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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산성·고인돌·고분 등

'23년 남한산성 수어장대 주변의 단풍 풍경

by 즐풍 2023. 11. 2.

2023_174 A

 

 

2023. 10. 29. (일)  07:45~14:10, 6시간 25분 산행, 휴식 1시간 포함, 14.6km 이동

 

 

요즘은 며칠 바쁘게 보냈다.

어제는 날씨가 좋다기에 북한산성을 가려고 했으나 형님과 시제를 다녀왔다.

하여 하루 앞당겨 금요일에 북한산성을 순성 했다.

날씨 좋은 오늘을 무참히 흘려보내기 아까워 남한산성으로 나들이를 나섰다.

 

10여 년 전만 해도 단풍철이 1주일 정도 빨랐는데, 기후변화로 점점 늦는다.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에 문의하니 주말이 단풍 절정이라기에 늦기 전에 도착한 것이다.

사실 단풍은 핑계고 산성에 관심을 갖은 이후 처음으로 남한산성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벌봉에서 이어지는 외성을 제외한 5코스를 돌아볼 생각이다.

 

 

남한산성 5코스 등산 구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에서 제시하는 5코스는 동문부터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즐풍은 주말에만 운행하는 9-1번 버스를 타고 남문에서 하차해 시계 방향으로 돌며

가급적 거리를 줄인다.

남문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비석군이다.

 

 

난한산성 비석군 (碑石群)

 

남한산성 비석은 의대 광주유수, 수이사, 부윤, 군수들의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석명, 뒷면에는 건립시기 및 관련자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곳 비서들의 원 위지는 남한산성 행공 주변이었다.

남한신성 행궁 복원 사업으로 현 자리로 옮겼으며, 이 비들을 통해 세계유산 남한산성 통시경관의

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안내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 터를 활용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하였습니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 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기 때문에 백성과 함께 왕조가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이 이루어졌고, 이런 무기 체계의 발달은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하는데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바탕으로 한 등재기준(i)부터 (vi)까지 중 한 가지 이상을 충족해야 하며, 이와 더불어 완전성, 진정성,

보존 관리를 중점적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남한산성은 OUV 기준(ii)과 기준(iv)에 부합하는 문화유산입니다.

 

남한산성은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릅니다. 

이것은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기록상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병자호란 등의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축성기술의 모습들을 발달단계별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었습니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이 있을 때, 임금은 한양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있는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하여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출처_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남문 南門•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며 지화문으로 이름을 지었으며 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Nammun (South Gate)

 

Nammun was the grandest and most important of all the gates at Namhansanseong and it

is still the most used for entry.

From prior records, it appears that the gate existed before King Injo had the fortress built in 1624.

It was rebuilt with the fortress renovations in 1779. It's the only gate with the original name plaque still in place.

King Injo entered the fortress though this gate when taking refuge from the Manchu invasion of 1836.

                                                                                                   (안내문)

 

 

지화문 至和門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4대 문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450년 추정,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안내문)

 

 

호국정신과 선비정신이 깃든 남문 앞 역사터 안내


남한산성은 한성 백제시대의 성산이요 진산의 개념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 숭열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호)이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으로 불렸으며 한강유역의 중요 산성으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는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국방의 요새지이었다.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임금 원년(1623)에 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1626년에 완성(본성의 둘레가 9.05km)

하니 남한산성은 경도보장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8m)을 중심으로 4대문과 18 암문을 완성하고 성내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수어장대 등 각종 문화유적이 남아 있고, 현재는 경기도 도립공원 (국가사적 제57호)으로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광주시 등 4개 지방자치 단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하여 있으며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으며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문이다.

인조 14년에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으로 인조임금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다.

 

「남문 앞 역사터」는 성남시가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2007. 5. 15부터 약 6개월간의 공사로 2007. 11. 19

준공하였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380여 년 된 느티나무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받는 남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성남시 보호수인 느티나무(4주)는 성곽방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남문을 시각적으로 차폐하기 위하여

식재하였을 가능성과, 성문 주변이 평상시 왕래가 많고 지형상 경사가 심하여 우수 시에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식재하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역사터다.  (안내문)

 

남문인 지화문 누각

 

 

단풍 상태를 보면 오늘이 절정인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산행하기엔 쉽고 산책하기엔 조금 까다로운 산이다.

5개의 탐방 코스가 있는 데 외성까지 길게 잡으면 코스 하나를 더 만들 수 있겠다.

 

 

이곳은 소나무가 여장에 걸릴 만큼 가까이 내려왔다.

 

 

롯데타워가 제법 가깝게 보인다.

 

 

성벽을 복원한 게 흰색으로 보인다.

