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08
2023.7.3. (월) 16:00~19:20, 세 시간 20분 산행
서울에 있는 산 중에서 제일가기 싫은 산이 있다면 단연코 북악산이다.
산은 높지 않으나 창의문에서 정상까지 끝없이 펼쳐진 계단 때문이다.
창의문이 해발 119m로 북악산(342.5m) 정상까지 고도 143m만 높이면 되니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후 변화로 빨리 찾아온 찜통더위 속에 계단지옥에 갇혀 개미지옥에서 탈출하려는 곤충처럼 허우적거리다
두 번이나 쉰 끝에 겨우 백악마루에 올라서며 지옥에서 탈출한 안도감을 느꼈다.
최근 산행을 게을리해 다리 근육이 풀어진 데다 오후의 열기를 온몸으로 맞서야 했다.
인왕산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더운 날씨로 북악산까지 오르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숨은 탁탁 막히고, 다리는 풀린다.
봄이나 가을이면 아침부터 시작해 하루에 끝낼 수 있겠지만, 오후에 시작한 데다가 오늘 절반인
백악 구간을 끝내지 못하면 나머지 구간을 끝내기에는 하루에 끝내기에는 이 여름은 너무 덥다.
1년 전만 해도 하루에 끝내고도 남는데, 요즘 체력은 연년이 다른 걸 느끼며 고군분투한다.
도성의 유산가치
<유산개요>
•유산명칭 : 서울 한양도성(Seoul City Wall)
•위 치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산 1-3 외(종로구, 성북구,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분 류 : 문화유산 (사적 제10호)
•좌 표 : N37 59 31.45 / E126 97 31.24
1)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Outstanding Universal Value)
서울 한양도성은 오백여 년 동안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궁궐, 관청, 종묘·사직과 도성 백성의 보호막으로
나라의 중심이자 도읍의 상징이 되었다.
한양도성은 고대 고구려 평양성과 고려 개성에서 보이는 평지성과 산성을 융합한 독창적인
한국형 도성 제도를 계승하고, 동아시아 유교 질서와 상징체계를 반영한 계획도시이다.
1396년 전국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건설된 한양도성은 세종, 숙종 연간에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며
그 축성과정이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성벽에는 시기별
축조기술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내사산의 능선과 평지를 아우르는 한양도성은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하여 지형과 조화롭게 건설되었으며,
도성 사람들의 놀이 장소이자 문학·회화·민속의 배경의 되어 왔다.
오늘날 한양도성은 천만 도시 서울이 품은 역사유적으로 자연 속의 도시경관과 도시 속의 역사경관이
조화를 이루며 600여 년 역사를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서울 한양도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도시규모의 성곽유산
서울 한양도성은 고려 고구려 도성 형식에 기원을 두고, 평양성과 개경도성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된
독창적인 한국 도성으로서의 위상과 형식을 갖추고 있다.
평지성과 산성의 구조가 결합한 성곽 내부에 궁궐, 종묘, 사직과 행정시설, 시장시설, 거주지를 포함하는
한국적 도성체계와 축조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 600년의 역사층위가 축적된 유산
서울 한양도성은 문루와 성곽의 원형이 잘 남아있어 축조 당시 도성 형식의 전통과 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길이가 18.627km로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유산 중 가장 큰 규모로 현재 12.854km의 구간이 원형
또는 복원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나머지 구간 가운데 일부는 지하유적으로 남아있다.
서울 한양도성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조선왕조의 수도로 도성의 형태와 기능을 유지해 왔으며,
시기별 축조형태와 수리기술의 역사적 증거와 기록과 함께 실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 땅과 한 몸으로 구축된 문화유산
서울 한양도성의 입지는 풍수에 바탕을 두고 한반도의 지형체계를 고려하여 결정되고,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건설되었다.
석재로 축적된 성곽 안쪽에 판축층을 조성하는 등 지형과 일체화된 축조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성곽은 자연적인 지형을 활용하여 축조되었기 때문에 내사산의 굴곡과 도성의 안팎이 함께 조망되는
뛰어난 도시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 집단 장인기술로 구축된 유산
한양도성은 전국 각지의 백성들이 성곽을 축조했는데, 구간마다 축조에 참여한 장인들의 실명이 새겨져 있다.
서울 한양도성의 보존을 위해 내사산의 지형을 잘 보존하여 왔고,
도성 안의 하천을 유지하기 위해 내사산의 수종들을 관리하여 왔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양도성의 문루와 성곽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과 도성 풍경을 묘사한 회화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한양도성은 한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서울 사람들의 삶의 공간 중 하나로서 기능하였고, 신앙·의례·문예·놀이의 장소였다.
