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충북 증평의 추성산성(이성산성) 살펴보기

by 즐풍 2024. 2. 1.

2024_18

 

 

 

2024. 1. 25. (목)  09:26~12:35, 3시간 10분 이동(30분 휴식 포함), 7.9km 이동, 시작 고도 58m, 최고고도 264m

 

 

만만한 관악산을 가려다 너무 자주 다닌 산이라 식상한 느낌이 든다.

급하게 청주권을 검색하다 보니 증평의 추성산성에 눈에 띤다.

알고 보니 증평 9경 중 7경에 해당하는 명소란 걸 알았다.

조치원역에서 충북선으로 갈아 타고 증평역에서 버스로 환승한 후 이성산 입구까지 1.4km를 걸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지방의 산이나 여행지를 찾는 다는 건 어려운 문제다.

집을 나설 땐 영하 10℃ 전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날이 풀려 그리 추운줄 모르는 날씨다.

 

 

충북 증평 이성산성 등산 코스

 

 

이성산성을 만날 때까지 숲이 우거져 특별히 볼 건 없다.

어느 순간 특별하게 생긴 언덕과 주변으로 정리된 나무를 보며 산성에 도착했다는 걸 직감으로 알게 된다.

 

날이 풀리며 내일과 모래로 하루씩 미룰 때마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아지는 걸로 조회된다.

시베리아 한랭전선이 물러나며 편서풍 영향으로 중국발 미세먼지가 몰려오는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중국이 국제대회를 싹쓸이해 공장의 매연을 나오지 않도록 관리하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이성산성(曾坪 二城山城)

충청북도 기념물 제138호

 

증평군 도안면 노암리와 증평읍 미암리의 경계인 이성산(二城山 해발 259.1m) 정상에 축조된 토성이다. 이성산성은 독립된 형태로 북성과 남성이 평면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산성은 전략적 요충지로 북쪽으로 진천·천안·안성 등이, 동쪽으로 괴산·음성·충주 등이, 서쪽으로 증평·청주·조치원조치원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북성은 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8부에서 9 부능선상에 8부에서 9 축조된 2 축조된 2중의 산봉형 산성이다. 북성은 내성과 외성, 그리고, 그리 외성에 덧붙여진 두 개의 자성(子城)이 있는(子城) 4중 구조이다. 북성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으로 북고남저, 동고서저의 지세를 하고 있다. 내성은 반월형이고 외성은 내성과 붙은 벽을 빼면 'ㄷ' 자형이다.

·외성에 붙은 부분을 제외한 북성의 전체둘레는 429m이며, 내성이 219 m, 외성이 310m이고, 내·외성의 공유벽은 100m이다. 외성의 자성은 각각 101.8m, 98.8m 정도이다.

남성은 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7부에서 9부 능선상을 감아 돌면서 축조되었다. 남성은 산의 정상부를 에워싼 산봉형 산성과 지형상으로 계곡을 포함하여 가지능선을 연결하는 고로봉형 산성이 복합된 산성이다. 남성은 전체적으로 불가사리 모양의 부정형이다. 남성은 내성과 외성을 갖춘 2중 구조로서 내성이 741m, 외성이 1,052m이며, 내·외성에 붙은 191m를 제외한 전체 둘레는 1,411m이다.

이성산성의 체성구조는 남성과 북성에 모두 곡성(曲城) 구조가 있으며, 특히 남성에는 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보축 시설이 보이고 있다. 남성은 남서부의 외성벽을 제외하고 대체로 높이 1.5m, 폭 1.5m이며, 성기(城基)에 판축 또는 잡석을 넣지 않은 순수 토루이다.

이성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은 추성산(城山) 니성산(尼聖山) 이성산(二城山)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산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으로 청안현(淸安縣) 산천조(山川條)에 “유성산이 청안현 서쪽 2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성산에 대한 기록은 이후 『여지도서(與地圖書)』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그대로 이어져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도안의 유성산에 옛 성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까지는 유성산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績調査資料)』에는 “미암리 동방 니성산에 있으며, 토축으로 되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성산이란 명칭은 이 산에도 두 개의 성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되고 공주 등이, 남쪽으로 청원군 미원·보은·상주 등이 있다.

