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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전라도·광주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신재효 고택 탐방

by 즐풍 2021. 11. 7.

 

 

2021.9.21 (화) 추석  

 

 

추석인 오늘 불갑산 꽃무릇을 보러 간 김에 불갑사는 물론 용천사까지 들렸다.

용천사에서 불갑사로 넘어올 땐 모악산을 들렸으니 하루에 두 산을 탐방한 날이기도 하다.

내일 등산할 선운산에 일찍 도착하기 위해 미리 고창에 도착해 고창읍성을 한 바퀴 돌았다.

고창읍성을 끝내고 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신재효 생가가 보여 거르지 않고 들어선다.

 

한국사 시간에 신재효와 신채호란 인물이 어떻게 다른지 배운 게 벌써 45년 전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는 좀 소홀한 면이 있다.

10여 년 전 「이이화의 한국사」 22권을 읽었어도 기억에 남는 건 없다.

이젠 남는 게 시간밖에 없으니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를 손에 들어야겠다.

 

 

 

□ 신재효(申在孝)

조선 후기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한 이론가, 개작자, 후원자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전라북도 고창 출생.

아버지 신광흡(申光洽)은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한성부에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을 하던 선대의 인연으로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하여 재산을 모았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절충장군 김상려(金常礪)의 딸이다.

 

생애

 

신재효는 어려서 총명하였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런 이름을 지었다 한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수학하였고, 사십이 넘어서 부근에 살던 대석학과 학문을 의논하였다고 하는데,

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고창현의 향리와 서민들과 깊이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 여러 향반(鄕班)들이 만장을 써 보낸 것으로 보아, 신분을 넘어선 폭넓은 교유를 맺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는 아버지가 마련한 기반을 바탕으로 35세 이후에 이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호장(戶長)에 올랐다.

1876년(고종 13)에 기전삼남(畿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 3품 통정대부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다.

 

활동사항

 

신분 상승을 꾀하면서도 한시가 아닌 판소리에서 정신세계를 찾은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여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보아 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직선적이고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빨라 너름새를 할 여유가 없는 동편제(東便制)와,

유연하고 화려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느려 너름새가 쉽게 이루어지는 서편제(西便制)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덧붙여,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진채선(陳彩仙) 등의 여자 광대를 길러 내어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춘향가」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어린 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마련하기도 하여,

판소리의 다양화를 시도하였다.

 

「광대가」를 지어서 판소리의 이론을 수립하였는데, 인물·사설·득음(得音)·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하였다.

인물은 타고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으며,

사설의 우아한 표현, 음악적 기교 및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판소리는 상스럽지 않고 한문학과 견줄 만한 예술임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만년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판소리 여섯 마당을 골라서

그 사설을 개작하여, 작품 전반에 걸쳐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게 하고,

상층 취향의 전아(典雅)하고 수식적인 문투를 많이 활용하였다.

그래서 하층의 발랄한 현실 인식이 약화되기도 하였으나, 아전으로서 지닌 비판적 의식이 부각되고,

사실적인 묘사와 남녀 관계의 비속한 모습을 생동하게 그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판소리가 상하의 관심을 아우르면서 신분을 넘어선 민족 문학으로 성장하는 데 진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 혹은 ‘허두가(虛頭歌)’라고 하는 노래를 지었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룬 「치산가(治産歌)」, 서양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시련을

걱정하는 「십보가(十步歌)」·「괘씸한 서양(西洋) 되놈」, 경복궁 낙성 공연을 위해 마련한 「방아타령」,

그 밖에 「오섬가(烏蟾歌)」·「도리화가(桃梨花歌)」·「허두가」 등이 대표적이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재효(申在孝)]

 

 

 

고창읍성 탐방을 끝내고 신재효 고택에 들어섰을 땐 벌써 오후 6시 반이 넘었다.

당시엔 제법 잘 살던 집이라고 하지만, 이 시대의 눈으로 보면 사실 보잘것없다.

그래도 이 집에서 판소리 교육을 하며 소리꾼이 넘쳐났다는 사실만 봐도 대단하다.

 

 

제법 높았을 집을 암행어사가 국법을 지키라고 하자 높이를 낮춘 집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랑채만 남아 보잘것없이 보여도 당시엔 부속 건물도 많아 제법 대단한 위세를 보였을 집이다.

 

 

신재효는 아호인 동리를 따라 자신의 집에 동리정사(桐里精舍)라 이름 붙이고 소리청을 만들었다.

 

꽃무릇과 우물이 보이는 사랑채

 

 

 

방은 여닫이문으로 연결된 구조다.

 

 

 

이 시대에 만들었을 굴뚝

 

작은 연못도 있으나 지금은 말라버렸다.

 

작은 마루가 회랑처럼 길게 이어졌다.

비 오는 날 마루에 앉아 낙수 소리 들으며 판소리 한 곡조 뽑으면 무척이나 운치 있겠다.

 

 

 

판소리 한 곡조 질펀하게 흘러나올 분위기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 그 많던 건물은 다 사라지고 겨우 사랑채 하나만 남았다.

이 고택으로 신재효가 고창 사람이란 걸 겨우 알리는 셈이다.

주변에 「고창 판소리 박물관」과 「고창 군립미술관」이 있으나 추석인 데다 시간도 늦어 문이 닫혔다.

 

 

 

 

 

 

수없이 많은 음악 장르 중에 여전히 판소리의 명맥은 이어진다.

그 저변에 신재효 선생의 역할도 한 몫한다.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까지 선전하는 걸 보면 국악계에서 그분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얼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