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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멀리서 본 안흥진성이 너무 멋져 다시 탐방

by 즐풍 2022. 7. 27.

2022_133

 

 

2022.7.16 (토) 08:45~10:00, 한 시간 15분 탐방

 

 

2년 전 방문했을 땐 서문인 수홍문 일부만 보고 더 이상 성벽이 보이지 않아 그냥 갔다.

열흘 전 신진대교를 건너 신진도의 태안 해양유물전시관에서 안흥진성의 성벽이 산 정상을 둘러싼 걸 봤다.

저렇게 멋진 걸 못 보고 지나친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하여 오늘 일부러 시간 내 지난번의 미안함 마음을 더해 천천히, 또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안흥진성 안내문

 

안흥진성 배치도

 

안흥진성은 나지막한 산 양쪽 능선을 낀 계곡 입구에 수홍루가 설치됐다.

사실상 안흥진성으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남문에 속한다.

위 안내문에도 있듯이 전란 등으로 임금이 강화도에 피신하면 양식을 대는 창고 역할을 했다.

하여 곡식 창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데, 지금은 마을이 형성되어 민가가 많다.

 

 

안흥에 수군이 처음 배치된 것은 왜구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후기였다.

이후 1370년(공민왕 20)에는 안흥량에 진수군(鎭戍軍)이 배치되고,

조선 건국 초기에는 안행량만호(安行梁萬戶)가 파견되기도 하였다. 

후후 세종 시기에는 소근진첨사가 수군을 나누어 지키는 안흥량수(安興梁戍)가 설치되었으며,

1595년 경에 제진(諸鎭) 중의 하나가 되었다가 1609년에는 거진(巨鎭)으로 승격되었다.

안흥진이 본래 설치된 목적은 한양의 길목인 강화도와 직접 뱃길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안흥량을 지나는 조운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한양 방비책이 중요해지면서 안흥진의 역할 역시 강화되었다.

따라서 진성이 축조되었으며, 방어영으로 승격되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청과 일본의 정세가 안정되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

안흥진성에서 1587년(만력 11) 명문이 새겨진 성돌이 발견된 것을 보면 처음 성이 설립된 것은

16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이 잠잠해지면서 주목받지 못하다가 양난 이후인 1653년에서야 신진(新鎭) 설치가

결정되었으며, 1657년에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진성이 완공 되었다.

                                                                   (출처_해양문화재 13호 발췌)

 

안흥진성 남문이 성 안으로 들어가는 공식적인 통로라 성벽은 건너편 산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세월이 바뀌며 차량 통행을 위해 일부를 헌 것으로 보인다.

 

왼쪽 능선으로 오르는 성벽은 가파르게 치고 오른다.

이렇게 경사가 급하면 방어하기 좋겠다.

 

워낙 낮은 야산이라 금방 능선을 타고 오른다.

건너편엔 스톤비치CC가 눈에 띈다.

이곳은 해양성 기후와 바람을 막아주는 신진도리 섬의 역할로 사계절 라운딩이 가능하다고 한다.

 

바다를 끼고 있어 가족과 함께하면 골프도 치고 해수욕도 하고 좋겠다.

 

조금만 올라오면 태국사란 작고 아름다운 사찰을 볼 수 있다.

 

관음전

 

다시 보는 스톤비치CC

 

붉은 흙 오솔길 밖으로 금계국이 노랗게 수놓았다.

이젠 이런 금계국에 밀려 하늘하늘 피던 코스코스는 뒷전이 된 지 오래다.

 

우단 동자꽃

 

 

 

 

 

안흥진성은 남문인 수홍루 석성을 두르고 태국사로 올라가는 일부에 토성을 쌓은 뒤

태국사 머리맡부터 석성이 다시 시작된다.

 

태국사와 주변의 노거수

 

북문인 감성루다.

겨우 한 명 지나갈 정도로 좁으니 방어하기 쉽겠다.