이성산성은 지금의 청주 청원지역에 처음 백제가 진출했을 시기인 3세기 후반경 초기백제 때 처음으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5세기 후반경 고구려의 진출에 의해 삼국의 접경지대를 이루었고, 6세기 중반 신라가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산성 주변은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삼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지역으로, 백제는 청주·청원 지역, 고구려는 도안(중평)·괴산·진천지역, 그리고 신라는 보은 등지를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삼국사기(드國史記)』 지리지 등의 분석을 통하여 도안지역은 고구려의 도서현(道西縣)으로 추정되고 있어 도서현성을 이성산성에 비정하기도 한다. 김정호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이성산성을 도안고성(道安古城)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도안현으로 개칭된 사실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처음 이성산성을 만나며 보게 되는 건 이런 곡성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석축은 보이지 않으니 토성인 셈이다.

소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선 곳은 곡성이면서 치성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정표에서는 동치성으로 안내하고 있다.

 

토성은 산 모양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어진다.

 

동치성을 지나 북동쪽으로 이동하며 보는 발 아래의 이 토성은 외성外城에 해당한다.

나중에 남성의 망대지에서 성곽이 분리되는 걸 보고 내성과 외성이 있는 중성체계란 걸 알았다.

 

지나온 동치성 방향

 

 

 

북동무니로 가는 길목이 높다보니 휴식공간을 만든 게 보인다.

 

나중에 만나게 될 남문 망대지와 내성의 성벽에 최근 잔디를 이식한 게 보인다.

 

 

 

북동문지로 가는 토성에 희눈이 깔려 정갈한 흰 카팻을 밟는 느낌이다.

 

 

남성 북동문지城北東門址

 

남성 북동문지는 남성의 북쪽 성벽과 동쪽 성벽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전에는 성벽이 'U'자 형태로 파여 있어 자연적인 등산로인 줄 알았으나, 2011년 3차 발굴 조사 결과 성 안팎을 출입하기 위한 성문으로 이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북동문지의 구조는 성벽을 관통하여 축조된 개거식* 형태로 입구 양쪽에 돌로 쌓은 옆벽을 만들어 개구부를 마련하였고, 바닥에는 원활한 통행을 위해 돌을 깔았다. 문의 폭은 2m 정도이며, 길이는 8.3m로 추정된다.

문은 바닥부터 옆벽까지 적갈색 사질 점토로 다진 후 동쪽과 서쪽에 돌로 옆벽을 쌓아 올렸다. 동쪽 옆벽은 높이 1m의 석축 6~7단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30cm 정도의 할석재*를 사용하여 층단을 구분 없이 막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서쪽 옆벽은 심하게 유실되어 흔적을 확인하기 어렵다.

출토된 유물이 없는 점으로 보아 처음 축조된 이후 단기간 사용했다가 성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후에는 토사를 다져서

성벽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 개거식(開拒式): 통로부 위쪽이 트인 형식, 개방문 

* 할석(割石): 성벽을 쌓을 때 쓰이는 거칠게 다듬은 돌  

                                                                                        (안내문)

 

이곳 역시 짧은 곡성으로 북동문이 있던 타라고 한다.

 

 

 

표지판 주변이 남성 내성의 우물터란 말씀

 

 

남성 내성 우물터 南城 內城 井址

 

우물터는 북향 계곡에 인접한 내성(內城)의 중앙부 가장 낮은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우물의 형태는 원형으로 할석재*를 4~5단 둥글게 쌓아 올렸으며, 규모는 지름 100cm, 깊이 80cm 정도이다.

