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105
2023.6.19. (월) 오전에 잠시 탐방
이번 여행은 국립공원 스탬프 투어 여권에 태안의 학암포해변과 기지포해안의 스탬프를 찍는 것이다.
스탬프 여권을 수령한 후 학암포해변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어 기지포해변의 스탬프만 찍었다.
이후엔 충청수영성, 보령읍성, 부여 가림성, 공주 공산성, 부여 나성, 부소산성을 탐방하는 것으로
이틀간의 여행은 기지포 해변 탐방과 산성 탐방으로 마무리 짓는다.
ㅁ 백제의 왕성 웅진성(공산성)
공주의 옛 이름은 ‘고마나루’라고 하며,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한다.
웅진은 백제의 도읍 한성(서울)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되면서 새로운 도읍이 되었다.
웅진도읍기(475~538년) 백제의 왕성은 웅진성이며, 지금의 공산성이다.
사적 제12호로 지정된 공산성은 북쪽에 흐르는 금강과 급경사를 이루는 공산(公山)의 산세를
활용하여 축조된 천연의 요새이다.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있는데,
동쪽구역의 토성 구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0년대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다.
특히 백제시대에는 왕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성벽, 연못, 나무창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토기, 기와, 중국제 자기, 무기, 목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정관 19년(645)’ 명문이 쓰인
화려한 옻칠갑옷이 출토되어 주목되었다.
공산성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한 이후에는 5 방성 가운데 북방성이었고,
무왕 31년(630) 사비의 궁궐을 수리할 때에는 왕이 공산성으로 거 처를 옮기기도 하였다.
아울러 660년 7월에는 의자왕이 사비에서 공산성으로 피신해 와 나당연합군과 대치하다 항복한 곳이다.
백제 멸망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주의 치소로, 조선시대에는 충청감영과 중군영이 자리하는 등,
오랫동안 지방의 거점이자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출처_공주시 문화관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공주 공산성은 어젯밤 탐방에 이어 아침에 한 번 더 탐방한다.
공주 공산성의 아름다움은 백제 시대에 만든 것이기는 하나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지며
증·개축이 이루어져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백제의 문화로 유네스코 세계문화로 지정되었으나 백제시대의 산성이나 문화는
거의 남아있지 않는 아이러니가 있다.
ㅁ 공산성 깃발이야기
공산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체험한 것이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표현된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 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송산리 6호분 벽화의 사신도는 당시 왕성했던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국제교류를 보여준다.
깃발의 바탕색은 황색이다.
이것은 백제의 나라색이며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여 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깃발의 테두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한 것이다.
깃발의 배치는 송산리 6호분에 그려진 사신도의 위치를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배치하였다.
(안내문)
백제는 한때 서울, 지금의 하남에 수도를 정하였다가 고고루의 침범으로 남하하여 공주에 도읍을 정하며
주변에 많은 산성을 쌓았다.
그런 과정에서 생겨난 공주 공산성은 동북쪽으로 흐르는 금강이 큰 해자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산성이 견고하여 이후 조선시대까지 천혜의 요소로 관리된다.
ㅁ 백제 성벽
공산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로 토성으로 알려진 동쪽구간 735m를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석성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대부분의 성벽은 조선시대 이후에 고쳐 쌓은 것이다.
백제시대의 공산성은 지형에 따라 토성과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이는 공산성 동쪽 구역과 조선시대 석성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동쪽구간은 전체가 토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조사를 통하여 토성과 석성이 함께 축조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토성은 고운 흙과 모래흙을 번갈아 다져서 쌓는 판축기법을 주로 이용하여 조성하였다.
석성은 골짜기 쪽은 내외벽 모두 돌을 쌓아 만들고, 경사면은 돌로 외벽을 쌓고
내벽은 외벽의 돌과 맞물리도록 돌을 보강한 후 흙을 쌓아 축조하였다.
(출처_공주시 문화관광)
백제왕도 핵심유적
공주 공산성 추정왕궁지 발굴조사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인 공주 공산성의 보존 정비를 위한 학술발굴조사 현장이다.
•조 사 명: 공주 공산성 추정왕궁지 발굴조사
•조사면적: 3,200㎡
•조사기간: 2022.07.11.~ 2022.11.18 (현장조사 73일)
•조사 기관: 공주대학교역사박물관
※ 아직 발굴조사가 계속 진행 중이다.
쌍수정 앞 광장은 백제왕도 핵심유적 공주 공산성 추정왕궁지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ㅁ 공산성 진남루 충남 문화재자료 제48호
공산성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三南*의 관문이었다.
공산청은 사방에서 문 터가 확인되는데,
그중에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 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에는 영동루를,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지었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
*삼남: 남쪽의 3도道, 즉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안내문)
공산성 영동루
공산성 영동루는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 문루로 백제시대 성벽이 축조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1980년 발굴 당시 문 터와 문 양옆에서 문을 지하고 있던 받침들을 확인하였다.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철종 10)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에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문루의 이름을 알 수 없어서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영동루라고 지었다.
