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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한양도성 순성 ① 서울역~인왕산 구간

by 즐풍 2023. 10. 26.

2023_146

 

 

 

2023. 9. 19. (화) 07:43~18:57(9시간 6분 순성, 휴식 2시간 8분 포함) 22.7km 순성

                인왕산 구간 07:43~10:47(3시간 3분, 휴식 30분 포함, 선바위 왕복) 6.7km

 

 

최근 열흘 넘게 산행을 하지 않아 몸이 찌뿌둥한 느낌이다.

오늘 날씨가 좋다는 예보를 믿고 서울의 한양도성을 한 바퀴 순성하기로 한다.

대략 19km 정도로 예상하지만 여기저기 들리다 보면 좀 더 거리가 늘어날 수 있다.

지하철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인 서울역에서 내려 숭례문부터 시계방향으로 순성 한다.

 

 

한양도성 순성코스

 

 

ㅁ 서울 한양도성

Hanyangdoseong, the Seoul City Wall

首尔汉阳都城 시대: 1396년(태조 5)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태조 5)에 백악(북악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 (1396~1910, 514년)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소의문·광희문·창의문)을 두었는데,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다.

2014년까지 한양도성 전체 구간의 70%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고, 숙정문·광희문·혜화문은 다시 세워졌다.

 

 

 

 

서울역에서 내리면 지척인 숭례문은 아직 개방 전이다.

안에서는 직원들이 주변정리를 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다.

사진만 간단하게 찍고 돈의문 방향으로 이동한다.

 

 

숭례문(崇禮門)

국보(1962.12.20 지정). 1396년(태조 5) 창건되어 1448년(세종 30) 개축했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정궁인 경복궁의 방향에 의해 남문인 숭례문이 정문이 되었다.
풍수지리에 의해 편액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였다. 

이는 서울 남쪽에 있는 조산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산의 모양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한 것이며,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숭례문이라 이름했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인 이 문은 화강석의 무지개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를 달았다.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를 두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4 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다.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이 문의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 1962년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존하는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 초기 다포계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출처_다음 백과)

 

돈의문으로 이동하는 길엔 한양도성 너머로 육중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성곽의 대부분은 훼손되었으나 일부 남아 있는 성벽조차 크고 작은 성돌이 뒤섞여 서로 다른 시대에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아펜젤러기념공원은 빌딩숲 사이로 꽉 막힌 공간에 조그만 숨통을 불어넣는다.

 

아펜젤러 기념공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1858~1902)는 펜실베이니아에서 1858년 2월 6일 출생하여 프랭클린 마샬대학교를 졸업하고 드류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884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회에서 조선으로 파견한 첫 번째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아내 엘라 닷지 아펜젤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인천)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는 이곳 정동에서 1885년 8월 3일 두 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교육사업을 시작하였고 이에 고종황제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시작이었다.

성경말씀(마태 20:26-28) '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교훈아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배재학당은 배개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로 성장하여 한국근현대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아펜젤러는 복음전파를 위해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여 이 땅에 빛과 생명을 전하였으며, 삼문출판사를 통해 독립신문, 협성회보, 천로역정, 매일신문 그리고 성서와 교과서 등을 출판하여 당시 한국의 청년들에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심어 주었다.

아펜젤러는 조선의 근대화와 기독교 전파를 위하여 17년 동안 교육, 선교, 의료, 출판사업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을 위해 목포로 가던 중 어청도 부근 해역에서 선박사고가 발생하였고 동행하던 여학생을 구하려다가 44살의 젊은 나이에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학교법인 배재학당에서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숭고한 정신과 삶을 기리고 기억하고자 아펜젤러 선교사 탄생 160주년을 맞이하여 '아펜젤러 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Appenzeller Memorial Park

 

Henry G. Appenzeller (1858~1902), the missionar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of America, founded Pai Chai Hakdang here in Jeong-dong in 1885.

Pai Chai Hakdang, Korea's first school of Western learning, developed into Pai Chai Middle School, Pai Chai High School, Pai Chai University and became an important educational institution that contributed greatly to the modern history of Korea.

Appenzeller also established Chungdong First Methodist Church to spread the gospel and published The Independent, The Pilgrim's Progress, Mae- Il Newspaper, Bibles and textbooks through the Sam Moon Press.

