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_173
2021.12.28 (화) 09:42~12:40(3시간 탐방) 7.5km 이동 흐림
올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지난 주말은 꼼짝하기 싫어 쉬었다.
영하 10℃ 이하로 떨어지고 습도가 70% 이상 오르고 바람이 제법 불면 상고대가 형성된다.
이런 산은 대부분 고산인 설악, 지리, 덕유, 소백, 태백산 정도이다.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주변의 산을 검색하니 상고대가 필 산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마저 쉬면 너무 많이 쉰다는 생각에 오전에 맑겠다는 수원화성으로 떠난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너무 늦게 수원화성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산으로 가긴 싫고, 낮은 산을 낀 수원화성은 오전에 맑을 때 후딱 해치울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지하철 차창 밖으로 보이던 맑은 하늘도 현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구름이 빠르게 하늘을 덮고 있다.
□ 세계문화유산 역사적 가치 수원화성(사적 제3호)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 18년(1794년)에 축성 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으며,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였다.
수원화성은 거중기, 활차, 녹로 등 신기재의 발명과 활용,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한 축성방법 등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을 살필 수 있는 대한민국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수원화성」은 방어 기능과 성벽 안에 갖추어진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각기 다른 모양과 특성을 지닌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으뜸 관광 명소’, ‘CNN 선정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곳 50곳’,
2012 한국관광을 빛낸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는 등 한국 전통역사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수원시청)
수원화성 탐방코스
수원화성은 동절기 09:00~17:00, 하절기는 18:00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그러나 화성 안에도 심심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굳이 시간의 구애 없이 관람할 수 있다.
사실, 오늘 도착시간이 늦은 건 관람시간 제한으로 9시에 개방하는 줄 알고 미적거리다 늦은 것이다.
□ 화서문(華西門)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이다.
1795년(정조 19) 7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1월 8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 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수원시)
조선 정조대왕은 정약용에게 수원화성 축성 설계를 맡기고,
채제공에게는 책임을 맡겨 1794년 2월부터 성을 쌓기 시작했다.
정조는 이전처럼 일반 백성이나 승군을 불러내지 않고, 인부나 장인을 자원 모집하여 노임을 주고 부렸다.
석공들은 팔달산에서 돌을 채석해 수레에 실어 현장으로 날랐다.
이해 여름에 극심한 가뭄으로 남쪽 농사는 깡그리 망치자 정조는 10월에 1~2년 공사를 중지하겠다고 했다.
공사 책임자인 채제공은 일꾼을 다시 모으기 어렵고, 일꾼은 노임을 받으므로 계속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조는 백성들이 주려 죽는 데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라며 중지시켰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진행된 공사는 2년 7개월 만에 끝났다.
화성은 팔달산의 낮은 구릉을 따라 쌓은 평산성(平山城)으로 중간에 냇물이 흐르며, 총둘레는 5,520m이다.
서울 도성에 북대문이 없는 것과 달리 평산성인 화성은 사대문을 두고 여러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화성의 특징은 벽돌을 섞어 사용하면서 돌의 규격을 맞추어 축조했다.
중국 성벽의 장점을 따르고 화포 등 신무기 발달을 감안해 부대시설을 적절히 안배했다.
성안에 주민이 거주하는 읍성의 기능을 하며 방어선의 역할도 겸하였다.
성을 완성한 후 정약용을 불러 "기중기를 사용하여 돈 4만 냥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 치하했다.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중 일부 편집)
우측 성벽 위에 서북공심돈이 보인다.
□ 북포루(北舖樓)
북포루는 북서포루의 서쪽 129보 5척의 거리에 있다.
치(雉)가 성 밖 19척까지 튀어나왔다.
화성에는 모두 15곳의 치성이 있다.
북포루는 화성에서 가장 평탄하고 시야가 트인 곳에 있어서 군사의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외면의 너비 27척, 5량 집을 지었습니다. 사방 2 간인데, 구조는 동북포루와 같다.
