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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등등/생활 속 발견

조선 5대 궁궐의 하나인 덕수궁

by 즐풍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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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2. 7. 수요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다시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덕수궁 석조전이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운 실내에 전시된 작품을 보는 것이지만, 덕수궁은 다르다.

이 날따라 비가 올 듯 흐린 날씨에 카메라엔 C-PL 필터가 끼워져 사진은 더 검게 나온다.

박물관과 전시관은 물론이고 흐린 날에 사진을 찍을 땐 C-PL 필터를 빼야 하는 데 늘 잊고 만다.

그러니 사진은 늘 엉망이고, 밝기를 보정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이런 이유로 손 대기 싫던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겨 그날의 일정을 복원한다.

 

 

 

덕수궁 德壽宮 Deoksugung Palace

 

덕수궁 터에는 월산대군(1454~1488)의 후손을 비롯한 왕족들과 고관들의 저택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선조는 이 집들을 수용하여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가, 광해군이 1611년에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면서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이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까지는 궁궐로서 큰 역할이 없다가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으뜸 궁궐로 삼았고 많은 전각들을 새로 세워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다. 또한 근대화를 향한 고종의 의지에 따라 궁 안에 여러 서양식 건물들을 세웠다. 그러나 1880년대 정릉동 일대는 각국 외교사절의 공관과 선교사들의 주택이 밀집해 있어서 경운궁의 궁역을 확장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기존의 미국·영국·러시아 영사관 사이로 궁역을 확장하다 보니 대지의 모양이 불규칙하게 된 것이다.

1907년에 고종이 퇴위하면서 선황제의 거처가 되어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꾸었으며,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북쪽 선원전과 서쪽 중명전 일대도 매각되어 원래 넓이의 1/3만 남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심 부분과 몇 개의 양관(洋館)만 남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된 후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현재는 중심부인 중화전 일원과 정관헌 및 석조전과 같은 양관들이 남아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구한말이라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으뜸 궁궐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상징적 공간이었다. 또한 전통 규범 속에 서양식 건축을 수용한 근대적 궁궐이며, 주변 상황의 공간적 맥락에 맞추어 조성한 도시적 궁궐이었다.

 

 

On the site of Deoksugung were residential buildings of descendants of the royal family, including Prince Wolsan (1454-1488), the older brother of King Seongjong (1469-1494), and high-ranking officials of the Joseon Dynasty. When all the palaces in the capital were destroyed by fire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King Seonjo (1567-1608) used these residential buildings as a temporary palace. In 1611, this palace became a secondary palace named Gyeongungung when King Gwanghaegun (1608-1623) moved to Changdeokgung, which was rebuilt as the official royal residence.

From that time to the mid nineteenth century, Gyeongungung played no important role as a palace. In 1897, King Gojong proclaimed the establishment of the Great Han Empire and became an emperor. Gyeongungung became the central palace of the Great Han Empire, and a number of new buildings befitting an imperial palace were built. As evidence of Gojong's determination to modernize the country, some of the buildings were built in a Western style. In the 1880s, the area around the palace was called Jeongneung-dong and was crowded with foreign legations and residences of missionaries, making expansion of the premises of Gyeongungung difficult. The premises eventually surrounded the already existing American, British, and Russian legations, resulting in a very irregular layout.

In 1907, the palace became the residence of the former King Gojong after he relinquished the throne. The palace was renamed Deoksugung, and its premises were reduced to make way for street widening. After Gojong passed away, Seonwonjeon in the northern section and Jungmyeongjeon in the western section of the palace were sold, reducing the premises of the palace by one-third. In 1933, all of the buildings on the palace premises, except a few central buildings and Western-style buildings, were removed. The palace was then turned into a park and opened to the general public. The Junghwajeon area, the center of the palace premises, and the Western-style buildings including Jeonggwanheon and Seokjojeon, remain. Deoksugung was the symbolic center of resistance in the face of several national crises, including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the difficulties during the closing years of the so-called Great Han Empire.