저렇게 두 줄과 뭉쳐서 무더기로 복원하는 것도 대단한 기술이다.

 

 

 

 

봄 맞이 한다는 영춘정

 

 

 

 

 

남한산성 수어장대 南漢山城 守禦將臺

보물, Treasure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있어 본래 서장대라고 불렸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천부사)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영조 27년(1751)년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현종 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중수하였는데,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 2품 상사에 해당하였다.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 군영의 하나로,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삼청동, 팔판동,

화동의 일부)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다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 19년(1795)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였으나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장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는 여러 문현에 등장하는데, 그중 조선 숙종의 정비 (正妃)인 인경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

「서장대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이다'

 

Sueojangdae Command Post

 

A command post, called jangdae, is the center from which a military commander would direct soldiers during

military drills and war.

Namhansanseong Fortress had a total of five command posts, only one of which remains.

Sueojangdae Command Post was first built in 1624 as a single-story structure and was known

as Seojangdae, meaning "Western Command Post" as it stood in the western part of the fortress.

In 1751, the local magistrate Yi Gi-jin (1687-1755) rebuilt the command post as a two-story structure

and renamed it Sueojangdae, meaning "Command Post of the Defense Commander."

The command post was rebuilt again in 1836 by the local magistrate Bak Gi-su (1792-1847),

who had his older brother Bak Ju-su calligraph the building's name plaque.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re were five military offices in charge of the defense of the

royal capital. Among them was the Office of the Defense Commander.

The headquarters of this office was originally located in today's jongno-gu, Seoul, and its jurisdiction over Namhansanseong Fortress was exercised through the magistrate of Gwangju.

However, in 1795, the headquarters of the Defense Command was relocated to Namhansanseong Fortress

to improve its effectiveness.

Since then, the magistrates of Gwangju also took on the duties of Defense Commander.

Sueojangdae Command Post was designated as a Gyeonggi-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in 1972

and was designated as a Treasure in 2021.

When Namhabsanseong was inscribed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in 2014, this command

post was also recognized for its outstanding universal value as an integral component of the fortress's

military landscape.   

                                                                (안내문)

 

 

수어장대를 오르면 팔달산성의 정상을 오른 느낌이다.

외성에 해당하는 봉암성 인근이 남한산 정상이지만,

내성으로는 수어장대가 청량산 정상이니 사실상 남한산성의 정상인 셈이다.

 

수어장대와 무망루

 

 

 

 

 

무망루 (無忘樓)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 (廣州留守 李箕鎭)이 중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內便) 

문루로서 그 편액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하여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물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별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 지은 것이다. (안내문)

 

작은 누각에 설치된 무망루 편액

 

 

 

"한양 남쪽의 상비군, 수어청"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문과 남문 사이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휘소 겸 적정 감시시설입니다.

특히 남한산성 방위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수어사는 조선시대 군사제도인 5 군영 제도 중 하나인

수어청의 수장이기도 합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하는데요.

그래서 전쟁 중에 설립된 기관이 훈련도감입니다. 훈련도감은 전쟁에 꼭 필요한 상비군을 훈련하고 유지

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이 훈련도감과 함께 4개의 지방 상비군이 설치되는데 그중 남한산성에 설치된

군영이 바로 수어청입니다.

조선은 훈련도감 설치 이후 수도 한양을 방위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화기를 사용하는

총포군을 양성할 수 있는 어영청을 설치합니다. 다음으로 한양의 북쪽을 방어할 충용청을 설치합니다.

북한산성의 총융청의 본부는 한양에 적군이 진입하기 전 북한산성에서 격퇴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다음 설치된 것이 바로 남한산성의 수어청입니다.

마지막으로 설치된 왕의 직할부대 개념의 금위영까지, 5 군영 체제는 조선후기까지 이어지는 핵심 군사제도였습니다.

                                                                              (안내문)

 

 

수어장대 옆 소나무는 근사하지만 사진이 품위를 살려주지 못한다.

 

 

청량당 淸涼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Gyeonggi-do Tangible Cultural Heritage 

 

청량당은 남한산성의 축성과 관련한 민간 신앙처로서 마을의 신을 모시는 신당의 성격을 갖고 있다.

10명의 무속 신 가운데 이회 장군도 있는데, 이회는 조선 인조 2년 남한 산성을 축성할 때 동남쪽 부분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회는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날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는 억울한

모함을 받아 처형당한다. 그의 처첩도 삼남(경상, 전라, 충청) 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모아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하였다.

그 후 이회의 무고함이 밝혀져 사당을 짓고 넋을 달래게 하였는데, 이회를 도당신으로 모시게 된 것이

도당굿의 기원이다. 도당굿의 핵심 절차는 산성을 한 바퀴 토는 산성 돌기였다.