3면의 평평한 여장은 누의 바닥과 이어지며, 각각 포를 쏘는 구멍을 내었고 안쪽에 나무 사다리를 설치했다. (안내문)
□ 북서포루(北西砲樓)
북서쪽에 위치한 북서포루는 검정 벽돌을 쌓아 치성과 같이 성 밖으로 돌출시키고
내부는 나무판을 이용하여 3층으로 구획하였으며 포혈을 만들어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북서포루는 성 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있으며 지붕의 형태가 성안 쪽은 맞배지붕 형식,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수원시)
북서포루는 유실된 것을 「화성성역의궤」 도면을 참고로 복원한 것이라는 데,
기와지붕 반을 자른듯한 생뚱맞은 느낌이다.
다른 곳과 같게 맞배지붕 형식이면 더 보기 좋겠단 생각이 든다.
북서포루를 성벽에서 보면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 서일치(西一雉)
‘치(雉)’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떠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서일치는 서북각루와 서포루(西砲樓) 사이에 있다. (안내문)
□ 서일치 안에 설치된 홍이포(紅夷砲)
길이 215cm, 구경 10cm, 중량 1,800kg
홍이포는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때까지 사용된 유럽식 화포로 포구 쪽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하는 포구 장전식 화포이다.
사정거리가 700m에 달하는 위력적인 화기로써 성곽과 또는 포루 등에 배치하거나
성곽 공격용으로 사용하였다. (안내문)
□ 북옹성(北甕城)
북옹성은 장안문 바깥에 반달 모양으로 쌓은 성으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키는 시설이다.
출입문을 옹성 한가운데로 내서 출입하기 편하도록 했다.
조선 시대에 만든 여러 성곽에도 옹성이 설치되어 있지만,
출입문을 중앙에 만든 사례는 장안문과 팔달문이 유일하다.
문 위에는 물을 저장하는 오성지(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물을 담는 통)를 설치하여 화공에 대비했다.
오성지는 화성에만 설치한 색다른 방어시설로서 정약용이 제안했으나 설계안대로 시공되지 못했다. (안내문)
성 안에서 북옹성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도 마련되어 있어 이곳에서도 수비와 공격을 함께할 수 있다.
수원화성 안에서 보는 장안문
장안문 통로 천장의 용무늬 일부
장안문에서 바라본 반원형 북옹성은 문루 아래 정중앙에 출입구를 만들었다.
□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수원화성의 정문이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5일 마쳤다.
장안이라는 말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장안문은 우진각 지붕(지붕면이 사방으로 경사지게 되어있는 형태)으로 규모가 웅장하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수원시)
□ 북서적대(北西敵臺)
북서적대는 장안문의 북서쪽 약 62.5m 지점에 있으며 1795년(정조 19년) 화성 축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적대란 성곽의 중간에 약 82.6m의 간격을 두고 성곽보다 다소 높은 대를 마련하여 화창이나 활과 화살 등을
비치해 두는 한편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는 곳으로 옛날 축성법에 따른 성곽 시설이다.
화성 축성 때에는 이미 총포가 전쟁에 사용되던 때이지만,
옛날의 축성법에 따라 적대를 만들어 창과 활 대신 총포를 쏠 수 있도록 총안을 마련하였다.
이 적대의 규모는 높이 6.7m 성곽의 성가퀴와 가지런히 쌓되, 반은 성 밖으로 나가 있고, 반은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아래 부분의 넓이는 7.8m이고 위는 좁아져서 6.4m인데, 거기에 현안 3개가 나왔다.
좌우의 아래 넓이는 8.8m 위는 7.3m로서, 이 적대의 상부는 凸자 모양으로 성가퀴를 둘러쌓고, 밖에 3면에는 높이 1.5m에 두께 85㎝의 성첩 11개를 쌓은 다음, 총안을 뚫어 놓았다.
또한 전면의 좌우에도 넓이 2.4m의 성가퀴를 쌓고,
그 안에 1.5m 폭의 공간을 만들어 적대 위로 통과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수원시)
□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인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794년(정조 18) 9월 23일에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의 발전된 형태이다. (수원시)
□ 북수문(北水門) - 화홍문
화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 위에는 북수문과 남수문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북수문은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1795년(정조 19) 1월 13일에 완성되었다.