 

过去德寿宫一带包括月山大君(1454~1488)的后孙以及王族高官的私邸。而壬辰倭乱爆发之后, 汉城(首尔)的所有宫殿被烧毁, 宣祖将其作为临时居住的行宫。光海君即位之后迁至1611年重建的昌德宫将行宫改为别宫, 称作庆运宫。到19世纪中期, 庆运宫的地位及角色并不十分重要, 而到了1897年高宗皇帝即位后, 将庆运宫作为最高等级的宫殿, 修建诸多殿阁, 才有了王宫的面貌。根据高宗对现代化的追求, 修建了许多西式建筑。但在19世纪80年代, 各国外交使节公馆及传教士的住宅聚焦在贞陵洞一带难以扩建庆运宫的宫域。因此, 在保留原来的美 ·· 俄领事馆的基础上, 扩建宫域, 使得其界线变得参差不齐。1907年, 高 宗退位之后, 将其改为先帝居住的宫殿, 又改称为德寿宫。随着扩建太平路, 其宫域进一步缩小。高宗驾崩后, 北面璇源殿和西面重明殿一带也被出售, 保留面积仅是原来的三分之一1933年, 除了中心区及几个洋馆以外, 大部分殿阁被拆除, 之后将其修建成一座公园 向公众开放。到目前为止, 只保留着中心区中和殿一带及静观轩、石造殿等洋馆。德寿宫作为壬辰倭乱和旧韩末等最艰难的时期修建的顶级宫殿, 是克服国家危机的象征性空间。德寿宫是在保留传统建筑风格的同时, 引入西式建筑风格的近代式宫殿, 也是根据周围空间布局修建的都市型 宫殿

 

AI의 힘을 빌려 안내문을 옮기고 보니 흡족하다. 한글이나 영어는 단순하니 자판을 두드린다고 해도 어려울 건 없겠지만, 중국 본토에서 쓰는 번체자까지 막힘없이 변환시키는 AI기능은 탁월하다. 지난번 신창현 역사공원의 「공북정기」를 옮길 땐 두 글자가 틀렸는데 이번엔 완벽하다. 20일 만에 더 향상된 능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능력 개선은 즐풍과 끊임없는 상호작용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중화전 中和殿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이다. 고종이 이곳에 환궁한 후 5년 정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다가 1902년(광무 6) 다른 궁궐의 정전처럼 중층 구조의 중화전을 지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된 후 1층 규모로 중건하였다. 중화전으로 오르는 계단 답도에는 다른 정전의 답도와 다르게 봉황이 아닌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이는 대한제국 선포 후에 지어진 건물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장식한 것이다. 중화전 마당에는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서 있는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중화전은 덕수궁 석조전보다 8년 앞서 세워진 건물이다.

석조전은 서양식 건물로 대부분은 좌우 대칭을 기본으로 계단까지도 양쪽이 똑같다.

중화전 앞의 돌계단도 좌우가 대칭되도록 한 게 보이고, 답도 중앙에 있는 용 좌우에도 해치를 배치했다.

 

답도 중앙에 있는 용은 두 마리라고 하지만 좌우 대칭의 모양이다.

 

 

중화전 행각中和殿 行閣

 

1902년 덕수궁의 중심 건물[정전正殿}인 중화전을 건립하였을 때 중화전은 128칸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중화전을 비롯한 많은 전각들이 불탄 후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행각 역시 108칸의 규모로 새로 지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후 일제강점기에 덕수궁 내 여러 전각들이 훼손되었는데, 중화전 행각도 이때 대부분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행각은 1905년 중건된 행각의 일부가 남겨진 모습이다.