(출처_서울 한양도성 홈피)
창의문
창의문(彰義門)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문이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 다시 세운 것이다.
영조 때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출처_한양도성)
조선시대에는 궁궐이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의 중요성은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도 청와대를 지키는 장소로 중요성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백악산 산성 곳곳을 지키던 초소도 철수하여
이젠 역사적 유물로 남게 되었다.
백악 구간의 성벽은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같은 높이의 계단이 연속된다.
차라리 너덜겅의 뒤죽박죽 뒤섞인 바위라면 긴장감 있게 이리저리 균형을 잃지 않게 다니겠지만,
이런 계단은 다리에 걸리는 부담만 늘 뿐 아무런 감흥도 없다.
성 안쪽의 성벽은 겨우 가슴 높이 정도밖에 안 되지만, 바깥쪽 성벽은 보통 5m가 넘는다.
능선을 절반 깎아 안쪽으로 올려붙이며 단차를 크게 만들어 성벽의 기능을 높인 것이다.
성 밖은 최소 5~6m 높이 이상이다.
紫北正道(자북정도)는 '자하문 (창의문) 북쪽의 정의로운 길'을 뜻하며, 정도正道는 국가 안보를 의미한다고 한다.
뜨겁게 달궈진 성벽 위를 여리디 여린 당쟁이 덩굴이 무리를 이끌고 굳세게 전진한다.
한양도성의 대부분은 복원공사를 통해 원형을 많이 잃었다.
정과 망치로 다듬어 투박했던 옛것은 사라지고, 기계로 자르고 갈아 세련된 여장을 만들었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도 여전히 계속되는 같은 높이의 계단지옥이 기다린다.
청와대에 지존이 국정을 살필 때 저곳 초소에는 초병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젠 철수하고 없다.
철옹성이던 청와대의 지하벙커는 청와대를 개방하는 멍청한 짓거리로 만천하에 노출되었다.
용산 집무실은 대포 한 방에 잿더미가 될 테니 부동시라고 군대도 안 갔다 온 자의 허튼짓으로
하루아침에 안보가 뚫린 셈이다.
소나무 뒤 초소가 백악 구간 성벽의 정상이다.
우측으로 올라가면 백악산 정상이니 드디어 계단지옥의 오름에서 탈출하는 셈이다.
백악마루
도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白岳山 海拔 342m’라고 적힌 표석이 서 있다.
이곳에 서면 경복궁과 세종로는 물론 한강 건너 63 빌딩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처음 성을 쌓을 때 공사 구간을 97개로 나눴는데 각 구간의 이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붙였으니
시작 구간은 천(天), 끝나는 구간은 조(弔)였다.
이곳이 바로 천(天) 구간에 해당한다. (출처_한양도성 홈피)
정상을 지나면서 백악산 하산길에 접어드니 부담은 줄었다.
올라올 때와 달리 내려가며 주변 풍경은 눈에 더 들어온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嘉慶九年 甲子 十月 日牌将 吴再敏 監官 李東翰邊首 龍聖輝
해석: 여기 있는 각자성석은 순조 4년(1804) 10월 오재민이 공사를 이끌었고,
공사의 감독은 이동한이 담당했으며, 전문 석수 용성휘가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이다.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을 각자성석이라고 한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첫 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것(14C)과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것(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것(18C 이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안내문)
보기 좋게 흰색을 집어넣고 사진을 찍어 예시를 든 것이다.
• 1.21 사태 소나무
•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 군부대 소속의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센터(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현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 사태 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 무장공비 일당은 당시 청와대 및 주변시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침투 간 아군복장과 민간복 착용,
취객으로 위장하는 등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도발을 자행하였다.
• 1월 21일 교전 후 14일간 작전 결과 침투한 31명 중 28명 사살, 2명 도주,
1명을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68.4.1)이 창설되었다. (안내문)
이 사건을 계기로 예비군이 창설되면서 군복무를 마치고 1년에 한두 번씩 총을 만질 기회가 생겼다.
예비군가 그대로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친 것이다.
인구가 줄며 이젠 군일갈 사람마저 부족해 정부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개병제 대신 미국처럼 직업군인으로 전환하여 전문성을 높여야 할 때가 되었다.
북악산 성곽 탐방로 개방 이야기
북악산은 지난 1968년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 이후 군사상 보안 문제 등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이후 과거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4월 북악산 전 구간을 처음으로 개방하고 전체가 아닌 성곽길
(와롱공원~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탐방로로 출입을 제한하였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북악산 개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소통과 개방의 취지를 살리겠다"라고 언급한 것에
따른 후속 조치의 일환으로 2020년 10월 1단계 개방계획에 따라 현재와 같이 한양도성 북악산 성곽으로부터
북악스카이웨이 사이 의 성곽 북측면 탐방로가 개방되었다.