우물 내부에서는 토기 구연부 편이* 출토되었는데, 내부의 숯을 방사성탄소연대*로 측정한 결과 4세기 것으로 확인되었다. 추성산성 석축 우물은 한성백제* 때 산성에서 우물이 조사된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4세기 우물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할석재 : 성벽을 쌓을 때 쓰이는 거칠게 다듬은 돌

* 구연부 편 : 항아리, 그릇 등의 입구 조각

*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 방사선을 이용해 유물·유적의 절대연대를 측정하는 방법

* 한성백제 : 백제가 위례성(현재 서울)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기간(BC 18년 ~ AD 475년)

                                                                                                                               (안내문)

 

우물터와 함께 배수로가 보인다.

 

 

남성 내성 수혈주거지 南城 內城 竪穴住居址

 

동향 계곡에 인접한 내성內城에서 대규모 수혈주거지*가 발견 되었다. 주거지는 가로 850cm, 세로 472cm, 깊이 116cm로 한성백제* 때 조성된 산성 안 주거지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주거지 서북쪽 모서리에 부뚜막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벽체의 판재와 기둥으로 보이는 목탄과 탄화된 곡물(쌀, 팥)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이 대부분 단단하지 않은 장란형* 토기, 심발형* 토기, 시루 등인 점으로 보아 주거지는 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땅을 파서 사람이 살던 집, 움집이라고 함

* 한성백제: 백제가 위례성(현재 서울)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기간(BC 18년 ~ AD 475년)

* 장란형(卵形): 길쭉한 달걀 모양

* 심발형(深鉢形): 속이 깊은 사발 모양

* 시루: 떡이나 쌀 등을 찔 때 쓰는 한국 고유의 찜기구

 

 

남성 내성 배수 시설 南城 內城 排水 施設

 

남성 내성배수 시설은 동향 계곡부에서 발견되었다. 이 시설은 성 안쪽의 다짐층 윗면에 'Y'자형 석렬을 조성하여 빗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하였고, 성벽 부근 나팔 모양의 석축을 거쳐 성 밖 계곡으로 물이 빠지도록 설계되었다.

성벽 바깥쪽 배수 시설은 덮개돌이 없는 형태였으나, 붕괴된 이후 터널형 배수 시설로 개축되었다. 성벽 바깥쪽 배수 시설은 폭 약 300~400cm, 길이 약 16m 정도로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석렬을 성벽 기울기에 맞춰 설치하여 물을 뺀 것으로 추정된다. 터널형 배수 시설은 한성백제* 때 산성 중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주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 한성백제: 백제가 위례성(현재 서울)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기간(BC 18년 ~ AD 475년).

                                                                                                                                   (안내문)

 

 

이 산성의 원래 이름은 이성산성이다.

이곳이 남쪽에 있는 남성이고, 여기서 북쪽으로 1.3km 정도 가면 북성이 나온다.

이렇게 두 개의 성이 있다고 하여 이성산성인데, 같은 이름의 산성이 전국에 여러 개 있다.

2012년 12월 이곳을 발굴하면서 "이성산성 발굴" 표시를 한 표석이 보인다.

증평군에서 전국에 산재한 같은 이름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얫날 지명인 추성산성으로 바꿨다.

증평군청이 정한 증평 9경이나 도로표지판 심지어 카카오맵에서도 추성산성으로 검색된다.

앞에 지역명인 "증평 이성산성"이라고 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

이성산성(二城山城)이라고 한문까지 병기하면 성이 두 개란 걸 쉽게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연결된 지점의 공터

 

 

- 유적지점 : 증평 이성산성 남성, 발굴기관: (재)중원문화재연구원

- 발굴사유 : 학술조사, 대상일자: 2012년 12월 

 

남성 망대지로 연결되는 북성벽 

 

남성 망대지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망대 역할을 대신한다.

 

 

 

 

 

충주에 있는 가섭산 능선이 선 굵게 보인다.

 

 

남성 망대지 南城 望臺址

 

남성 내성의 남서쪽 성벽이 꺾이는 부분은 남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성 바깥쪽을 감시하기 위한 망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특히, 주변 지역 중 남쪽, 동쪽 및 북쪽의 시야가 매우 넓게 확보되어 멀리 까지 바라볼 수 있다.

