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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과거의 소박함을 만날 수 있는 순천 낙안읍성

by 즐풍 2021.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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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3. (월)  오후에 탐방

 

 

순천에서 유명한 곳을 꼽는다면 순천 국가정원, 순천만, 낙안읍성, 송광사, 선암사가 먼저 떠오른다.

지난 4 5 여수에 들어오던 첫날 순천에 있는 국가정원과 순천만을 둘러 보았다.

이제 남은   가장  송광사부터 선암사, 낙안읍성 순으로 들린다.

주말에 이곳을 다녀온 소방공무원이셨던 분이 선암사는 조금 늦게 가면 주차하기도 힘들다고 한다.

오늘은 평일인 월요일이라 어느 곳이든 주차 걱정없이 가장 늦게 낙안읍성에 들린다.

 

 

□ 낙안읍성

 

조선시대 전기부터 600 년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계획도시이다.

성곽, 중요민속자료  다양한 문화재뿐만 아니라 소리의 고장으로서 가야금 병창, 판소리 

유무형의 자원이  보존되어 있으며 성내에 주민이 직접 거주하는 살아있는 민속마을이다.

 

사적 302

인구: 98세대 228(읍성복원  199세대 820)

면적: 223.108, 성곽 길이 1,410m, 높이 4~5m

문화재: 13(국가 10,  3) / 노거수 13

 

연혁

조선 태조 23(1397) 낙안 태생 양혜공 김빈길 장군 토성 축조

조선 세종 6(1424)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

조선 인조 4~6 (1626~1628) 충밈공 익명의 장군 석성 중수

1983 6 14 사적 302호로 지정

2011 3 1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 등재

 

 

 

낙안읍성을 들어가는 안쪽 문

 

 

동문 낙풍루 

 

봄을 상징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낙풍루는 낙안읍성 정문처럼 사용되는 동문이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웅성을 쌓고 4개의 치성을 설치하였다. (안내문)

 

이 낙풍루가 낙안읍성을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밖의 성벽은 일종의 치성으로 누각 밖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공격하는 성벽인 셈이다.

낙안읍성을 해자라고 생각하는데, 길이가 짧고 깊이가 너무 얕아 제기능을 하기엔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해자는 말을 타고 뛰어넘을 수 없는 너비에 말이 빠져도 말 위의 사람도 가라앉은 만큼 깊어야 제대로 만든 것이다.

마을 안길

 

낙안지관(객사)

 

낙안지관은 왕명으로 오는 사신들과 고을을 찾아오는 기타 관리나 외빈들이 머물던 곳이다.

고을의 관아에서 가장 으뜸 가는 건물로 동헌보다 격이 높아 낙안읍성  중앙 상단에 있다.

낙안 객사는 1450(세종 32) 군수 이인이 건립한  1631(인조 9) 1857(철종8) 중수하였다.

현재 객사는 본전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없으나 1900년대 초까지는 전체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09 이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다가 이후 현재에 이른다.

낙안객사 동쪽 방은 문관이, 서쪽 방은 무관의 숙소로 사용 되었다.

관아의 수령이 매월 초하루, 보름이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절하는

의식을 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본사의 경우 맞배지붕이고,  날개는 팔작지붕이다.  (안내문)

 

 

 

임경업 장군비각

 

낙안군수 임경업장군이 임진왜란  훼손된 낙안읍성을 보수하고 중국 청나라와의 전쟁 

큰공을 세우고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해 군민들이 세웠다. (안내문)

 

동헌(東軒)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서 감사, 병사, 수사, 수랑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동쪽은 수령, 서쪽은 관리, 중앙마루는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사용했다.

지금의 동헌()=사무당() 1990년에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복원되었다.

동헌은 사무당이라고 불리는데, 사무는 논어 안연편에 이르기를 지방 수령이 송사까지 책임을 지고 있어 

더러 백성의 피해가 많아 남용하거나 백성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를 낙안읍성 당초에 담고 있다.  (안내문)

동헌에 마련된 형틀에 목우가 장난스럽게 곤장을 들이댄다.