이를 위해 기존 군 순찰로를 탐방로로 정비하고 탐방안내소, 화장실, 주차장을 설치하는 등 시민 편의시설을
확충하였다.
그동안 통행을 가로막았던 성곽철책을 일부를 제거해 청운대~극장 구간의 성곽 외측 탐방로를 개방하게 되어
한양도성으로의 접근이 쉬워지게 되었으며, 2022년 상반기에는 2단계 개방계획을 통해서 50여 년 동안
폐쇄되었던 성곽 남측면도 개방하게 될 예정이다. (안내문)
청운대 표지석
인왕산 곡성과 달리 북악산 곡성은 누구나 탐방할 수 있다.
이렇게 곡성을 만든 것은 등로에서 비껴 난 정상의 중요성에 비추어 전략적 요충지를
잘 활용하려는 의도다.
이곳에서는 조망이 좋을 뿐 아니라 주변 성벽을 보호하는 역할도 겸한다.
성벽을 내려가다 보면 성벽의 배부름 현상에 의해 일부 구간이 붕괴된 것을 복원했다고 알려준다.
500여 년을 버티며 잘 견뎌왔지만 간혹 이런 붕괴도 생긴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
咸豐元年 九月日 監官 鄭仁〇 看役 高錫豹 邊手 金振聲
(함풍원년 구월일 감관 정인0 간역 고석표 편수 김진성)
각자성석은 성을 쌓는 과정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성돌이다. 한양도성에 남아있는 각자성석은 천자문의 글자로
축성구간을 표시한 각자(14C)와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긴 작자(15C), 축성 책임 관리와 석수의 이름을
새긴 각자(180 이후)로 나눌 수 있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에 만들어진, 다양한 유형의 각자성석이 290개 이상 남아 있다.
이 각자성석에는 철종 2년(1851) 9월 정인0이 공사를 감독하고 고석표가 공사를 돌보았으며,
석공 김진성이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이런 각자 성석으로 인해 언제 어느 지역의 누가 성을 쌓고, 또 언제 복원공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각자 성성으로 귀중한 내용을 알게 된다.
성 안에는 소나무가 유독 많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소나무는 우리 조상의 끈기와 닮아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 중 하나다.
성 밖으로도 탐방로를 잘 다듬어 개설하면 밖으로 탐방하며 각자 성벽을 보면서 더 많은 걸 알고 싶다.
숙정문(肅靖門)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이다.
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으나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존 도성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1976년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숙정문 안내소에서 삼청각으로 갈 수도 있고,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따라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과 하늘마루로 갈 수도 있다. (출처_한양도성)
ㅁ 숙정문肅靖門
숙정문肅靖門은 종로구 삼청동 한양도성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휴암(부엉바위)과 응봉鷹峰에 못 미쳐 위치하고 있다.
숙정문은 도성의 북대문으로 그 기능은 서울에서 의정부를 거쳐 원산과 함경북도로 이어지는 관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숙정문은 4대문·4소문을 갖추고자 했던 조선왕조 도성의 성문체제에 의한 형식적인 구도에 따라
축조되기는 하였지만 실질적인 기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살지 않고 교통로로서의 필요성을 갖지 못한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문의 기능은 동소문인 홍화문(후에 혜화문)과 동대문인 흥인문이 대신하였던 것이다.
숙정문은 서울 도성의 북쪽 대문으로 처음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다.
한편 숙정은 ‘북방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안을 평안하고 정숙하게 한다.’는 뜻으로,
숙청은 ‘도성 북쪽의 경계를 엄하게 하여 도성 사람들이 정숙하고 맑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한다.’고
해석할 수 있어 비슷한 뜻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으면 남대문을 닫고 북대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으며, 장마가 심하면 북대문을 닫고
남대문을 열어 기청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는 방위에 따른 음양의 조화를 이끌어 내어 평온함을 기원한 것이었다.
(출처_조선의 정신을 담은 서울의 문)
스탬프는 분기마다 색상이 변한다.
분기별로 한 번씩 스탬프를 찍고 지정된 장소에서 인증사진을 찍어 4개를 다 제출하면 배지를 받을 수 있다.
말바위
조선시대에 말을 이용해 이곳까지 올라온 문무백관이 시를 듣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라 하여
말(馬) 바위라 불리기도 하고, 백악(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 바위라는 설도 있다.