망대는 할석재* 1단 석렬을 직사각형 형태로 만들었으나, 상당 부분 없어져서 현재는 너비 5.3m, 길이 4m 정도만 남아 있다. 망대 흔적의 중앙에는 2개의 깬 돌을 세워 부뚜막 봇돌*과 흡사하게 설치한 화기 시설이 확인되었다. 망대에서 출토된 어골문* 기와 편의 연대로 보아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 사이에 만들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 망대(望臺): 군사적 목적으로 망을 보기 위하여 세운 높은 대.

* 할석(割石): 성벽을 쌓을 때 쓰이는 거칠게 다듬은 돌.

* 봇돌: 아궁이의 양쪽에 세우는 돌.

* 어골문(魚骨文): 물고기의 뼈와 같은 문양.

                                                                                   (안내문)

 

남성 망대지에서 문북동 터 방향으로 이어지는 토성은 내성에 속한다.

우측은 외성이 되는 셈이다.

 

 

남성 수혈주거지 南城 竪穴住居址

 

남성의 북서쪽 평지에서 2기의 수혈주거지*가 발견되었다. 1호 수혈주거지는 가로 4.6m, 세로 3m 규모의 직사각형 형태로 겉흙의 아래에 있는 암석을 파서 조성하였으며, 벽면을 따라 기둥을 세웠던 구멍들이 남아 있다.

2호 수혈주거지는 가로 6m, 세로 4.5m 규모의 직사각형 형태로 남동쪽 모서리에는 점토 덩어리를 이용한 부뚜막이 설치되어 있다. 그 주변에서 각종 토기 편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옹기의 내부에서 불에 탄 팥이 발견되었다. 이 주거지는 토기의 사용 연대를 확인하고, 팥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4세기에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주거지는 남쪽 벽면에서 불에 탄 목재가 다수 확인된 점으로 보아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땅을 파서 사람이 살던 집, 움집이라고 함.

*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 방사선을 이용해 유물·유적의 절대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

                                                                                                                                (안내문)

 

내성은 잠시 후 보기로 하고 남성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외성을 지나간다.

 

 

증평 추성산성 남성 曾坪 杻城山城 南城

 

추성산성 남성은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통해 4~5세기 백제가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려 축조한 산성으로 밝혀졌고, 다양한 유구*와 유물들이 출토됨으로써 이를 통해 성 안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자취를 추정할 수 있다.

유구의 특징으로는 첫째, 남쪽 성벽의 성문이 통행로와 배수로의 역할을 동시에 함으로써, 성문과 수문의 분화 전 단계를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한성백제* 때 산성 중 최초의 돌로 쌓은 우물과 터널 형태의 배수 시설이 확인되어 당시 사람들이 돌을 이용하여 건축물을 축조하는 고도의 기술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한성백제 때 산성 중 최대 규모의 주거지가 확인되어 산성 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주거지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지역 고유 양식인 토기 편과 한성백제 중앙지역의 특징적인 토기 편이 함께 발견되어 한성백제 세력이 지방으로 영향력을 확장해 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유구(遺構):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 한성백제: 백제가 위례성(현재 서울)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기간(BC 18년 ~ AD 475년) 

                                                                                                                          (안내문)

  

 

 

남성 남수문지 南城南水門址

 

남성 남수문 터는 남성 입구의 지표면 약 2m 아래에서 발굴되었다. 성 안쪽의 석렬石列이 성 바깥쪽으로 갈수록 점차 벌어지는 '八'자 형태를 이루고 있고, 양쪽 측벽은 하부에서 상부로 갈수록 조금씩 벽 안쪽으로 들여쌓기 되어 있다. 개구부 안쪽 1/3 지점에 측벽이 덧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1차례 개축 또는 증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동쪽 측벽은 높이 2.6m로 27층, 서쪽 측벽은 높이 1.8m로 15층이 쌓여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한 산성의 성문은 일반적으로 계곡이나 능선에서 떨어진 장소에 설치되어 통행 시설로 활용되었고, 또한 성 안의 빗물을 배수하기 위한 수구水口는 성문과는 별도로 계곡부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추성산성 남수문지는 지형상 성 안에서 가장 낮은 계곡 중앙부에 위치하여 통행과 수문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남수문지의 성문 구조는 고대 산성의 성문과 수문이 분화하여 발전하는 단계를 밝혀 줄 단서이며, 산성의 축조 기법이나 발전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구*로 볼 수 있다.