During 17 years in Korea, Appenzeller left behind many remarkable achievements in the fields of education, missionary work, medical care and publishing in order to modernize Joseon Dynasty and spread Christianity. On June 11 in 1902,

he ended his life at the young age of 44 in a shipwreck off the coast of Eocheongdo on his way to Mokpo for a Bible translation mission while trying to save a schoolgirl whom he was going with.

On the 160th anniversary of Appenzeller's birth, this Appenzeller Memorial Park was created to commemorate Appenzeller's noble spirit and life by the Pai Chai Hakdang Foundation  (안내문)

 

 

 

신아(新亞) 건물의 당쟁이 덩굴이 보기 좋다.

한여름엔 덩굴이 온도를 1~2℃ 떨어트리는 단열효과가 있겠다.

 

서울시 교육청 건물을 감싸는 복원된 한양도성이 눈에 잡히며 본격적인 성곽을 만나게 된다.

 

남아 있던 성돌 위에 기계로 자르고 깎은 현대식 성돌이 맞물리며 성벽 한양도성에 위에는 여장까지 설치했다.

 

한양도성에 4대문과 4소문이 성안팍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세상이 바뀌며 일제 강점기 때 고의로 성을 훼손하거나 근현대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길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보았듯이 덩치 크고 작은 건물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며 일부는 건축자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곳도 작은 도로가 지나가며 성벽을 가로질렀다.

오늘 순성은 가급성 성 밖으로 돌고, 다음엔 성 안으로 돌 생각이다.

 

한양도성의 70% 정도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구간은 건물이나 도로가 생기며 더 이상 복원할 수 없는 구간이니 사실상 복원은 끝난 셈이다.

 

성벽을 따라 생긴 도로는 주민의 편의를 위해 자연적으로 생긴 도로다.

 

한양도성을 복원하면서 주민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든 주민 편의시설인 셈이다.

이런 암문은 한양도성을 순성 하면서 자주 만나게 된다.

 

마을이 끝나면서 도로가 끊기며 오솔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곳은 마을버스 종점이기도 하니 마을의 끝이란 것도 알게 된다.

 

민가에서 떨어진 곳은 비교적 잔존 성벽이 높은 편이다.

 

인왕산 정상이 보이기 시작하니 인왕산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게 된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Inscribed Stone in Hanyangdoseong, the Seoul City Wall

汉阳都城的刻字城石  

 

해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황해도의 봉산현(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것이다. 세종 때는 성벽을 쌓은 지방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서울로 올라와 다시 쌓게 했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Interpretation:

This inscribed stone marks the starting point of a section undertaken by the people from Bongsan-hyeon, Hwanghae-do (now Bongsan-gun, Hwanghaebuk-do).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the government made it a rule to cut in stone the name of a region that built the wall and obliged the region to rebuild if it collapses.

An inscribed stone refers to stone blocks where records related to construction are carved in stone.

The types of inscribed stone remaining in Hanyangdoseong, the Seoul City Wall, include a stone marking the wall section with letters from the Thousand Character Classic (14C); a stone on which regions that took charge of construction are carved (15C); and a stone where the names of officials who were in charge of construction and stonemasons are inscribed (18C and later).

In Hanyangdoseong, there are more than 280 such inscribed stones of various dates and types.

 

 

解读:

该刻字城石表示由黄海道的凤山县(今天的黄海北道凤山都) 百姓所负责工事区段的始点.

世宗时期,命刻负责砌筑城墙的地方名, 以便日后若有城墙倒塌之事时, 召其再进京重筑

“刻字城石”指的是刻有与筑城相关记录的城石. 汉阳都城的刻字城石大致可以分为三种, 分别为用千字文中的文字表示筑城区段的刻字(14C), 刻有负责筑城的地方名字的刻宇(15C), 还有刻有负责筑城的官吏和石匠名称的刻字(18C以后).

据传, 汉阳都城内现存这种不同时期和. 类型的刻字城石280块以上.

 

이 홈들은 뭘까?

순조 때(1800~) 도성을 축조한 성돌은 가로·세로가 60cm인 정방형 돌로 정교하게 쌓았다고 한다.

성돌 형태로 보면 순조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므로 이 흔적은 625 전쟁의 실탄 상흔으로 보인다.

 

이런 진남색의 장미꽃도 있다면 예쁘겠다.

 

가끔 이렇게 작은 반원을 그리며 지나가는 성벽도 있다.

 

성벽을 오르다가 머지않은 곳에 선바위가 보여 잠시 들리기로 하며 성벽을 벗어난다.

 

작은 계곡을 지나 담장까지 쳐진 선바위가 보인다.