별칭은 화홍문으로 화(華) 자는 화성을 의미하고, 홍(虹) 자는 무지개를 뜻한다.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수원시)
성 안으로 시냇물이 흘러 식수 등 생활용수는 부족하지 않겠으나 아쉬운 것은 성을 둘러싼 해자가 없는 것이다.
중국 북경의 자금성 해자처럼 깊고 넓을수록 방어에 유리한 데, 우리나라 성벽엔 해자가 없는 게 아쉽다.
해자가 얕으면 적이 해자를 흙과 돌로 메꿔 쉽게 성벽을 오를 수 있으므로 깊게 파야 한다.
또한 말이 전속력으로 달려도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의 너비라야 제기능을 할 수 있다.
□ 북암문(北暗門)
북암문은 동북각루의 동쪽 40보 되는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다.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문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지세가 그렇기 때문이다.
(수원시)
화홍문 아래 있는 북수문 통로를 이용해 밖으로 나와 방화수류정 아래에 있는 이 연못을 보았다.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다시 되돌아가기가 애매한 위치인데 마침 북암문이 보여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동북각루(東北角樓)
방화수류정은 1794년(정조 18) 10월 19일 완공되었다.
주변을 감시하고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와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정자의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노닌다(訪花隨柳)”라는 뜻을 지닌 방화수류정은 독특한 평면과 지붕형태 때문에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화성에서 가장 뛰어나며 다른 성곽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수원시)
안내문 대로 수원화성에서 제일 멋진 건축물인 방화수류정은 주변 풍경과도 잘 어울린다.
수원화성에서 이곳은 필수 코스이다.
방화수류정 밖의 작은 연못은 큰 원 안에 작은 원의 동산이 있다.
창덕궁 애련지나 경복궁의 향원지처럼 당시 세계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형태는 아니다.
수원화성을 만들 당시만 해도 서양의 문화가 들어와 땅은 더 이상 모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천원지원(天圓地圓) 형태를 보인다.
성벽은 구릉을 따라 긴 장사진을 이룬다.
동북각루보다 방화수류정이란 편액 때문에 모두 방화수류정이라 부른다.
□ 동북포루(東北舖樓)
동북포루(東北鋪樓)는 각건대(角巾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 135보 4척쯤 되는 거리에 있다.
지세가 별안간 높아져서 용두(龍頭)를 눌러 굽어보고 있다.
『성서(城書)』에 이르기를, "치성의 위에 지은 집을 포(鋪)라 한다"고 했다.
치성에 있는 군사들을 가려 보호하려는 것이다.
치성이 성 밖으로 18척 5촌이 튀어나왔는데, 외면의 너비는 24척이고, 현안(懸眼) 1 구멍을 뚫었다.
5량으로 집을 지었는데, 판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2010년에 복원한 것이다. (수원시)
뒤돌아 본 동북포루
□ 동암문(東暗門)
동암문은 동장대 서쪽 166보 되는 곳에 있다.
동쪽에 자리 잡고 북쪽을 향하여 있으며 벽돌로 안과 밖의 홍예를 만들어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다.
안쪽 너비 7척, 높이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문 위는 벽돌을 깔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오성지와 한 개의 큰 둥근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마치 나무로 만든 전붕(戰棚)의 제도와 같다. (수원시)
□ 동장대(東將臺) - 연무대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머물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동장대는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되었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鍊武臺)라고 한다.
이곳의 지형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 (수원시)
동장대이나 편액은 연무대(鍊武臺)라 걸려 있다.
단층 건물로는 화성에서 제일 크고 높다.
무예를 수련하는 곳이기도 해 앞에는 운동장만큼 넓은 공간이 있다.
□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는 창룡문의 북쪽 96보의 거리에 있다.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는데, 대 아래의 석축 높이 13척, 대의 높이 18척이다.