이는 축성의 의미를 되새기고, 조상들의 고역과 죽음 등 조상들의 삶과 우리 역사를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청량당은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민속 경관(민간신앙)에 해당한다.

                                                                                                          (안내문)

 

 

청량당 이야기

• 남한산성의 주민들을 지키는 수호신 이회 장군

 

청량당은 이회 장군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주민들이 신으로 받들어 모실만큼 이희 장군은 남한산성의

역사에서 특별한 인물입니다. 설화에 따르면 이희 장군은 성의 남쪽 설벽을 쌓는 도중 공사비를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남한산성 서장대 앞에서 참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구명 성금을 모으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던 아내 송씨 부인은 사형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쌀을 여울에

모두 던지고 자신도 투신하고 맙니다. 나중에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이회 장군이 쌓은 남쪽

성벽은 미완성이나마 견고하게 축성된 것이 밝혀졌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희 장군의 설화가 사실과 가상을 잘 섞어 재창조되었다는 점입니다.

열심히 산성을 쌓았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결국 처형을 당한 이희 장군의 전설은 성을 쌓은 백성들의 삶에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신성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이회 장군은 산성을 쌓은 수많은 백성들의 공감을

얻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것입니다.

                                                                               (안내문)

 

 

① 수어장대,  ② 청량당,  ③ 무망루

 

 

수어장대 주변의 성벽 약 300m 정도는 공사 중이라 휀스를 쳤다.

 

 

 

 

 

가을엔 이렇게 단풍 든 산성길을 걷는 게 좋다. 날씨도 좋은 데 단풍까지 멋지니 더 좋다.

 

 

서문을 만나며 아래로 내려가 잠깐 바깥까지 나가볼 생각이다.

 

 

서문인 우익문 안쪽

 

 

 

 

 

 

서문 西門 右翼門

 

남한산성에는 동•서 • 남 •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서문은 4개의 대문 중 규모가 가장 작고, 산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3년(1779)에 다른 문과 같이 개축하며 우익문이라 칭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서문이 행궁 우측에 있어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나간 바로 그 문이다.

남한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수송이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SeomUn (West gate)

 

It appears that Seomun(West gate) was part of the original fortress and it was restored in 1779,

and renamed "Right Side Gate" since it was on the right when facing south from the secondary palace.

In 1637, King Injo and the Crown Prince went through this gate to surrender to the Manchus.

The slope on the west side of the fortress was too steep for provisions to come through,

but those were easily sent through from Gwangnaru or Songpanaru ferry landings.

                                                                                      (안내문)

 

남문인 지화문은 편액이 양쪽으로 걸렸는데, 우익문은 바깥쪽만 걸렸다.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습니다.

한양의 4대문처럼 남한산성의 4개 문은 좌익문(동문), 우익문( 서문), 지화문(남문), 전승문(북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한양 도성의 문 이름들과 비슷하지요?

가장 크고 넓은 문이 지화문입니다.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성문입니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입니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내문)

서문 밖의 성벽

 

 

서문에 들어선 탐방객이 풍경이 멋진지 사진에 담고 있다.

 

 

 서문

 

 

 

 

 

 

 매탄터 埋炭址

 

매탄터는 병자호란 때 혹독한 추위 속에서 전쟁을 치른 후 유사시 방어에 필요한 숲을 물어둔 곳이다.

보통 군포 근처, 군기고와 영고 주변에 소금과 숲을 묻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중간 부분에 지름 5m,

깊이 1m 정도의 구덩이가 파인 것이 이곳에 매장되어 있던 목탄을 태우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

「중정남한지」에 따르면 북장대 군포 앞에서부터 성내 각 사찰에 이르기까지 숯을 묻어둔 곳이 94곳이고

숯은 24,192석이라 기록하고 있다.

매탄터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매탄)에 해당한다.

 

Charcoal-Buried Storage Site

 

This is one of the sites within Namhansanseong where charcoal was stored underground in case

of emergency. In the aftermath of the month-and-a-half long siege of the fortress by the Manchu

army in the severely cold winter of 1637, it was decided that salt and charcoal would be stored

near guard posts, armories, and storehouses to be used as fuel in case of war. According to

the Town Chronicles of Gwangju-gun County, compiled in the late 19th century, charcoal was stored

at 94 locations throughout the fortress.

This site consists of a pit measuring 5 m in diameter and 1 m in depth.

The pit is presumed to have been formed during the process of burning the wood charcoal that was stored here.

When Namhansanseong was inscribed on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in 2014, its various structures were classified as part of its military, governing, or folk landscapes.