*문 루: 문 위에 세운 높은 건물
•공산지: 1859년 원종 10에 편찬된 충청도 공주록(지금의 공주시)의 읍지 (안내문)
공산성은 영동루에서 광복루를 돌아가는 최남단인 이곳 성벽만 토성이다.
토성이기는 해도 성벽 자체가 높고 경사가 급해 석성만큼이나 지키기 유리한 지역이다.
ㅁ 공산성 광복루 충남 문화재자료 제50호
공산성 광복루는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층 누각*이다.
공산성 안에 주문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부출의 문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공주 시민들이 힘을 모아 보수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4월에 김구, 이시영 등이 공주를 방문하여 이곳을 둘러본 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광복루로 고쳤다.
*누각: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건물
(안내문)
공산성 동북쪽을 흐르며 지나가는 금강은 자연적인 해자의 성격을 띤다.
한겨울에 강물이 꽁꽁 얼기 전까지 이곳으로 침입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금강변으로 경사가 심해 이곳은 몇 명으로도 성벽을 지키기 좋은 곳이다.
공산성의 물을 저장하던 연지와 오른쪽 건물은 연하루이다.
이번에 저곳으로 가지 않는다.
연지로 나가는 비밀문인 암문은 겨우 한 사람 빠져나갈 공간 밖에 안 된다.
우측으로 드러난 통로도 있다.
ㅁ 영은사
조선 세조 4년 1458에 세워진 사찰이다.
묘은사로 불렸다가 이팔의 난(1624) 때에 이 절에 피신한 인조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고쳤다.
광해군 8년 1616에는 이곳에 승장僧將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고,
여기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작으나 단아한 모습의 원통 전문화개자료 제51호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유형문화재 제160호)이
모셔져 있으며, 청동범종(유형문화재 제161호), 아미타후불탱화(문화재자료 제376호),
칠성탱화(문화재 자료 제377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문)
ㅁ 영은사 대웅전 충남 문화재자료
영은사 대웅전은 영은사의 중심 법당이다.
영은사 대웅전에는 정면에 '원통전圓通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법당 안에는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전이라는 이름은 "모든 곳에 빠짐없이 널리 두루 통한다”라는 의미로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뜻한다.
영은사 대응전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건물은 1933년에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법당 안에 놓인 불단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공청남도 유형문화적이 가운데 모셔져 있고,
아피타후불화(청남도 문화재자료), *칠성탱화(충남 문화재자료), *신중탱화, *독성탱화, 산신화
등의 불화가 걸려 있다.
* 칠성화: 천재지변을 막을 수 있는 '칠원성군'을 그린 족자.
* 신중평화: 화엄경을 보호하는 '화엄신장'을 그린 족자.
* 독성화: '지혜'를 상징하는 '나반존자'를 그린 족자. (안내문)
성벽에서 보는 연지와 만하루
2023.7.15. 전국에 내린 폭우로 공주 공산성 아래로 흐르는 금강이 범람하며 만하루가 강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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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공주 잠종냉장고
공주 잠종냉장고는 충청남도에 있는 잠업 농가에 누에 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 저장 시설이다.
1914년 충남잠업강습소가 공주에 생기면서 누에를 치는 보관소와 뽕밭이 새로 조성되었다.
누에의 먹이인 뽕잎이 나는 5월까지 누에의 부화를 늦추기 위해 잠종냉장고가 공산성에 만들었다.
겨울철 금강의 얼음을 왕겨에 싸서 잠종냉장고에 넣어 두면 여름 내내 녹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를 이용하여 누에의 부화 시기를 늦추었다.
공산성 내의 잡종냉장고가 있는 지역을 '빙고재'라고 하는데, 「공산지(公山誌)에는 공산성 안에 빙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조선시대 빙고지를 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지: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 충청도 공주목(지금의 공주시)의 읍지
(한 고을의 역사와 문화, 풍속 등을 기록한 책) (안내문)
누에로 비단을 만드는 의류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지 비단은 최고의 옷이었다.
그렇게 만든 비단은 고대에 서양으로 수출되며 최고의 사치품으로 환영받았다.
이 비단이 중국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거처 서역으로 이동되던 통로를 실크로드라 한다.
이런 비단은 화려함과 따듯함, 방풍, 방한 등 현대 기술로도 깨기 어려운 기술을 고대 중국인들이
처음 만들며 상당한 기간 동안 원천기술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
잠종냉장고 위 공터에도 건물이 있었음직 하다.
공산성이 워낙 볼거리가 많다 보니 이렇게 근사한 연리근에 관심 두는 사람도 없다.
