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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우리나라 3대읍성의 하나인 서산 해미읍성 마지막 탐방

by 즐풍 2022. 8. 2.

2022_144

 

 

 

2022.7.25 (월) 10:20~11:10, 50분 탐방

 

 

이 정부는 지난 정부의 코로나 방역을 그렇게 까 대더니 진작 코로나가 다시 유행하자 갈팡질팡이다.

급기야 아무런 대책 없이 각자도생 하라는 어처구니없는 코로나 대책을 발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코로나가 다시 유행하나 정부를 믿지 못해 서둘러 오전 9시에 4차 코로나 백신을 접종했다. 

안철수는 과학 방역을 하겠다며 큰소리치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국으로 휴가를 떠난다고 한다.

 

오늘 잠시 귀가할 때 서산의 해미읍성, 예산 봉수산의 임존산성과 예당호 출렁다리를 보기로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을 최대한 줄일 목적으로 짠 경로에서 제일 먼저 서산 해미읍성을 만난다.

3대 읍성 중 하나인 해미읍성을 벌써 세 번째 방문이지만 처음 왔을 때만큼 감흥은 일지 않는다.

성벽을 돌며 읍성의 주변까지 조망해야 시원한 데, 성벽에서 추락사고 발생 이후 출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 서산 해미읍성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다.

효종 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 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다.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 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해미읍성 → 서산 해미읍성)으로 명칭 변경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_문화재청)

 

 

 

 

정문인 진남문 서북쪽에 위치한 치성과 문루

성벽으로 올라가야 치성과 문루 등을 자세히 조망할 수 있는데,

언젠가 추락사고 이후 폐쇄되었다.

이제 해미읍성에 와도 성벽에서 보는 풍경은 기대할 수 없으니 더 이상 올 필요가 엇겠다.

 

 

 

 

 

장마철이라 하늘은 늘 먹구름이거나 비가 내린다.

 

진남문 안쪽엔 여전히 코로나를 관리하는 천막이 그대로 있다.

코로나로 여전히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의학으로 관리가 되는 편이라 예전처럼 두려움은 없다.

그래도 이 정부는 코로나에 대한 방역이나 관리를 믿지 못하니 서둘러 백신 접종을 마쳤다.

 

 

 

진남문 안쪽에 황명홍치4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므로 1491년(성종 22)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안내문)

 

 

 

 

해미읍성이 생긴 지 500년이 월씬 넘었으니 많은 역사가 담긴 성이다.

영조 시절까지 천주교에 대해선 다소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주교에 대해 못마땅한 시선을 기진 당시 사회에선 눈에 가시였다.

프랑스 신부가 처형된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는 사건이 있었다..

독일인 오페르트는 흥선대원군의 부친 묘소인 남연군 묘를 도굴하여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천주교 박해를 촉발해 해미읍성에서 1천 명이 넘는 순교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천주교 박해로 숨진 많은 사람들은 홍성, 당진, 서산, 보령 등 서해안에 집중된다.

그때만 해도 기차가 없던 시절이라 중국에서 배를 타고 서양인 신부가 많이 들어왔다.

그러니 서해안은 천주교가 싹트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저 옥사 앞의 회화나무가 많은 사람을 매달아 고문한 나무다. (안내문 참고)

 

 

 

1576년(선조 9)에 이순신은 세 번째 관직으로 1579년 충청 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이곳에 부임하여 10개월간 근무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해미읍성에 근무하는 동안 방에는 이부자리만 두어 청렴하게 생활하였고,

자신의 상관이라 해도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했다.'고 전한다. (안내문)

 

민속가옥

 

옥사

 

 

 

 

 

 

 

 

옥사 앞 회화나무는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다.

 

민속가옥 앞 우리나라 지도를 만든 화단

 

 

 

동헌 주변의 풍경

 

 

 

 

 

 

 

 

 

 

 

위 안내문에도 있듯 이곳은 충청도 5진영의 하나인 호서좌영이다.

호서좌영 편액이 걸렸다.

 

 

 

 

 

옥사 앞 회화나무 

 

객사 앞 늠름한 자태의 소나무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객사 앞에는 양쪽에 잘 생긴 소나무가 있다.

 

동헌

 

동헌 뒤 건물은 관찰사가 머물던 처소이다.

 

동헌을 지나 작은 동산으로 올라간다.

 

 

 

계단을 오르며 보는 동헌 일대

 

청허루 주변의 소나무 군락

 

 

 

 

□ 청허정(淸虛亭)


정자(亭子)는 일반 가옥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청허정은 조선 성종 22년(1491) 충청도 병마절도사(충청병사) 조숙기(曺淑沂, 1434~1509)가 세웠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조선 전기 학자 성현(成俔, 1439~1504)의 문집 『허백당집(虛白堂集)』에 그 유래가 전한다. 

정자의 이름인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초기의 해미읍성은 충청도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 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병사)였다. 
조숙기가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소나무 숲이 우거진 뒷동산에 청허정을 지었다. 
이후 이곳에 온 관리들은 청허정에서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1494년 방문한 충청감사 조위(曺偉, 1454~1503)는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시를 남겼고, 
권오복(權五福, 1467~1498)의 문집 『수헌집(睡軒集)』에 절도사와 수령이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가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했던 이순신, 1790년 해미로 귀양 왔던 다산 정약용도 이 청허정에 머물렀을 것이다. 

1872년 「해미현지도」에는 옛터(古址)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자리에 일본식 신사(神社)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철거되었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에 다시 정비하였다.
                                                                                                              (출처_문화재청)

 

청허정을 지나 북문 방향으로 가며 보는 허리 굽은 소나무다.

여름의 기운이 가장 강할 때도 천지사방이 모록 녹색물결이다.

가을이 지나 잔디나 풀이 갈색을 변한 다음이라면 이 소나무가 돋보이겠지만

지금은 온통 녹색에 파묻혀 존재감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북문인 암문

 

 

 

비비추 꽃

 

서문인 지성루

 

 

 

5백 년이 넘는 해미읍성엔  제법 많은 고목이 보인다.

더 많은 고목이 있다면 좋겠으나 그동안 수없이 많은 태풍이 지나갔을 테고,

집을 짓는다 뭐다 하며 그대마다 한두 그루씩 잘려나갔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만 해도 다행이다.

 

 

 

 

 

 

 

아카시아 나무로 기억한다.

지금까지 본 아카시아 나무 중 수형이 가장 멋지다.

 

 

 

 

 

현상금이 걸린 수배 방문

 

진남문 옆에 있는 이 석축의 바위는 가로가 약 4m, 높이 1m 정도의 큰 바위다.

어쩌면 처음 이곳에 있던 바위를 그대로 두고 성벽을 쌓았다면

이 바위가 해미읍성의 기준점이 되는 셈이다.

바위 우측에 보면 바위를 직각으로 자르려던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즐풍의 생각일 뿐 사실 관계는 알지 못한다.

 

 

 

 

 

 

태안에서 코로나 백신 접종을 끝내고 잠시 귀가하는 길에 해미읍성에 들렸다.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니 설렘은 많이 줄었다.

그런 와중에 성벽을 걷다가 누군가 추락 사고가 있은 후 성벽 탐방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성 안만 탐방하면 성벽을 돌며 보는 멋진 풍경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다시 성벽 탐방이 가능할 때까지 이곳 탐방은 보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