This site was recognized as an integral component of the military landscape.

                                                                                                                                (안내문)

 

병자호란이 하필이면 엄동설한인데 의복이나 신발, 장갑도 변변치 않던 시절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모르긴 해도 추위에 약한 즐풍이 보초를 섰으면 얼어 죽었을 것이다.

그때의 추위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숯을 묻어 비상시에 쓸 요량이었다니 너무 늦은 준비물이다.

 

 

성벽 아래엔 조명시설이 있으니 야간에 보는 야경도 제법 멋지겠다.

 

 

전에 보이지 않던 연주봉 옹성으로 가는 용도가 새로 생겼다.

그림이 멋지니 안 갈 수 없다.

 

 

이 암문을 통과해 나간다.

 

 

 

연주봉 옹성 암문(제5암문)  連珠峰 甕城 暗門(第五暗門)

 

암문은 일종의 비밀통로로 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된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연주봉 응성 암문은 폭 95cm, 높이 180cm로 성 바깥 연주봉 옹성으로 연결된다.

암문 안쪽은 평거식(직사각형)이고 바깥쪽은 홍예식(아치형)이다.  (안내문)

 

밖에선 인증사진을 찍고...

 

 

 

 

 

용도가 제법 길게 이어진다.

 

 

옹성에서 바라본 건너편 능선의 단품

 

 

용도 끝에서 만난 옹성은 무척이나 작다.

옹성에 앉아 데이트를 하던 40대 남녀가 사진 좀 찍어 달라며 폰을 건넨다.

4:3 화면인 구글폰이라 아이폰 유저인 즐풍이 16:9 화면으로 전환해 달라고 하니 모른다고 한다.

즐풍이 잠깐 동안에 풀화면으로 바꿔 사진을 찍어 주고 화면 전환 방법을 알려줬다.

젊은이가 폰카를 찍을 줄만 알지 화면을 크게 변환하는 방법을 몰라 연장자가 알려줬다.

 

 

옹성의 여장 아래에 설치된 포좌

 

 

옹성 탐방을 끝내고 다시 홍예문의 암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선다.

 

 

 

 

 

 

금림조합 • 남한산성의 귀중한 술을 지켜 후손에게

 

남한산성의 산림은 매우 잘 보존되어 온 아름다운 생태유산입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산성 내의 숲을 보호하고자

하는 산성 주민들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근대화 이전의 생활연료는 나무였기에 20세기

초반에 대부분의 산들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산성 안의 나무들은 예외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 순산원을 두고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택에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금림조합은 남한산성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산감(山監 산림

감시원) 50명을 선출하여 매일 6명씩 교대로 산림을 감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산감은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하였기에 숲을 보호함과 동시에 취약계층의 구제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한산 금림조합의 노력은 이후 2016년까지 90년에 가깝게 지속되어 왔으며, 덕분에 남한산성은 귀중한

생태문화자원을 잘 보전하여 후손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안내문)

 

 

북장대터 北將臺址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 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이 북장대라 불린 것은 성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북장대는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 수축 시에

단층 누각으로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수어청에 소속된 5 영 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남한산성의 장대는 18세기 초에 붕괴되었고,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이었으나

북장대와 농장대는 다시 수축하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 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인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북문 전승문 北門 全勝門 

 

남한산성에는 동  서 • 남 •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락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3년(1719)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한 것은 그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Bukmun (North Gate)

 

Bukmun was used to launch attacks from the fortress during the Manchu siege.

According to the record, 300 soldiers went through the gate to attack the Manchus

but fell into a trap and were annihilated in the greatest fight and loss of troops during the siege.

During the rebuilding of 1779, the gate was renamed Jeonseungmun or "Battle Victory Gate"

with the meaning to never forget the loss. The gate is thought to have been built in 1624.

                                                                                                         (안내문)

 

 

 

저녁을 먹으며 뉴스를 보니 " 2021년부터 시작한 남한산성 북문 해체·보수공사 완료로 11월 1일부터

남한산성 북문이 전승문이 개방된다"고 한다.

즐풍이 3일 전인 10월 29일에 다녀올 때도전승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다행히 복원을 끝내고 임시로 열어놓은 걸 먼저 본 것이다. 어쩐지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남한산성을 진작에 다녀왔으나 강화도 여행기에 밀려 뒤로 미뤘다.

그러다가 단풍철이 지나면 너무 늦겠단 생각에 남한산성 포스팅을 꺼내 들었다.

워낙 사진이 많은 걸 추려냈어도 150장이 넘는다.

한 번에 50장씩 세 번에 나누어 게시할 생각인데, 카메라 AS를 접수해야 하니 시간이 더 걸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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