 

선바위(禪岩) Seonbawi (Rock)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 4호

 

이 바위는 아이를 갖기 원하는 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 기자암(祈子岩)이라고 불린다.

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長衫)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도 불린다.

이 바위가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像)이라는 설화와 태조 부부의 상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일제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이 바위 곁으로 옮긴 뒤부터는 이 바위와 국사당이 함께 무신(巫神)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 한양으로 천도할 무렵 선바위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한양 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 수 있게 설계하려 하였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했었다고 한다.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태조를 설득하여

결국 도성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인왕산을 볼 때면 이 바위가 가장 눈에 띄는데 조선 초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것이

이 설화에도 나타난다.

 

 

This rock is called "Gijaam" the rock of childbearing prayer, because many married women prayed for childbearing

at the site.

It is also called "Seonbawi", the meditating rock, because it resembles a monk wearing a long sleeved Buddhist robe. Two different legends are told about the rock:

some say that it looks like King Taejo, the founding king of the Joseon, and his close friend, Master Monk Muhak.

Others say that it looks like King Taejo and his queen.

Since the Japanese moved the Guksadang Shrine, previously located on Namsan (Mt.), near to this rock,

the rock became a place of worship for shamanic beliefs alongside the shrine.

Old records tell a story about Seonbawi from the time when the capital city was moved to Hanyang (old name of Seoul)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

Master Monk Muhak Daesa tried to include this rock inside the city boundary, while Jeong Dojeon, stood against it.

Jeong persuaded the king by arguing that Confucianism would prevail if the rock was placed outside the capital's territory, while Buddhism would flourish if the rock was included in the capital's territory.

When the King decided in favor of Jeong's argument, Master Monk Muhak is known to have sighed and said, "Monks will from now on have to follow scholars around carrying their books."

This rock is conspicuous in the landscape of Inwangsan (Mt), and this story suggests that the rock left a strong impression on many people from the early Joseon period as well.

 

 

据说, 由于求子的妇女经常在这座岩石前祈祷, 故叫祈子岩。形态与穿长衫的僧人十分相似, 故取意味参禅的 “祥", 字叫禪岩。民间相传, 此岩与太祖和无学大师的长相相似, 另外还有传言说此岩与太祖夫妇的长相相似。

 

 

 

선바위 앞에서는 세 명의 아주머니들이 절을 하고 있다.

뭔가 소원을 비나 본데 소원성취하시길 빈다.

선바위 위에 앉은 까마귀가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선바위 주변에 있는 바위는 제법 많은 사람이 이름을 어지럽게 써댔다.

기도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이렇게 자연을 훼손하고도 잘 되길 바란다니 한심하다.

 

아파트 숲 사이로 보이는 서대문 형무소도 한번 다녀와야 하는데...

 

성밖으로 나던 길은 선바위 인근에서 계단을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벽을 지나면 찍은 산성이 길게 꼬리를 남긴다.

 

멀리 선바위 위쪽에는 군부대가 곡성을 깔고 앉았다.

곡성구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제법 멋지겠으나 군부대가 있으니 갈 수 없는 곳이다.

 

드디어 인왕산 정상에 올라왔다.

 

정상 인증사진을 찍을 때 갑자기 바라도 내릴 듯 먹구름이 끼며 즐풍은 얼굴도 안 보인다.

몇 번 밝기를 조정해 겨우 드러난 모습이다.

 

건너편 기차바위는 늘 눈으로만 훑고 지나간다. 다음엔 기차바위까지만이라도 다녀와야겠다.

 

 

 

산을 오를 때는 힘들어도 내려갈 땐 룰루랄라다.

그래도 무릎에 부담가지 않게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선다.

 

성 밖으로 목인박물관의 목석원이 보인다.

 

 

 

이곳은 묘지에 설치한 문인·무인석이 즐비하다.

 

 

 

 

서울 한양도성을 1년에 매 분기별로 한 번씩 네 번을 순성 하면 메달로 된 배지를 지급받는다.

지난 7월초에 다녀간 걸 6월 이전에 다녀간 것으로 착각해 다시 왔으나 나중에 착각이란 걸 알았다.

하여 오늘 다 돌아도 그만 못 돌아도 그만이란 생각에 주변의 박물관도 들리며 천천히 돌았다.

편의상 박물관 등은 개별적으로 포스팅할 예정이니 일을 만드는 셈이다.

지난번처럼 서울 한양도성 순성은 네 구간으로 나누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