벽돌로 쌓는 방식은 사각형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벌의 허리처럼 만들어서 모를 죽였다.
안쪽 너비 17척 4촌, 바깥쪽 너비 19척, 성 밖으로 나온 부분이 25척 5촌, 2개의 현안을 뚫었고,
위에 둥근 여장을 만들었다. (수원시)
동북노대 안쪽 모습
□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은 노대의 서쪽 60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성탁(城托)의 위 성가퀴 안에,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쌓아서 둥그렇게 돈(墩)을 만들었는데, 겹으로 둘렀다.
높이 17척 5촌, 바깥 원둘레 122 척,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 안쪽 원둘레 71척,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고, 2 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높이 7척 3촌, 가운데 층높이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수원시)
수원화성은 가장 최근에 만든 성으로 짜임새가 좋을 뿐 아니라 곳곳에 수비와 공격을 할 수 있는 시설물이 많다.
높고 험준한 산성이 아니므로 식량 및 군사를 배치하기 쉬우나,
적의 침입에 취약한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 정교하고 튼튼한 많은 시설물을 마련했다.
□ 창룡문(蒼龍門)
창룡문은 화성의 4대 문 중 동쪽 문으로 1795년(정조 19) 5월 8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17일 마쳤다.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 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았다.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수원시)
바깥 옹벽의 출구는 우측에 두었다.
□ 동일치(東一雉)
‘치’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이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은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떠서 '치성'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동일치는 동일포루에서 봉돈 쪽으로 125보(148m)의 거리에 있다. (수원시)
□ 봉돈(烽墩)
1796년 6월 17일 완성된 수원 화성 봉돈(烽墩)은 일반적인 봉수대(烽燧臺)가 주변을 잘 살필 수 있는
산 정상에 별도의 시설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화성 성벽에 맞물려 벽돌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성곽 양식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으로 마치 예술작품처럼 정교하게 만든 수원화성의 대표시설이다.
평상시 남쪽 첫 번째 화두(火竇: 횃불 구멍)에서 횃불이나 연기를 올려 용인 석성산과 흥천대 봉화로 신호를 보낸다.
(수원시)
□ 동남각루(東南角樓)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건물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 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성 안팎의 시야가 가장 넓은 곳이다.
남수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과 마주 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수원시)
□ 남수문(南水門)
남수문은 수원천이 화홍문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와 성곽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수원천 하류 수량 증가에 대비하여 9개의 홍예 수문으로 되어 있으며,
수문 위에는 성 밖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포사가 세워져 있어 비상시에는
군사들이 대기하거나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남수문 복원을 위해 지난 2004년 남수문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나섰고, 2012년 6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수원시)
남수문은 북쪽의 방화수류정 인근의 북수문에서 흘러온 물이 지나는 곳이다.
남수문 옆에 붙여서 새로 만든 다리를 통과하면 차도를 가로지르는 성벽을 지나며 화성은 끊어진다.
조금 더 지나면 2층 건물인 팔달문이 보이고 멀리 산으로 올라가는 성벽이 보인다.
그러므로 팔달문까지 짐작하여 가야 하고, 팔달문에서도 팔달산으로 짐작해 올라가야 한다.
□ 팔달문(八達門)
팔달문은 화성의 4대 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현륭원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1794년(정조 18)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15일에 완공하였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수원시청)
이쪽은 예전 중심지로 시장통이 지나며 성벽은 일부 끊어지고 없다.
이 팔달문을 우측으로 돌며 우측 상가 사이로 성벽이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면 다시 화성 성벽을 만나게 된다.
팔달문도 외옹벽과 문이 일직선으로 놓였다.
팔달문은 사통팔달에서도 알 수 있듯 어느 곳으로든 잘 통한다는 의미다.
하여 이곳이 예전부터 수원화성의 중심이지 지금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성벽 일부가 없어질 만큼 번성한 이유를 어렴풋 알 수 있다.
다시 팔달산으로 올라가는 성벽을 만나는 입구엔 매표소가 있다.