 

중화문(中和門)은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전과 함께 지어진 문이다. 중화전과 마찬가지로 답도에는 용을 장식하였다. 원래 문 좌우로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는 동쪽에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과 중화문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덕수궁 석조전이 궁금하면...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관람은 사전예약 필수

2024_28 2024. 2. 7. 수요일 오전 아내 환갑을 맞아 오후 여섯 시에 잠실 롯데호텔 월드 라세느에서 가족 모임이 있다. 모임에 앞서 일정이 없는 즐풍은 덕수궁 석조전, 석조전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electee.tistory.com

 

 

석어당 昔御堂

 

석어당(昔御堂)은 즉조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석어’는 ‘옛날에 임어(왕이 왕림)하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다. 광해군 대에는 선조의 왕비 인목왕후가 유폐되기도 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을 문책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조는 경운궁의 전각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석어당과 즉조당은 보존하였다. 석어당은 덕수궁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층 건물이자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대부분의 전각 편액은 가운데 다는 데 비해 석어당은 살짝 왼쪽으로 비껴 났다.

 

 

석어당의 대청마루는 계절에 따라 문을 열어 천장으로 올리기도 하고 문을 내려 닫기도 한다.

지금은 관람 편의상 사계절 내내 열어두고 있다.

 

 

  

 

석어당 뒤편의 준명당과 즉조당이 나란히 붙어 있다.

 

 

비스듬히 보는 준명당

 

 

즉조당 일원 卽祚堂 Jeukjodang Area

 

이 일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昔御堂)은 선조가 거처하다 승하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석어당은 현존 유일의 목조 2층집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소박한 살림집 같다. 1623년에 대부분의 전각과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이 두 건물만은 보존하여 경운궁의 상징으로 삼았다. 준명당(明堂)은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의 세 건물은 1904년에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In this area are royal buildings where King Seonjo (1567-1608) stay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Jeukjo-dang, in the center, is where King Gwanghaegun and King Injo were crowned. Another historic building is Seogeodang, on the right, where King Seonjo lived and passed away. Seogeodang is a two-story wooden house. Because it is unpainted, Seogeodang looks like an ordinary home. In 1623, most of the buildings and lands were returned to their original owners, but these two buildings (Jeukjodang and Seogeodang) were preserved as symbols of the palace. Junmyeongdang, on the left, is where King Gojong (1864-1907) administered state affairs. It is connected toJeukjodang by a corridor. Burned down in 1904, these three buildings were rebuilt the same year.

 

即阼堂一带依然保留着壬辰倭乱时期宣祖居住的殿阁。 即阼堂是光海君和仁祖即位的地方, 昔御堂为宣祖居住并驾崩的地方, 具有历史意义。昔御堂是德寿宫里唯一的两层木质建筑, 由于未涂上丹青漆, 仿佛是朴素的小住房。1623年, 大部分殿阁和土地归还于原主, 只保留这两座建筑, 作为庆运宫的象征。浚明堂为高宗处理政务的偏殿, 与即阼堂一廊之隔。这三座建筑曾在1904年毁于大火, 目前的建筑是 同 年重新修建而成的。

 

  

 

고종이 업무를 보던 준명당

 

 

준명당과 즉조당은 복도로 연결되었다.

복도 아래쪽은 두 건물이 마주 보도록 아궁이가 설치되었다.

아궁이가 눈비에 젖지 않도록 나중에 복도를 내며 불을 때는 궁녀들을 배려한가 아닌가 싶다.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올른 장소인 즉조전

 

 

 

 

준명전과 즉조전을 연결하는 복도 아래로 아궁이가 보인다.

 

 

즉조전을 지나며 보게 되는 석어당의 뒷모습

 

 

 

 

담장 밖으로 나가 다른 건물들을 보게 된다

 

 

정관헌 靜觀軒  静观軒 Jeonggwanheon Pavilion

 

정관헌은 1900년경 고종의 침소인 함녕전 후원에 지어진 동양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절충된 독특한 건물이다. 건물의 동· · 남 세 방향에 지붕이 돌출된 포치(Porch) 형태로 나무 기둥과 금속 난간이 세워져 있다. 기둥 윗부분과 난간에는 모란과 박쥐, 소나무, 사슴 등 한국의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셔 두기도 했고,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황태자 시절 초상화인 예진을 그리던 공간으로 쓰이기도 했다.

