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_15
2022.2.16 수요일 오후에 탐방
오전에 이천 설봉산과 설봉공원 탐방을 마치고 오후에 세종대왕릉에 들어섰다.
여주역까지 갈 시간에 세종대왕릉에서 버스를 타는 게 빠르겠단 생각이었으나 너무 멀리서 내려야 한다.
한 정거장을 더 가 마지막 역인 여주역에서 이동하는 것보다 시간을 단축하겠단 의도는 빗나간 셈이다.
세종대왕릉이 시내와 떨어진 교외에 있다 보니 교통이 다소 불편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은 한 권역으로 묶여 있어 어느 쪽으로 들어가도 상관없다.
양쪽 모두 출입구가 있기 때문이다.
여주 근교에 있는 산은 높은 산이 거의 없고, 대부분 구릉처럼 나지막하다.
이런 산세 때문인지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인선왕후릉은 능을 크게 만들려고 봉분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인선왕후릉을 묶어 영·영릉으로 칭한다.
세종대왕릉은 영릉[英陵], 효종대왕릉도 영릉[寧陵]으로 한자만 다를 뿐 발음은 똑같다.
하여 영·영릉이라고 두 능을 따로 덧붙이지 않고 흔히 영릉이라고 한다.
각각 릉의 한자가 다른 걸 모르면 왜 영릉이라고 뭉뚱그려 말하는지 오해하기 십상이다.
세종대왕릉을 들어가기 전 광장엔 조선시대의 과학기구들이 복원을 거쳐 설치된 것은
양이 많아 별도로 포스팅했다.
영릉(세종대왕릉) 재실은 최근에 복원하여 기둥 색상이 별로 변하지 않았다.
효종의 영릉 재실과 거의 비슷한 형태이다.
천원지방을 의미하듯 사각의 연못 안에 원형의 낮은 잔디밭이 눈에 띈다.
연못에 물을 대기 위한 수로 출구를 품위 있게 만들었다.
세종대왕릉으로 들어가는 홍살문
□ 4대 세종(世宗)대왕
생몰 연도: 1397년 ~ 1450년, 재위 기간: 1418년 ~ 1450년
○ 생애 이야기
세종은 1397년(태조 6)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 일화
세종은 재위한 이듬해에 집현전을 만들어 많은 신진 학자들을 양성했다.
왕립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과학 기술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종의 행보에 힘을 실어 주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각별한 관계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어느 날 세종이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내시로 하여금 누가 밤늦도록 집현전에서 책을 읽고 있는지 보고 오라 명하였다.
이에 내시는 신숙주가 홀로 독서하고 있다 아뢰었다.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친히 집현전에 나가 그 광경을 살폈으나,
신숙주는 세종이 온 것을 모르고 계속 독서에 열중하였다.
세종은 새벽이 되도록 밖에서 글 읽는 소리를 경청하다 신숙주가 고단하여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추운 날씨에 독서에 열중한 신하에게 자신의 어의를 벗어 덮어주고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깨어난 신숙주가 자신의 등에 씌워진 어의를 보고서야 전날 밤 왕이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감복하여 왕의 침전을 향해 절을 하였으며 더욱더 학문연구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출처_세종대왕 유적관리소)
이번엔 홍살문 안에 정자각과 세종대왕릉을 함께 잡아 본다.
□ 영릉[英陵]의 구성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 1) 여주로 천장 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출처_세종대왕 유적관리소)
□ 영릉[英陵]의 역사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 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출처_세종대왕 유적관리소)
조금 더 가까워진 세종대왕릉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홍살문에서 들어오는 신도
지붕의 조형물인 잡상이다.
중국 명나라의 소설 「 서유기 」에 등장하는 인물과 토신(土神)을 형상화한 것이다.
잡상을 처마 마루에 올려놓은 것은 좋은 일만 생기고 화를 막아달라고 염원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잡상'의 다른 명칭은 '어처구니'이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잡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건물을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올려놓는
어처구니를 깜빡 잊고 올려놓지 않아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란 말의 많은 유래 중 하나다.
세종대왕의 영릉 표석
세종대왕릉을 당겨보지만, 너무 아래에서 찍다 보니 전부 잡을 수 없다.
왼쪽으로 돌아 오르는 곳이 있으나 이곳 역시 정면이 아니므로 영릉을 온전히 잡아낼 수 없다.
문인석과 무인석
석등과 문인석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함께 모신 합장릉이다.
릉을 내려와 정자각을 거쳐 효종대왕릉으로 이동한다.
세종대왕릉에서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길을 왕의 숲길이라 이름 붙였다.
구릉 사이 작은 재가 왕의 숲길이 되었다.
숲길은 이렇게 비포장인 데다 고즈넉스러운 게 걷기 좋다.
오늘따라 추운 데다 평일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이다.
드디어 효종대왕릉 홍살문을 지나게 된다.
17대 효종(孝宗)
생몰 연도: 1619년 ~ 1659년, 재위 기간: 1649년 ~ 1659년
○ 생애 이야기
효종은 16대 인조와 인렬왕후의 차남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간 머물렀다.
귀국 후인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후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 강화 등에 힘쓰며 청나라를 향한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1654년 러시아 ·청나라의 충돌 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강요로 오히려 그들을 도와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효종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기도 하였다.
1659년(효종 10) 41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 일화
1636년(인조 14) 청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여 불과 며칠 만에 강화도까지 점령하였다.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고 하는데,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다가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찧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다.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군대를 의지와 상관없이 큰 고생을 해가며 따라다녀야 했다.
게다가 조선과 우호적이었던 명나라가 점령당하는 것을 목격하여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반면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고, 조선의 외교관 역할을 하며 국제 감각을 키웠다.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는 귀국 후 급서 하였으며,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청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자들을 중용하여
은밀히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출처_세종대왕 유적관리소)
효종왕릉 정자각
일종의 창고이자 수복이 대기하는 장소
□ 영릉[寧陵]의 구성
영릉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 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의 능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출처_세종대왕 유적관리소)
□ 영릉[寧陵]의 역사
효종이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 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출처_세종대왕 유적관리소)
정자각과 비각 사이로 보이는 효종왕릉
정자각
비각
아래쪽 인선왕후릉
조선국 효종대왕 영릉을 전서체로 썼다.
이런 신도비 등은 대개 전서체로 쓰기 마련이다.
왼쪽 효종왕릉과 오른쪽 인선왕후릉
위로 올라와서 보는 인선왕후릉
효종왕릉
효종왕릉 정자각
효종왕릉을 끝으로 나가며 보는 재실
재실 정문
이곳에도 세종대왕릉에 있는 것처럼 작은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은 정원용이기도 하겠지만 화재가 발생하면 방화용으로도 쓰일 것이다.
외손이 태어나는 바람에 세종대왕릉을 다녀가며 손주도 지혜롭고 총명하게 자라라는 소망을 안고 방문했다.
어쩌면 총명탕을 다려 먹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겠다.
손주 이룬아,
세종대왕 님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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