유기그릇을 닦는 체험장도 있다.

 

성벽으로 올라가 한 바퀴 돌기도 한다.

내아 뒤편의 장독대

 

내아

 

내아는 지방 관아의 안채로서 내동헌이라고 불리었다.

방과 부엌, 창고가 배치 되어 있다. 

1990 동헌과 함께  자리에 복원되었다.  (안내문)

 

낙민루

 

낙민루는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조선시대 호남의 대표적인 누각이다.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86 다시 옛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안내문)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625전쟁 중(1951)에 소실되었다.

1984년부터 시작된 낙안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1987년 건립되었다.

낙민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로서 1층은 12개의 사각형 돌기둥을 세워 동헌의 출입문으로 사용한다.

2층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고 원형기둥을 세워서 팔작지붕을 받게 하였다.

또한 중앙에는 낙민고를 설치하였고 천장은 연등 천장으로 내부에는 단청 하였다.

현판을 남송 신계우 전 승주군수 필체로 복원하였다.

더불어 낙민루 앞들에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나주 목사가 각 군을 순회할 때 아홉 번째로 들려서 쉬며 머물렀다고 하여 구정뜰이라고 한다. (안내문)

 

앵두열매

오봉산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

낙안읍성은 관아만 빼고 전부 초가지붕을 얹었다.

일반 백성이 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2~3년마다 갈아주려면 제법 일거리가 크겠다.

낙안읍성에 거주하려면 여러 가지 제약이 많다고 한다.

건물 하나 들여놓기도 어렵고 잘못하면 제재도 많다고 하니 쉬운 게 아니다.

성벽 위에서 찍은 사진

베옷짜기 체험장

 

도자기 체험장의 도자기

 

큰손 빨래터

 

  우물은 옛날 고을 수령님이 드셨다고 하여 큰샘이라 불려오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낙안읍성은 행주형으로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을 금하였으며,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어쓰도록 했다.

이는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게 되면  밑에 구멍이 뚫리어 배가 가라앉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은 낙안고을이 쇠한다고 믿었으며,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러 쓰도록  것은  안에 고인 물을 퍼내어야만 안전하여

낙안고을이 흥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물은 가뭄이나 우기나  차이 없이 마르거나 넘치지 않고 수위를 유지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하여 읍성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고 때로는 소통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빨래 방망이로 빨래하는 것을 체험할  있다.  (안내문)

남문이던가?

성벽 위 누각

성곽은 이렇게 고개 위로도 지나간다.

 

600년 된 은행나무 보호수로 높이 30m, 나무둘레 650cm이다.

자주색 완두콩 꽃

 

낙안읍성 은행나무 유주(珠)"

 

글자 그대로 젖기둥이라는 뜻으로  모양이 마치 여인네의 젖가슴과 닮았다고 하여 유주라고 하나

실제로는 남자의 심벌을 닮은 까닭에 예로부터 아들을 낳고자 하는 여인네들의 등살에 도려져 나가는

수난을 많이 겪는다고 한다.(실제로 득남 목적의 민간인을 숭배물로 보호되는 경우가 많다.)

은행나무가 줄기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자가치유의 방법으로  부위에 특정의 방어물질을 보냄으로써

만들어진다는 견해가 있다.

유주 은행나무는 청도 적천사, 고창 선운산도립공원, 서산 향교, 성균관대학교와 낙안읍성에는 동문쪽, 난전쪽  군데에 있다.  (안내문)

유주가 달린 은행나무 보호수 

연지

 

 

궁금했던, 그래서 꼭 한 번은 오고 싶었던 낙안읍성을 목우와 함께 둘러보았다.

5월의 어느 푸르른 날은 이렇게 송광사와 선암사, 낙안읍성을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