 

감성루에서 바라보는 마을 

 

 

 

△▽ 위아래로 방어용 문을 달 수 있는 지도리 돌이 설치되었다.

 

 

□ 안흥진성

 

안흥성(안흥진성)은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의 뒷산에 위치해 있는데, 

조선조 제17대 효종 6년(1655)에 축성된 것이다.
축성 연유를 살펴보면 경기 사인 김석견이 왕에게 상소하여 안흥 진성의 축조를 청원하니 

왕이 지경연사인 이후원을 불러 안흥 진성 축조의 필요성을 하문하였다.
이에 왕이 충청감사에 명해 안흥 진성을 축조케 하니 인근 19개 읍민이 동원되어 10여 년 만에 축성되었다.
안흥성은 이후 240년간 내려오다 조선조의 고종 31년(1894년) 동학혁명 때 성내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고, 

이에 따라 성곽은 자연히 폐성 되고 말았다.
지금도 성곽과 동, 서, 남, 북의 성문이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동문은 수성루, 서문은 수홍루, 

남문은 복파루, 북문은 감성루라 불렸다.
안흥성은 둘레 1,568미터, 높이 3.5미터에 이르는 석성(石城)으로 

지난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출처_태안군청)

 

태고사는 전망 좋은 곳에 잘 자리 잡았다.

 

10년 만에 축성되었다더니 지금도 여전히 견고한 형태를 보인다.

 

안흥진성의 약 1/4 구간은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에 따른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다.

철망이 처져 들어갈 수 아쉽게도 들어갈 수 없다.

철망 안쪽으로 보는 동문은 일부 훼손되고 홍예문만 남은 상태다.

 

안흥진성 안쪽에 자리 잡은 마을에 제법 많은 민가가 모여 있다.

 

서문인 수홍문 다음으로 큰 북문으로 밖에서 보는 풍경이다.

 

이번엔 안쪽에서 보는 북문 상판이 절반은 사라지고 안 보인다.

상판이 사라진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원래부터 저랬겠다.

 

 

 

접시꽃

 

북문에서 서문으로 내려가며 잠시 밖으로 나가 찍은 성벽이다.

이곳 역시 오밀조밀하게 잘 쌓아 상태가 좋다.

 

엉겅퀴 꽃

 

북문 넘어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 갈 수 없다.

 

북문에서 서문으로 가는 구간은 풀을 베어내지 않아 걷기가 불편하다.

밖은 석성이고 안쪽은 이렇게 석성을 흙으로 덮은 토성이다.

가운데 낮게 계곡처럼 만들어 적에게 띄지 않게 이동할 수 있다.

 

건너편 신진도의 태안 해양유물전시관에서 보면 안흥진성의 석성이 정상을 휘감고 지나가는 걸 볼 수 있다.

지난번 저곳에서 이 석성을 보고 오늘 안흥진성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작은 항구

 

스톤비치CC 밖의 해안에 있는 바위가 특이하다.

스톤비치CC의 명칭도 어쩌면 저 바위에서 유래했겠단 생각이 든다.

안흥진성 탐방을 끝내고 스통비치CC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저곳을 탐방했다.

별도로 올릴 예정이다.

 

크고 작은 돌을 레고 블록 쌓듯 잘 맞춰 쌓았다.

 

 

 

서문인 수홍문으로 내려오는 마지막 구간은 토성으로 잡풀이 많아 내려오기 불편했다.

 

 

섣부른 판단으로 미완의 작품으로 남겨둔 걸 이제야 완성하는 느낌이다.

안흥진성도 알고 보면 서해를 지키는 중요한 관문의 하나이다.

효종 때인 1655년에 축성되었다고 하니 어언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대부분 견고하게 남아 있다.

수원화성이 아닌 다음에야 임금도 못 받고 10년 간 고생하며 쌓은 산성이다.

훌륭한 문화유산이 후세에도 잘 이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