공산성 왕궁 관련 유적지라는 데,
우리는 로마의 석조문화처럼 대리석이란 돌이 없어 목조 건물은 남아 있지 않다.
대리석은 가공하기 쉬운 반면 우리나라는 화강암은 가공하기 어려워 석조건축물이 없다.
삼국시대에 불교문화를 수용하며 석굴암 같은 걸작은 만들었으나 화강암으로 건물을 만들지는 못했다.
이곳이 백제시대 문화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고 해도 백제시대의 건물이
어떻게 자리하고,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으니 섣불리 복원하기도 힘들다.
게다가 통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며 계속 건물이 들어서고 없어지며 이렇게 공터로 남았다.
이렇게 공터로 남은 곳에서 백제시대의 초석을 찾는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우니
온전히 백제시대의 유물을 복원한다는 건 학자들의 합의에 의해 고증할 수밖에 없다.
복원된다고 해도 그것의 상상의 결과일 뿐이다.
ㅁ 공주 공산성 공북루 유형문화재 제37호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쪽 문루*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望北樓)가 있었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 36)에 공산성을 크게 고치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월파당(月波堂)을 함께 지었다.
여러 차례 고쳐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 년에 철거되었다.
공부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동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음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러 편의 글과 시를 걸어 두었다.
*문루: 문 위에 서운 높은 건물 (안내문)
ㅁ 공산성 왕궁 관련유적
'공북루' 남쪽의 넓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백제시대 대규모 왕궁 관련유적이다.
2011년~2017년까지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통하여 현재 지표면에서 약 300~700cm 아래에서
백제가 용진에 천도한 475년 이후부터 만들어진 약 70여 동의 기와건물지와 도로, 축대, 배수로, 저수시설,
석축 연못, 철기 공방지 등 다양한 시설이 확인되었다.
백제 왕궁 관련 건물지가 자리한 곳은 약 30,000m의 넓은 평탄지를 이루고 있지만,
원래의 지형은 사방에서 물길이 모이는 골짜기에 해당한다.
나뭇가지와 흙 등을 켜켜이 쌓아서 다지는 부엽공법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통하여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축대와 도로·배수로를 만들고 기와건물을 세웠다.
도로는 남북도로와 동서도로가 있는데, 남북도로는 약 600cm의 노면(路面)을 갖추고 있다.
도로의 양 측면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어 계획적인 공간배치를 이룬다.
건물지는 주춧돌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구멍을 판 후 기둥을 세워 만든 기와건물로,
일정한 열을 이루어 자리하고 있다.
건물지 주변에서 대통사(大通寺) 명 벼루와 사람 얼굴이 있는 기대, 공작그림이 있는 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양의 벼루가 출토되어 백제시대 최고의 관청시설이 자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밖에 645년(의자왕 5년)을 가리키는 '정관19년명(貞觀十九年銘)이 있는 화려한 옻칠 갑옷과 철갑옷,
마갑(馬甲), 큰 칼(大刀), 장식도(裝飾刀) 등이 출토되어 백제 중앙의 선진적인 공예기술을 살릴 수 있게 되었다.
백제 왕성으로서 명확한 역사성을 갖춘 공산성에서 백제 왕실의 생활문화를 살필 수 있는 화려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된 왕궁 관련유적이 조사됨으로써, 백제 웅진기 백제문화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었다.
(안내문)
남한에 있는 산성 중 북한산성, 남한산성, 수원 화성, 금정산성은 규모나 짜임새에 있어 크고 멋지다.
공주 공산성은 규모는 크지 않아도 견고하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공산성 공산정
공산정은 공산성 서북쪽 정상에 있는 정자이다.
공산정 안에 있는 백제 왕궁 관련 유적을 비롯하여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철교 등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와 야경은 뛰어난 아름다음을 자랑하고 있다.
공산정에 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18세기 후반의 충청도읍지 공주곡 지도를 보면
'후락정(後樂亭)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공산정은 1970년대에 새롭게 만든 것으로 이전에는 유신각 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렸다.
'공산정'이란 이름은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지은 것이다. (안내문)
공산정은 누구나 올라갈 수 있다.
사방이 뚫려 어디를 보던 조망이 좋다.
금강을 지나가는 금강교와 백제큰다리
어느새 공주공산성을 한 바퀴 다 돌았다.
어젯밤에도 한 바퀴 돌며 야경을 멋지게 야경을 감상했지만, 아침에 다시 봐도 여전히 멋지다.
백제의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온 공주 공산성이다.
세월이 지나며 더욱더 견고한 형태로 증개축된 전략적 가치가 많은 산성이다.
어쩌면 현대전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멋진 산성이다.
연 이틀 계속해서 공주 공산성을 보는 행운을 누렸으니 복된 하루를 이렇게 시작한다.
어젯밤의 공주 공산성 야경이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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