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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별 탐방/제주도

구엄리 돌염전 가볼까?

by 즐풍 2020. 1. 19.



 


 


 

2019.09.11. 수  18:00 전후 약 30분 탐방  맑음

 

작은 아이와 만나 이호테우해변과 말등대를 보고 다음 기착지로 구엄리돌염전에 들린다.

내 여행 리스트에 들어있던 염전을 작은 아이도 보고싶어 했다.

녀석도 제주를 무척이나 좋아해 혼자서도 여러 번 다녀가고도 부족해 제주에 살고 싶다고 한다.

네가 의식주를 해결하면 가능하다고 하니 아무래도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제주에 살고 싶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굳이 산다긴기보단 제주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몇 달이라도 지내고 싶다.

어느 한 곳에 붙박이로 살기보다는 늘 이동하면서 저녁에 도착하는 곳이 숙소면 더욱 좋다.

그러기엔 캠핑카 구입이 최고인데, 월급생활자에게 그저 환상일 뿐이다.

 






구엄리 돌염전


고려시대 원나라와 싸우던 삼별초가 애월읍 고성리 항파두리에 주둔할 당시 토성을 쌓으며 주민을 동원했다는 문헌에 의해

고려 원종 12년에 적어도 마을이 생긴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명종 때인 1559년 강려 목사가 부임하며 천일염 제조 방법을 알려줘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마을에선 이곳을 '소금빌레'라고 부른다.

소금밭 길이는 해안을 따라 300m 정도로 폭은 50m로 넓이는 4,845㎡(약 1,500평)에 이른다.

봄, 여름, 가을에 생산된 소금은 색소 등 품질이 뛰어나 중산간 주민들과 농산물로 교환하기도 했다.

이 소금밭은 마을 주민의 생업 수단으로 약 390여 년 동안 삶의 근간이 되었다.

이후 의식구조와 생업수단의 변화로 1950년대에는 소금밭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안내문)




소금빌레


구엄마을 포구 서쪽에는 선조들이 돌염전으로 사용했던 평평한 천연암반을 이용해 소금을 생산했다.

그곳을 소금빌레라고 불렀는데, 빌레란 '너럭바위'라는 제주 말로 소금빌레란 소금밭, 즉 돌염전이란 뜻을 담고있다.

이곳 소금빌레 1,500평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양은 1년에 약 17톤 가량이었다.

소금밭은 일정 양 개인 소유가 인정되어 매매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육지의 밭에 비하여 가격도 훨씬 높았다.

가구 당 20~30평 내외로 소유하였고 큰딸에게만 상속해주는 풍속도 생겨났다.  (안내문)


















구엄리돌염전


구엄리에서 시작하여 고내리 까지 ‘엄장해안길’이라는 ‘해안누리길’이 조성돼 있다.

구엄리의 포구를 지나면 만나는 구엄리 돌염전은 넓게 드러누운 현무암 위에 소금을 생산하던 곳이다.

'소금빌레'라고도 일컬어지는 구엄리의 돌염전은 구엄리 주민들이 소금을 생산하던 천연 암반지대였다.

빌레란 제주어로 '너럭바위'를 뜻하니 소금빌레란 소금밭, 즉 돌염전이란 뜻을 담고있다.  (제주비짓)








조선 명종 14년인 1559년 강려 목사가 부임하면서 구엄리 주민들에게 소금을 생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넓은 바위 위에 찰흙으로 둑을 쌓아 고인 바닷물이 햇볕에 증발해 생긴 소금 채취 방식으로 구엄마을의 주요 생업의 터전이다.

소금밭은 약 390여 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생업의 터전이자 삶의 근간이 되어왔다.

품질이 뛰어난 천일염이 생산되다가 해방 이후 폐기되어 지금은 소금생산을 하지 않는다. 

2009년에 제주시가 예산을 투입하여 돌염전을 일부 복원하고 관광안내센터와 주차장 등을 설치하였다.

돌염전의 유래, 소금의 생산 방법 등 안내판을 설치하여 생소한 소금 생산방식과 돌염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비짓제주)











돌염전은 파도가 들이친 다닷물이 고여야만 소금 생산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선 태풍이 들이치거나 물을 지고 갔다 부어야 한다.

빗물이 섞이지 않게 비가 올 땐 위에 이엉을 덮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천일염은 일제 강점기인 1907년 처음으로 인천에 시험용 염전이 설치된 이후 서해안에 집중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그 전엔 구엄리 돌염전을 제외하면 바닷물을 끓이는 자염 방식으로 소금을 얻었다.

구엄리 돌염전은 조선 명종 때인 1559년 강려 목사가 생산 방식을 알려줬다니 일제 보다 빠른 천일염 생산이다.

구엄리 염전이라고 해봐야 면적이 크지 않을 테니 생산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전엔 타일이 없었으니 염전을 만들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다.

지금이야 방수가 잘 되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천일염을 편리하게 생산할 수 있다.

그마저 값싼 중국산 농산물에 이어 천일염까지 밀려들며 서해안 천일염은 점차 자리를 잃어간다.

중국산 먹거리 문제는 국민 건강에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암반 한 가운데 이렇게 모래 바닥인 공간도 있다.




















구엄리 해안에도 작은 주상절리가 발달했다.















한때 돌염전은 생활의 터전이자 열악한 노동 현장으로 한이 서린 곳이겠지만, 지금은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해안 어딜 가나 낚시꾼은 늘 있기 마련이다.















이 바위 아래 넓은 공간이 있어 그 틈으로 바닷물이 들어온다.










이 바위 아래 굴이 물이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석양 무렵이나 구름에 가려 낙조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다.










강화도가 가까워 가끔 염전을 지날 때도 있었다.

강화도 소금은 다른 천일염에 비해 단맛이 강하다고 한다.

이젠 강화 소금도 중국산에 밀려 거의 생산하지 않으니 애호가로서 많이 아쉽다.

예전에 아는 형님이 강화 소금을 솥에 구워 불순물을 다 날린 걸 줘 한동안 요긴하게 간을 해 먹었다.

점점 몸에 좋은 소금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산다.





궁금했던 돌염전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방법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지 알게 되었다.

소나무를 수없이 많이 벌목하던 자염 방식은 근대에 들어서야 천일염으로 대체되며 생산량도 크게 증가했다.

제주 구엄리 돌염전은 서해안 천일염에 비해 거의 350여 년 빠른 천일염 생산방식이다.

조상의 슬기가 돋보이는 돌염전 탐방을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