 

* 유구(遺構):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안내문)

 

이곳이 남문이자 수문의 역할을 함께 겸하는 곳이라고...

 

남문에서 망대지로 연결되는 외성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한 남쪽 토성

 

 

남성 외성 배수로 南城外城 排水路

 

산성 안 배수로는 빗물과 지하수의 흐름을 한쪽으로 유도하여 성벽에 대한 직접적인 훼손을 방지하는 기능을 한다. 남성 외성 배수로의 구조를 살펴보면 2개의 석축렬石築列로 이루어져 있고, 4차례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1차 배수로는 폭 80cm, 깊이 55cm 정도이며, 계곡부에서 남수문지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설치되어 있다. 2차 배수로는 길이 21m, 폭 96cm, 깊이 45~70cm이며, 단순히 퇴적토 위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1차 배수로 위에 많은 양의 흙을 붓고 다진 후 돌을 쌓아 조성되었다.

3차 배수로는 2차 배수로에서 동쪽으로 2~3m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으나 대부분 무너졌다. 4차 배수로는 3차 배수로에서 다시 동쪽으로 2m 떨어져 조성되었으며, 깊이 70cm 정도의 지표면을 땅파기한 후 그 안쪽으로 돌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안내문)

 

다시 남수문터로 내려와 내성 방향으로 오르며 뒤돌아 본 방향이다.

 

 

 

이곳에서는 망대지로 연결되는 내성의 토성이 명확하게 보인다.

최근 잔디를 이식하며 성토한 토성의 윤곽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성의 하나인 북성을 만나기 위해 북벽에 설치된 나무데크를 넘는다.

 

북성이 가까운 줄 알았더니 남성에서 약 1.3km 이동해야 만날 수 있다.

우측 작은 바위를 넘어 왼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일종의 통성인 셈이다.

그 능선에서 회절부를 따라 곡선을 그리면 이 곳으로 나오며 북성은 끝난다.

 

 

유적지점 :증평 이성산성 북성, 발굴기관:(재)증원문화재연구원

발굴사유:학술조사, 매장일자:2012년 12월

 

안내 표석을 보면 북성은 남성과 함께 2012년 12월에 발굴조사를 했다.

능선으로 걸으며 뒤돌아 본 북성

 

이 능선의 성벽은 저기 보이는 곳에서 끝나며 왼쪽 아래로 떨어진다.

한 바퀴 도는 전체 길이가 200m도 안되는 짧은 토성이니 북성이란 말은 과하다 싶다.

북보루란 말이 더 현실적인 느낌이다.

잎서 본 남성과 이 북보루를 합해 두 개의 성이 있다고 하여 이성산성이란 이름을 얻었다.

 

 

 

아래쪽 토성은 오랜 시간을 견디며 아직 둔덕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다.

1,500여 년의 세월을 이렇게 견디며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다.

 

 

 

작은 묘지가 북성의 좌우로 흘러 내리는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젠 후손도 찾지 않아 묘는 무너져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도 힘든 크기다.

 

마을로 빠르게 내려간다고 가다 보니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에 남성으로 다시 올라간 다음 원점 회기한다.

 

 

증평의 추성산성을 찾고 보니 이성산성이 더 어울리는 이름이란 걸 알았다.

남성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된 제법 짜임새 있는 중성이다.

궁금증안 안고 다녀온 북성은 성리라기 보다 보루란 이름이 더 어울릴 작은 진이다.

처음 얻었던 이름에 증평을 덧붙여 "증평 이성산성"으로 불리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