수원시민은 무료이고 외지인 성인은 1,000원을 내야 하는 데, 백신 접종을 다 한 사람은 무료 입장권을 준다.
앱으로 2차 접종 확인을 한 이후 무료입장권을 받았다.
팔달산은 낮은 산이기는 해도 꾸준히 올라가야 해 제법 몸에 열이 나 나중엔 덧옷을 벗어야 했다.
□ 서남암문(西南暗門)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이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이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 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수원시)
□ 용도(勇道)
용도는 좁고 긴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를 가리킨다.
이곳은 좌우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면서 우뚝 솟아 있어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적에게 빼앗기면 성 안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서남암문 밖으로 좁고 긴 성벽인 용도를 만들었다.
용도 중간에는 좌우에 치성을 하나씩 만들어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용도 끝에는 서남각루가 자리 잡고 있다. (안내문)
대만 작가가 쓴 진시황전을 읽으며 용도가 있다는 걸 알고 궁금했는데, 수원화성에서 그 실체를 알게 됐다.
중국이 만리장성은 대체로 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곽인데 반해 용도는 그보다 낮은 곳에
양쪽을 담장을 두른 방어 시설이었다.
수원화성의 용도는 성 밖으로 길게 높은 능선이 지나가자 적이 이곳을 점령하면 수비가 어렵게 된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 양쪽으로 긴 벽을 이루며 용도를 만든 것으로 수원화성의 숨겨진 백미인 것이다.
□ 서남각루(西南角樓)
서남각루는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하는데,
용도(甬道)의 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 있다.
누의 규모는 6간인데 남북 21척, 동서 14척, 남쪽으로 2간은 판자를 깔고 난간을 둘러치고, 삼면에 판문을 내었다.
그리고 북쪽에는 분합을 내고, 분합의 밖으로 4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다.
이 벽돌로부터 판자를 깐 데까지의 높이 1척 7촌 석체(石)에서 벽돌을 깐 데까지 높이 2척,
단청은 5토를 썼으며, 들보 위는 회를 발랐다. (수원시)
서남암문에서 화양루까지 용도는 약 200여 m 정도의 거리다.
그 끝에 화양루를 끝으로 용도는 끝난다.
이미 수원화성은 두 번을 다녀갔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이곳을 들어갔다.
효원의 종
효원의 종에서 서노대로 올라가는 왼쪽 성벽 밖으로 경사가 가파르다.
성벽 아래쪽 단에도 밖으로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을 하나 더 설치된 게 특이하다.
□ 서노대(西弩臺)
노대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이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가 두 곳이 있다.
서노대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을 볼 수 있으며 정팔각형 평면이며 기와 벽돌로 쌓았다. (수원시)
□ 서장대(西將臺)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수원시)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뒤엔 서노대가 있다.
이곳에선 수원화성은 물론 화성행궁도 시원하게 잘 보인다.
동장대엔 연무대란 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려 있듯 이곳은 서장대 대신 화성장대란 편액이 걸렸다.
서장대가 팔달산 정상이므로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다.
□ 서북각루(西北角樓)
각루는 성곽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세워져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다.
비상시 각 방면의 군사 지휘소 역할도 하였다.
서북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숙지산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서 화서문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다.
(수원시)
서북각루는 시원하게 다락 형식의 누각이다.
성벽이 높다 보니 다락을 만들어 2층으로 올라가야 성 밖을 조망할 수 있다.
사방이 트여 어디든 잘 관찰할 수 있다.
서북각루 밖의 풍경
아침에 출발했던 화서문으로 돌아오며 수원화성 탐방을 마무리한다.
우리나라 산성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과 이곳 수원화성이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산성에 세월을 더하며 보완되다가 후금의 위협을 받고 이괄의 난 뒤
인조 때 지금처럼 고쳐 지은 것이다.
이후 순조 때 더 수리를 거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정비된 산성이라고 한다.
수원화성은 정조 때 정약용의 천재적인 설계로 가장 튼튼하고 완벽하게 만든 근대화된 산성이다.
요즘 자주 산성 탐방을 나서며 점점 산성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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