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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조선왕릉

강남에도 조선왕릉인 선정릉이 있다니…

by 즐풍 2021. 11. 6.

 

 

 

2021.10.29 (금) 11:00~12:20, 1시간 20분 탐방

 

 

볼일을 끝내고 가까운 선릉과 정릉에 들린다.

지난번에 방문했늘 때는 문을 닫는 월요일이라 볼 수 없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섰으나 탐방객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길 따라 천천히 걷는다.

 

 

□ 서울 선릉과 정릉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비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 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석인 등의 석물이 있다.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의 두 번째 왕비(제1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세 번째 왕비(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 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 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재실(齋室)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뿐이다.

                                                                                                                          [출처_문화재청]

 

 

 

 

먼저 들린 곳이 중종(11대)의 왕릉인 정릉이다.

 

 

 

제사를 지내는 정릉의 정자각

 

릉을 오를 수 없게 길을 닫아놓아 멀리서 찍은 사진이다.

 

지붕의 조형물을 잡상(雜像)이라 한다.

중국 명나라의  소설 「 서유기 」에 등장하는 인물과 토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이다.

잡상을 처마 마루에 올려 놓은 것은 좋은 일만 생기고 화를 막아달라고 염원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잡상'의 다른 명칭은 '어처구니'이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잡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건물을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올려놓는

어처구니를 깜빡 잊고 올려놓지 않아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란 말의 많은 유래 중 하나다.

 

 

 

정릉을 지나 발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긴다.

 

 

 

 

 

이 음지는 아직 단풍의 '단' 자도 안 보일 만큼 푸른색 일색이다.

 

 

 

노랗게 물든 활엽수림

 

 

 

 

 

 

 

 

 

 

 

정현왕후 릉이다.

이 릉은 옆으로 올라가는 길은 있으나 정면에서 볼 수 없다.

정현왕후 윤씨(1462~1530)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숙의)이 되었다.

1479년(성종 10) 당시 왕비였던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 중종반정 때 왕대비의 권한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친아들 중종의 즉위를 허락하였다.

69세의 나이로 경복궁 동궁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내문)

 

 

선릉

 

성종(1457~1494)은 세조의 손자이자 왕으로 추존된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의 둘째 아들이다.

1461년(세조 7) 잘산군에 봉해졌고, 1469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정희왕후의 명으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에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과 「대전속록」,

국가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를 완성하여 반포하였다.

선비들을 등용하여 기존의 훈구세력과 국정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38세의 나이로 창덕웅 대조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내문)

 

 

 

 

선릉 무인석

 

무인석과 문인석

 

 

 

 

 

비각 안의 비문(朝鮮國成宗大王宣陵)

 

 

 

대부분 왕릉의 정자각은 왕릉과 일직선이 되게 하며 세수를 차린 정자각 뒷문으로 릉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선릉은 이와 달리 각을 많이 틀어 릉이 보이지 않게 배치했다.

 

 

 

 

 

 

 

역사문화관을 들어가 정보를 더 얻고 싶었으나 코로나 시국이라 문이 잠겼다.

 

 

 

멀리서 이 검은 나무의 껍질을 보고 참나무와 달리 무척이나 야무지고 잘 생겼단 생각이 든다. 

다행히 고욤나무라는 표식이 있어 비로소 나무 이름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강원도나 이천, 일산에 살면서 고욤나무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주로 경기도 이남지역에서 자란다고 하는 데, 훨씬 북쪽인 이곳에서도 자란다.

고욤나무는 흔히 감나무를 접목할 때 대목용으로 쓰며, 목재는 여러 가지 도구의 재료로 쓴다고 한다.

 

 

확대한 모습이 아주 정교해 보인다.

 

화살나무에 든 단풍이 이렇게 예쁜 줄 처음 알았다.

정원수로 많이 심는다고 한다.

 

 

탐방을 끝내고 나오는 데, 40~50여 명이 길게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주변 사무실 직원들이 식사를 끝내고 산책 겸 탐방을 나온 것이다.

입장료가 1,000원이니 매일 온다고 해도 한 달이면 2만 원 남짓한 비용이다.

커피 서너 잔 값으로 심신의 건강을 챙길 수 있는 멋진 곳이다.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자 비씬 동네에 잠드셨는데,

선왕 이시어 너무너무 번잡하지 않으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