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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한양도성 순성 ② 백악산 구간

by 즐풍 2023. 9. 23.

2023_147 

 

 

2023. 9. 19. (화) 07:43~18:57(9시간 6분 순성, 휴식 2시간 8분 포함) 22.7km 순성

                     백악산 구간 10:48~13:24(2시간 36분, 휴식 40분 포함) 4.8km

 

 

오늘 순성 하게 될 서울 한양도성 중 제일 어려운 구간인 백악산에 들어선다.

숙정문을 잠시 살펴보고 마의 구간인 백악산 구간을 오르는 데, 더위도 한풀 꺾인 참이라 별 어려움은 없다.

지난 7월 초에 이곳을 오를 땐 폭염에 지쳐 두 번이나 쉰 끝에 겨우 오른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코 끝이 떨어져 나갈 만큼 추워도 겨울 산행은 움직이면 덥기에 여름보다 훨씬 수월하다.

 

백악산을 오르는 게 지난 7월에 비해 쉽기는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피하고 싶은 계단 지옥이다.

그런데도 하산 코스로 잡지 않는 것은 계단이 높아 무릎에 무리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두 살 나이가 들어갈수록 근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기본 체력이 약하니 이젠 산책 수준의 쉬운 산행을 해야 하는 데, 가끔 무리하다 보면 대미지가 크다.

 

 

서울 한양도성 순성 코스와 백악산 구간

 

요즘 젊은 사람들은 1968년 1월 21일 북괴군이 남한에 침투에 청와대로 이동하면서 우리 군경과 격전을 치른

끔찍한 일은 잘 모를 것이다.

그나마 이곳을 산행하게 되면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최규식 경무관, 정종수 경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 1-1

 

최규식 경무관은 1931년 9월 9일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961년 경찰에 투신하여 1967년 10월부터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하였다.

서장 재직 중이던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 공비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파주 지역에서

남하 중이란 첩보를 접수하고, 이를 막기 위해 경찰관들을 현장에 배치하고 지휘하였다.

무장공비 일행이 청와대 바로 옆(현재 청운실버센터 앞)에 이르렀을 때 최규식 서장이 그들을 검문하며 막아섰고,

검문을 통과할 수 없었던 공비들이 외투 속에 감추고 있던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최규식 서장은 가슴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면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러한 헌신과 희생으로 공비들의 청와대 쪽 진행을 완전히 저지할 수 있었다.

그는 특정 지역을 관할하는 치안 책임자로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임무를 완수하였기에 정부는

경무관으로 추서하고 태극무공 훈장을 수여하였다.

 

정종수 경사는 1935년 7월 17일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60년 경찰에 투신하여 종로경찰서 재직 중이던

1968년 1• 21 사태 시 최규식 경무관과 함께 무장 공비와 교전 중 순국하였다.

이에 정부는 경사로 추서하고 화랑 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무장 공비의 침투를 몸을 던져 저지한 곳에 표석을 마련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이 바라보이는 이곳 자하문 고개에는 동상과 추모비를 세워 드높은 애국 충절을 기리고 있다.

                                                                                                                   (안내문)

 

 

 

 

 

창의문 Changuimun Gate

지정번호: 보물, 시대: 1396년(태조 5)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이 만나는 곳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에 지어진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41년(영조 17)에 다시 세운 것으로,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문루에 걸어 놓았다.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의 승경지인 자하동과 비슷하다고 하여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린다.

 

Changuimun is the north-west gate between Mt. Inwangsan and Mt. Baegaksan.

It is the only gate among the four small gates whose gate pavilion has survived to the present day.

This pavilion was destroy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and was rebuilt in 1741.

Changuimun is now also known as Jahamun, since the scenery around the gate seems similar to that of beautiful Jahadong in Gaegyeong, the capital of the Goryeo Dynasty.  (안내문)

 

 

창의문 안쪽에 있는 홍예문 상단에 닭을 조각해 놓았다.

다른 팀을 안내하는 해설사 님이 안내하는 말을 들어 보니 백악산이 지네 형상이라 상극인 닭을 조각한 것이라 한다.

한양도성으로 들어오는 액운을 미리 막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서울 관악산의 화기가 경복궁까지 미쳐 화재가 발생한다고 보아 경복궁 앞에 해태상을 설치한 것과 같은 이치다.

 

밖에서 보는 창의문

 

창의문 입구는 양쪽으로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는 게 아쉽다.

 

 

창의문 안내소 Changuimun Information Center

 

북악산 일대의 한양도성은 1단계로 2006년 4월 1일에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 (1.1km) 구간을 개방하였고,

이후 2007년 4월 5일에 와룡공원-숙정문-청운대-백악마루-창의문(4.3km)의 나머지 백악구간을 전면 개방하였다.