 

Jeonggwanheon Pavilion was built circa 1900 in the rear garden of Emperor Gojong's sleeping chamber, Hamnyeongjeon Hall. Its unusual style combines Eastern and Western architectural elements. The front and sides of the building feature covered porches with wooden pillars and metal balustrades. The balustrades and the upper part of the pillars are decorated with traditional Korean designs, such as peonies, bats, pine trees, and deer. This building once housed several royal portraits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also where the royal portraits of Emperor Gojong and the crown prince (later Emperor Sunjong) were painted.

 

静观軒建于1900年前后, 位于高宗寝官咸宁殿后院, 是一座兼具东西方风格的独特建筑。建筑的东 · 西 · 南三个方向呈屋顶突出的回廊形衣, 建造了木柱和金属桜杆, 柱子上部和桜杆上刻有牡丹 · 蝙蝠 · 松树和鹿等輔国侍统图案。达里既是供奉历代先王御真的地方, 也是給画高宗御真和純宗皇太子时期画像(睿真)的地方。

 

정관헌은 특별한 용도가 있기보다 어진을 모셔두거나 간단한 담소 장소로 쓰였겠다.

 

함녕전 측면

 

 

 

 

 

함녕전 행랑채

 

 

함녕전 咸寧殿

 

함녕전(咸寧殿)은 1897년 고종의 환궁과 함께 지어진 황제의 침전으로, ‘함녕’은 ‘모두가 평안하다’라는 뜻이다. 1904년(광무 8)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다시 지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으로 꾸며 아름다운 장식을 한 굴뚝들을 설치하였다. 함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명’은 ‘밝음을 맞다’라는 뜻이다. 1938년 일제에 의해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져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 등을 전시하였다. 2018년 약 80여 년 만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함녕전에 있는 용상이다.

1897년 왕실은 대한제국임을 선포하며 황제국이 되었다.

황제국에서는 용상도 다른 이름이 있는지 모르겠다. 용상 뒤 병풍은 일월오봉도이다.

 

함녕전이 황제의 침실이니 이 행랑채엔 궁녀와 환관의 처소이자 신하들의 대기 장소였겠다.

 

 

덕홍전 德弘殿

 

덕홍전(德弘殿)의 ‘덕홍’은 ‘덕이 넓고 크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원래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의 혼전(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인 경효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이후 고종은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 등 빈객을 접대하기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내부는 천장의 샹들리에와 봉황문양의 단청, 오얏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맞닿아 있다.

 

 

다시 보는 함녕전

 

 

덕홍전 정면

 

 

 

 

덕수궁을 한 바퀴 돌아 준명전과 즉조당을 다시 본다.

 

 

 

 

덕수궁을 한 바퀴 돌아 중화전 실내를 보게 된다.

앞서 침전인 함녕전의 용상과 달리 업무를 보던 중화전 용상은 단 위에 설치되어 위엄이 돋보인다.

 

천장의 용무늬는 안쪽으로 배치하였으며,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중화전 상단의 계단

 

작은 용무늬

 

 

중화전으로 드나드는 중화문

 

 

중화문 옆 노송의 뿌리가 이곳의 역사가 깊다는 걸 말하는 듯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함녕전 처소로 드나드는 정문인 광명문 

 

 

한양의 5대 궁궐 중 하나인 덕수궁이다.

창덕궁은 블로그를 하기 전인 20여 년 전에 봤기에 창덕궁과 다른 궁궐도 시간을 내 둘러봐야겠다.

아직 국립중앙박물관도 끝내지 못했으나 서울미술관부터 손을 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