예전에는 바위에 벼락이 많이 친다고 해서 벼락바위라고도 불리기도 했다. (안내문)
말바위 인근에서 바로 성 밖으로 빠지는 구간을 따라 내려가야 와룡공원을 만날 수 있다.
길을 놓쳐 이틀 째 되던 날 와룡공원에서 마지막 구간을 전부 돌았다.
이제부터는 2023.7.5 아침에 와룡공원부터 혜화문까지의 백악구간을 마무리한다.
서울이 북쪽이라지만 벌써 붉은 원추리꽃이 폈다.
우리나라 산에서 가장 유명한 노란 원추리꽃 군락지는 홍도와 덕유산 줄기의 무룡산이다.
최근 몇 년 간 무룡산 원추리꽃 군락지는 예전의 명성을 잃어 많은 등산객을 실망시킨다.
올해는 어떨지 궁금하다.
한양도성이 복원되면서 성석을 기계로 깎아 기성품처럼 각이 잘 잡히게 쌓았다.
투박하고 고풍스러운 풍경이 사라지며 레고 블록을 쌓은 듯 천편일률적이라 모양이 빠진다.
성북동, 시간을 담다.
"성북동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한다."
성북동(城北洞)이란 지명은 한양도성의 북쪽에 자리한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 때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명승지로 풍류객들이 모여들던 곳이자,
복숭아나무나 앵두나무 같은 과실수 재배를 생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조선 말기 한양이 팽창되고 일제강점기 문인들의 작업실, 분단과 한국전쟁 전후
이주민들의 새로운 삶터로서 성북동에는 다양한 시간과 삶이 쌓여 왔다.
지금 그 시간들은 크고 작은 집들과 곧거나 굽은 골목길로 어우러진 소담한 풍경으로 남아있다.
수백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는 이곳은 옛 지도 속 길게 늘어진 산맥과 수많은 봉우리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골목 사이사이를 가만히 걷다 보면 오랜 시간이 만들어 낸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시 주민들의 삶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작가(김소나, 박연희)>는 옛 지도(수선전도, 1840년대, 김정호) 위에 성북동의 지나간 시간,
지금의 시간, 그리고 다가 올 시간을 한 화면에 담아보고자 하였다. (안내문)
혜성교회도 오래된 교회인지 한양도성 일부를 담장으로 깔고 앉았다.
완성된 한양도성
완성된 한양도성은 나라의 안정과 왕의 권위를 온 백성에게 보여주는 상징물이며,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성은 외부와 연결하기 위해 모두 8개의 문을 설치하였다.
동서남북에 4개의 큰 문이 있고 그 사이에는 4개의 작은 문이 있어 사람들의 통행로가 되었다.
사대문四大門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유교의 덕목(인仁 • 의義• 예禮• 지智)을 담아 이름을 지었다.
도성에는 사람이 아닌 하천을 위한 문도 있었다.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있었던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이다.
남산 정상의 성벽 부근에는 통신시설인 봉수대가 있었다.
횃불과 연기를 통해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신호들이 남산 봉수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왕에게 보고되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의 수도인 한성부의 경계이자,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수도 성곽이다.
1394년(태조 3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1396년 두 차례에 걸쳐 전국적으로 인력을 동원하여 쌓았다.
이후 15세기(세종 연간), 18세기(숙종 연간), 19세기(순조 연간)에 걸쳐 여러 차례 대규모로 수리 및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세종 연간에는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으면서 18.6km의 전 구간이 석성으로 완성되었다.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전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성벽을 고쳐 쌓았기 때문에 다양한 축조 방식과 성돌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남산 자락의 한양도성은 1925년 조선 신궁이 세워지면서 상당 부분 허물어졌는데, 2013~2014년 발굴
조사를 통해 1~4m 깊이의 땅속에 묻혀 있던 기단석부터 1~5단의 성벽이 드러났다.
조사 결과, 원래 한양도성의 성벽 높이는 6m로 추정되고 있다.
이 구간에서 발굴된 성돌은 그 높이와 크기, 모양이 매우 불규칙하고 다양하게 남아 있어 한양도성이
조선 왕조 전 시기에 걸쳐 계속해서 고치거나 새로 쌓아 올린 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안내문)
한양도성 북악 구간의 마지막이자 낙산~흥인지문 구간의 시작인 혜화문에 도착했다.
이 혜화문은 09:00에 문을 개방한다기에 문이 열릴 때까지 10여 분을 앉아 쉬었다.
이렇게 한양도성 네 구간 중 가장 어려운 인왕산과 북악산 구간의 한양도성 순성을 끝냈다.
나머지 구간은 낙산과 남산 구간 역시 각각의 구간별로 포스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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