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48
2023.4.27. (목) 12:18~14:08, 1시간 50분 산행, 5.8km 이동, 구름 조금 낌
이번 세종시 방문에는 두 가지 미션을 갖고 왔다.
하나는 먼저 탐방한 운주산의 운주산성이고, 두 번째는 들판 건너편에 있는 금성산 금이산성 탐방이다.
운주산성 탐방을 끝내고 금성산으로 가는 길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지만 버스 정류장은 제법 멀다.
손쉬운 방법은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는 것이지만, 즐풍은 제법 먼 들판을 가로질러 버스를 한 번 타는 것으로 끝냈다.
봉고차보다 조금 더 큰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도 500여 m를 걸어 금이산성 이정표를 따라 산을 오른다.
어느 중년의 부부를 만나 금이산성을 간다고 하니 이쪽으로는 등산객이 별로 없어 길에 낙엽만 수북하다고 한다.
마을을 지나며 만난 등산로는 이내 참나루 낙엽이 쌓여 등로는 뚜렷하지 않아도 짐작으로 산을 오른다.
그렇게 처음 만난 금이산성은 사람이 떠난 초가집이 무너진 듯 온전한 곳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황폐함 자체다.
ㅁ 금이성(金伊城)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5호. 연기군 전의면에서 공주로 가는 도로를 따라 약 4㎞ 정도 남쪽으로 가면
달전리 부락에 이르게 된다.
이 부락의 동쪽 표고 424m의 금성산에 둘레 약 500m 정도로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성의 전체적인 평면은 말각방형(抹角方形)이며, 정상부의 외측은 내외협축으로 축조하고 있으며,
석재는 자연할석을 이용하고 있다.
문지는 2개소가 확인되었는데, 가장 잘 남아 있는 북문지는 너비 5m 정도이며, 성
안의 물은 동쪽 성벽이 통과하는 작은 골짜기로 모이는 이곳에 수구지와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안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백제시대 토기 편과 와편이며, 와편은 격자문과 어골문이 많이 출토될 뿐이다.
산성의 동북방에는 운주산성(雲住山城)이 있고, 북으로는 고려산성·증산성·전의읍 내리산성·
이성산성(李城山城, 충청북도기념물 제77호)이 거의 일직선으로 바라다 보인다.
산성 아래에는 전의에서 공주로 통하는 큰 길이 통과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이성에 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데, 금성산에 산성이 있어 금이성이라고 한다라고 하고,
『대동지지』에는 운주산남성(雲住山南城)이라고 하고 속칭 금성산성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성의 둘레는 다 같이 1,528척이라고 하였으며 샘도 한 곳이 있었으나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출처_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운주산성을 내려와 들판을 가로지르고 철길을 넘어 베어트리파크 앞에서 5분 정도 기다려 버스를 탔다.
하루 몇 번 다니지 않는 마을버스를 많이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다.
마을버스 종점에서 마을 끝에 있는 송성지 저수지를 지나며 본격적인 산행에 접어든다.
2km를 지나며 금이산성 석축을 만난다.
산성까지 오르는 동안 특별히 볼 게 없다.
세종레이캐슬 CC 방향에서 오르면 비암사라는 제법 볼만한 사찰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금성산에 있는 금이산성이 목표라 최단 코스로 산을 오른 것이다.
초봄을 막 지나는 계절이라 아직 싱그러운 나뭇잎이 보기 좋다.
별로 땀도 흘리지 않고 걷을 수 있다.
이곳을 탐방하며 처음으로 온전한 형태의 성벽을 본다.
안쪽만 온전하지 밖은 일부 붕괴된 형태다.
성벽이 무너져 밖으로 뒹구는 돌은 산사태가 난 듯 제법 멀리까지 이동했다.
삼국시대에서도 백제의 토기와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약 1,5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그렇게 무심하게 흘렀다.
오전에 다녀온 운주산성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산맥을 달리해 이곳 금이산성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작성산을 지나 흔적만 남은 이성을 만날 수 있다.
이성을 블로그로 검색하면 자세히 보지 않고는 산성이란 걸 알아내기도 힘들다.
4km 남짓 더 걸으면 되지만 오늘 굳이 갈 생각은 없고 다음 기회로 미룬다.
2년 전 세종시에서는 금이성에 대한 역사적 기치를 찾기 위해 심포지엄을 열었다.
그 심포지엄을 기치로 금이산성 복원에 시동을 걸지도 모르겠다.
산성이 무너졌다고 해도 그 돌이 그대로 남았으니 복원 가능한 자재는 도처에 있는 셈이다.
금이성은 세종시 전의면 양곡리와 전동면 송성리 사이의 금성산(金城山)에 축조된 석축 산성이다.
따라서 금성산성(金城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이 금이성에 대해서『신중동국여지승람』 전의현 산천조에는 “金城山 在懸南八里 有古石城”이라 되어 있고,
고적조에서는 "금이성은 운주산에 있다.