 

Mt. Baegaksan Area was opened in two phases. The 1.1km section connecting Hongryeonsa Temple,

Sukjeongmun Gate and Chotdaebawi Rock was opened to the public on April 1. 2006.

It was then extended to a distance of 4.3km from Waryong Park, Sukjeongmun Gate, Cheongundae (안내문)

 

 

 

서울 한양도성 Hanyangdoseong, the Seoul City Wall

首尔汉阳都城, 시대: 1396(태조 5)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1396년(태조 5)에 백악(북악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쌓은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래도록(1396~1910, 514년) 성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이다.

한양도성의 성벽에는 낡거나 부서진 것을 손보아 고친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성벽 돌에 새겨진 글자들과 시기별로 다른 돌의 모양을 통해 축성 시기와 축성 기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소의문·광희문·창의문)을 두었는데,

이 증 돈의문과 소의문은 없어졌다.

2014년까지 한양도성 전 구간의 70 %가 옛 모습에 가깝게 정비되고, 숙정문·광희문·혜화문은 다시 세워졌다.

                                                                                                         (안내문)

 

백악산을 오르는 구간의 여장은 대부분 현대에 들어서며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간간히 이렇게 퇴색된 성돌은 예전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백악산은 청와대 뒷산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왕궁을 감싸는 뒷산이라 여느 곳보다 한양도성의 상태가 좋다.

 

자북정도(紫北正道) 표지석 옆으로 백안산을 관리하던 경찰이 주둔하던 시설이 남아 있다.

청와대가 용산으로 이전하며 일반에 공개되며 후 이곳을 지키던 경찰도 철수했다.

 

 

 

예서 성벽 위에 여장이 설치되며 이곳의 높이는 대략 5~6m 이상 높다.

 

 

 

 

 

 

 

 

 

 

1.21 사태소나무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 군부대군부대 소속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센터(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현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 사태 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무장공비 일당은 당시 청와대 및 주변시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침투 간 아군복장과 민간복착용, 

취객으로 위장하는 등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도발을 자행하였다.
1월 21일 교전 후 14일간 작전 결과 침투한 31명 중 28명 사살, 2명 도주, 1명을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68.4.1)이 창설되었다.

 

January 21 Incident Pine Tree

on 21st of January 1968, The squads from Unit 124 of North Korea (Including Kim Shin - Jo) slipped into Seoul with the intent of attacking Cheong Wa Da (the Blue House).

And there was a fierce firefight between Republic of Korea forces and 31 heavily armed commandos in front of Cheongun-dong (At this moment Cheoung Retirement House is located).

After the fight, the squads fled to Mt. Bugak and Mt.

Inwang. At the time, 15 bullets were found embeded in a pine tree and the tree has been called the "1-21 incident Pine Tree" ever since. (안내문)

 

 

한양도성 성돌 각자

 

해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순조 4년(1804) 10월 오재민이 공사를 이끌었고, 공사의 감독은 이동한이 담당했으며, 

전문 석수 용성휘가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이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Interpretation:

This inscribed stone states that in October 1804, the fourth year of King Sunjo's reign, foreman O Jae-min headed the work to repair the wall, Yi Dong-han supervised the work and stonemason, Yong Seong-hwi, participated in it.

An inscribed stone refers to stone blocks where records related to construction are carved in stone.

The types of inscribed stone remaining in Hanyangdoseong, the Seoul City Wall, include a stone marking the wall section with letters from the Thousand Character Classic (14C);

a stone on which regions that took charge of construction are carved (15C); and a stone where the names of officials who were in charge of construction and stonemasons are inscribed (18C and later).

In Hanyangdoseong, there are more than 280 such inscribed stones of various dates and types.

 

 

解读:

该刻字城石表示纯祖四年 (1804) 10月, 由吴再敏总管城墙修缮工事, 李东翰担任督官. 专业石匠龙圣辉参与工事.

“刻字城石” 指的是刻有与筑城相关记录的城石, 汉阳都城的刻字城石大致可以分为三种, 分别为用千字文中的文字表示筑城区段的刻字(14C), 刻有负责筑城的地方名字的刻字(12C), 还有刻有负责筑城的官吏和石匠名称的刻字(18C以后).

据传, 汉阳都城内现存这种不同时期和类型的刻字城石280块以上. (안내문)

 

 

백악산 정상은 오르지 않고 바로 청운대로 내려선다.

그곳엔 해설사 한 분이 백악산의 한양도성에 대하여 설명 잠시 함께 이동한다.

