하루빨리 정상화되어 밀양의 정기와 맥이 전통 그대로 이어질 수 있길 바란다”라고 했다.
산 이름 바로 세우기 운동 추진위에 따르면, 재악산은 표충사의 뒷산으로 지맥이 둥글게 형성되어 있다. 

해발 1189.2m의 제1봉 사자봉을 재악산으로 불러야 마땅하나 일제강점기 당시인 1923년 일본식 지명인 

천황산으로 개칭됐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 1961년 지명유래 조사 당시에도 시정되지 못했으며 1995년,

2015년 국가지명 심의에서도 ‘천황산’을 주장하는 울산시 측의 반대로 가결되지 못했다. 

또 제2봉인 수미봉도 재약산(載藥山)으로 표기되어 천황산과 혼재해 불리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현재 사자봉 정상에는 ‘천황봉’이라는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어 이를 바로 잡는 것뿐만 아니라 

산 이름 자체를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민경우 추진위원장은 “제1 사자봉, 2봉 수미봉과 더불어 재악산은 제3 문수봉, 제4 관음봉, 제5향로봉, 

제6필봉 등 표충사의 북쪽 방향 사자봉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산봉우리가 솟아있고 

모든 봉우리 명칭이 불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어 하나의 산군임을 알 수 있다”며 

“밀양의 역사와 정신이 깃든 재악산이 하루빨리 본 지명을 되찾아 그 명칭대로 밀양시민을 넉넉하게 품는 

큰 산으로 자리할 수 있길 바란다”라고 취지를 전했다.
                                                                      [출처_법보신문, 주영미 기자 2021.7.16]

 

 

표충사는 원래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었다.

사명대사를 제향 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으로 격(格)을 높여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고 했다.

이 서원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표충사(表忠祠)가 사(表忠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전장을 누빈 사명대사의 충훈을 기리기 위한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