석축으로 주위 1,528척에 우물이 하나 있으며 금폐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전의현 성지城池 조에는 “운주산남성은 남동 8리에 있다.
1,528척에 우물이 1개소 있으며 속칭 금성산성이라 한다.”라고 하여 금이성이 운주산 남성으로 불린 적도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산성은 해발 430m의 금성산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금성산은 전의면읍 내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중간쯤에 솟아 있다.
이러한 금성산의 동쪽과 서쪽으로도 산지(山地)가 형성되어 있다.
동쪽과 서쪽, 남쪽으로는 그다지 전망이 좋지 못한 반면에 북쪽으로는 읍내리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성벽은 전체를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였는데, 대부분 이미 붕괴된 상태다.
남벽이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며, 이곳 성벽의 폭은 4.5~5m에 이르며, 높이는 3m 정도가 남아 있다.
성벽의 상부가 남아있는 구간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원래 성벽의 높이는 이보다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약 714m에 이른다.
산성과 관련된 부대시설로는 문지(門地)를 들 수 있다.
문지는 동문지, 서문지, 북문지 등이 확인되며, 남벽 쪽에도 문지의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남아있는 문지는 모두가 현문식(懸門式)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단과 동남·서남단에 망루지의 흔적이 있고, 성내 정상부에도 건물지의 흔적이 있지만 자세하지 않다.
성내에서는 항아리, 대접, 사발 등과 어골문(魚骨文), 선조문(線條文)의 기와 편, 토기 편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을 근거로 고려시대에 축조했다는 견해도 있고,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_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조망이 좋은 이곳에 최근에 정자를 짓고 제단을 쌓았다.
얼마나 허술하게 쌓았는지 모서리가 주저앉아 붕괴 직전이다.
이렇게 현대 기술로 제단을 쌓은 게 쉽지 않은 건지 능력 없는 업체에 맡긴 건지 모르겠다.
금이산성은 둘레가 714m라는 작지 않은 포곡식 산성이다.
남아있는 문지로 볼 때 현문식이라고 하는 데, 그걸 유추해 낼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
석축은 다 무너져 내려 즐풍은 도저히 알아낼 방법이 없다.
하지만 개거식보다 현문식이 방어에 유리함은 틀림없다.
개거식과 현문식 성문의 차이
이곳은 무너진 석축 사이로 조금 온전한 형태로 남은 성벽이 보인다.
그것만이라도 보존할 생각이었는지 짐승이라도 다니지 못하게 울타리를 설치했다.
성병 안쪽으로 가장 온전한 형태로 길게 만은 성벽이다.
물론 밖의 성벽은 거의 무너진 상태다.
1,500여 년 전에 쌓은 산성이라도 돌을 다듬어 규모 있게 잘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상태가 좋은 서쪽 성벽이다.
서성벽을 지나 남쪽은 계곡이 지나간다.
그 계곡은 제법 너른 평지형이다.
금이성에서 가장 취약한 구간이기도 하다.
다시 처음 금이성과 마주하던 지점을 지난다.
이로써 성을 한 바퀴 돌았다.
금이산성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이곳에서 벌어졌을 치열한 전투가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밀고 밀리는 전투 끝에 어느 한쪽의 승리도 얼마 가지도 못하고 주인이 또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금이성을 끝내고 나가는 길에 보는 바깥쪽 산성으로 가장 온전한 형태의 모습이다.
청동기시대를 지나 철기시대로 접어든 지 제법 된 시기라도 연장도 변변치 않던 때
이렇게 돌을 다듬어 훌륭한 성벽을 쌓았다.
민초들의 노고가 말이 아니었겠다.
두 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금이성 탐방을 마쳤다.
마을에서 내려와 마을버스를 기다린다고 카맵에서 안내한 정류장에 있었더니
들어올 때와 달리 버스는 큰길로 쏜살같이 지나간다.
눈앞에서 보고도 버스를 놓쳤다.
결국 지름길을 이용해 30분을 더 걸은 끝에 하루 다섯 차례 발매하는 진의역에서 기차를 타고 귀가했다.
산성이나 읍성 또는 도성을 탐방한다는 건 전쟁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일이다.
한때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지만 이젠 남아있는 핏자국은 보이지 않고 함성도 들리지 않는다.
칼과 창으로 찌르고, 화살이 난무하던 시절이다.
체력이 강하고 무기를 잘 다룬다고 해도 전투를 지휘하는 대장의 능력에 따라 언제 든 전세는 뒤바뀐다.
조그만 전투라도 그럴진대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의 능력은 더욱 탁월해야 한다.
백악관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불러 박수를 받는 것으로 외교를 잘했다고 보지 않는다.
미국과 중국이 피 터지게 싸우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이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어느 편에 서는 것보다 두 강대국을 어떻게 이용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지금처럼 한쪽에 몰빵 하면 다른 한쪽은 모두 포기해야 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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