 

 

 

용트림하듯 한 바튀 돌며 오르는 소나무 가지가 특이하다.

 

청운대에서 숙정문 사이의 성벽 길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주변을 운치 있게 만들며 그늘을 만들기도 한다.

 

 

 

 

 

성돌의 글자가 안 보여 모조품을 만들어 전시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Inscribed Stone in Hanyangdoseong, Seoul City Wall 漢陽都城 刻字城石 

咸豊元年 九月日 監官 鄭仁〇看役 高錫豹 邊手 金振聲

(함풍원년 구월일 감관 정인 0 간역 고석표 편수 김진성)

 

각자성석은 성을 쌓는 과정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이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각자(14C)와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각자(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각자(18C 이후)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에 만들어진, 다양한 유형의 각자성석이 290개 이상 남아 있다. 

이 각자성석에는 철종 2년(1851) 9월 정인0이 공사를 감독하고 고석표가공사를 돌보았으며, 

석공 김진성이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Inscribed stones refer to stone blocks on which records of the wall construction are engraved.

The types of inscribed stones of Hanyangdoseong include: the ones from the 14C bearing the wall section in the Thousand Character Classic; the ones in the 15C where the names of areas that took charge of construction are carved; and the ones after the 18C where the names of officials and stonemasons in charge of construction are inscribed.

This inscribed stone states that in September 1851, the second year of King Che-oljong's reign, the wall was repaired with the participation of Jeong In-O as a supervisor, Go Seok-pyo as an engineer, and Kim Jin-seong as a stonemason.

 

 

列宇城墙石破是指刻有筑城相关记录的城墙石砖。汉阳都城保存下来的刻字城墙石砖以千字文的文字刻制而成,所刻内容分为三类,分别是标记筑城区段

(14世纪)、标记负责筑城的地方的地名(15世纪)、标记负责筑城的官吏和石匠的姓名 (18世纪以后)。这里的刻字墙砖的内容是朝鲜哲宗二年(1851年)9月,在郑仁口督查、高锡豹监管下,专业石匠金振声参与了城墙修缮。

 

 

 

숙정문(肅靖門) Sukjeongmun Gate

시대: 1396년(태조 5)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처음에는 이름이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후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었다. 

현존하는 도성의 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며, 1976년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Sukjeongmun is the north gate.

It is the only remaining gate whose sides are still connected with the wall. Built in 1976, the gate pavilion was newly added to the wall.

 

肃靖门是汉阳都城的八个城门中朝北的大门,现存的城门中唯一和左右的城墙相连。 (안내문)

 

 

 

 

 

 

 

한양도성을 순성 할 때 이 계단을 딸가게 되면 점점 와룡공원과 멀어지게 되어 한양순성을 끝내기 어렵다.

성벽을 오를 때 이 계단 위로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는 육교를 건너야 와룡공원으로 나가게 된다.

지난번에 이 계단을 바로 통과하면서 길을 놓쳤다.

 

이렇게 성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중간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성 안의 길은 한참이나 돌게 된다.

 

성 밖으로 나가는 길 

 

드디어 성 안과 밖이 연결되는 통로다.

이 공간으로 나가면 바로 와룡공원의 와룡정과 만나게 된다. 여전히 성 밖으로 좀 더 전진한다.

 

 

 

성 밖 마을의 모습

 

여기서 성 밖으로 순성 할 때 제법 많이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암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간다.

 

성 안과 밖은 제법 높낮이 차이가 많다.

그만큼 성벽이 높으므로 한양도성의 구실을 제대로 하는 셈이다.

 

빈집을 헐어내고 임시주차장을 만든 곳 옆집 벽에 벽화를 그려놓아 운치를 더했다.

 

 

그림은 성북동의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표현했다는 안내문이다.

성북동이 한자는 성(한양도성인 城) 북쪽에 위치하여 城北洞이란 이름이 생겼기에

지난번에 이곳 한자가 틀렸으니 수정하라고 성북동주민센터에 건의했는데, 여전히 그대로이다.

이런 안내문을 게시할 때는 사전에 검수를 제대로 해야 하는 데 미진한 점이 많다.

 

한양도성 순성은 인왕산이나 북악산은 제법 산행다운 산행을 해야 하는 구간이다.

나머지 낙산과 남산은 산으로 치긴 하지만 나지막하니 산행의 부담은 별로 없다.

한양도성의 내사산(內四山)으로 통칭되는 네 개의 산을 중심으로 가장 어려운 인왕과 백악을 끝냈다.

나머지 구간 역시 산을 중심으로 개별적인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