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_194
2022.10.1 (토) 15:04~17:00(1시간 56분 탐방, 3.78km 이동)
오늘 전주에 도착해 많은 곳을 본 후 자만 벽화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잠시 들렸다.
그때 눈에 띈 게 전주 남고산성이 주변에 있다는 걸 알았다.
남고산성은 전혀 듣지 못한 생소한 산성으로 궁금증이 생긴다.
남고산성을 다 돌만큼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부딪쳐보기로 하고 차를 몬다.
마을이 끝나자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하고 경사가 높아 길을 잘못 들었단 생각이 든다.
중간에 차량이라도 만나 브레이크를 잡으면 그 뒤는 속수무책이란 생각이 든다.
어렵게 남고산성 서문지에 주차하고 시계방향으로 탐방을 시작한다.
이곳은 사륜구동이 아니면 올라가선 안 될 지역이다.
□ 전주 남고산성 (全州 南固山城)
전주 남쪽에 있는 고덕산과 천경대, 만경대, 억경대로 불리는 봉우리를 둘러쌓은 산성이다.
남동쪽으로는 남원·고창으로 통하는 교통상의 중요한 곳을 지키고, 북쪽으로는 전주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이곳에 고덕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조선 순조 13년(1813)에 성을 고쳐 쌓고 남고산성이라 했다.
이 성은 유래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보인다.
순조 13년에 보수공사가 있을 때 성 안에는 4군데의 연못과 25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민가 10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성문은 동·서에 있었으며 각기 3칸, 6칸 규모의 누각형 문이 있었다.
서쪽에 비밀문이 하나 있었으며 동·서·남·북에 각각 하나씩 포루가 설치되어 있고,
관청, 창고, 화약고, 무기고를 비롯한 각종 건물이 즐비하게 있었다.
지휘소인 장대는 남·북에 각각 설치되었으며, ‘남고사’란 절이 있다.
현재 성의 둘레는 약 5.3㎞이다.
지금은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고 ‘남고진 사적비’가 산성의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남고산성 서문은 최근에 복원한 듯 문루를 세운 성벽이 흰색이다.
□ 서문지
남고산성의 서쪽 성문이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통로는 길이 6.0m, 폭 2.9m로써 좌우측 벽은 화강암 절석을 짜 맞추어 올렸던 것으로 파악된다.
동쪽 벽은 무너졌지만 내외의 우주석만 남아 있고, 서쪽 벽은 상부가 결실되었으나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서문은 석축으로 된 성벽 통로 위에 문루를 설치하였는데 「남고진사례」에 의하면 홍예문으로 6칸이었다고 전해진다.
서문지의 동편에는 1846년(헌종 12년)에 이삼만이 쓴 「남고진 사적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남고산성 보수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안내문)
도심과 멀지 않아 산성을 오르는 동안 전주시내가 잘 조망된다.
□ 남고산성
억경대 관망대 측면
전 주부 성인 남쪽에 위치한 이 산성은 전란이나 기타 유사시에 대비하여 식량, 병기 등을 갖추어 쌓은 성이다.
고덕산성 또는 신라 말기 견훤이 쌓았다 하여 견훤산성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주변 산세나 전주의 지세로 보아 훨씬 그 이전부터 성터였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성은 조선 순조 13년(1813)에 축조된 것으로, 산성 전체 돌레는 2,950m에 이른다.
선성내에는 지휘소인 북장대, 남장대와 서쪽에 관청, 군기고, 화약고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안내문)
억경대
억경대는 남고산성의 한쪽 모서리로 제법 높은 곳이라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으로 돌출된 치성이 있다.
안내문은 물론 억경대란 표지석까지 설치한 곳이다.
내려가며 뒤돌아 본 억경대 치성
이곳 성벽은 자로 잰 듯 곧은 구간이다.
완만하게 흐르는 구릉을 자로 잰 듯 깎아내며 산성을 쌓고 흙으로 채워 단차를 냈다고 생각 든다.
성벽은 약 2m 정도로 크게 높지 않은 구간이다.
억경대와 가까운 북문지
□ 남고산성
고덕산 자락을 따라 쌓은 이 산성은 고덕산성으로도 부르며,
후백제 견훤이 도성인 전주의 방어를 위해 쌓았다 하여 견훤성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성벽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인데, 그 뒤 조선 순종 13년(1813)에 고쳐 쌓고 남고산성이라 했다.
남고산성 안에는 많은 주민이 살았으며, 동·서에 성문을 두고, 관아·창고·화약고·군기고 등 각종 건물이 즐비했다.
산성 방어의 지휘소로 남장대와 북장대를 두고, 남고사의 승려들을 산성 수호에 활용했다.
남고산성은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는데, 현재 성의 돌레는 약 3km이다.
현재 성안에는 남고사와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모신 관성묘,
그리고 산성의 시설 및 규모와 그 연혁을 기록한 남고진 사적비가 있다. (안내문)
산성은 위치에 따라 제법 높은 곳도 있다.
이곳은 약 3m 정도의 높이를 보인다.
제법 큰 각을 이루며 방향을 바꾸는 산성
산성은 밖으로 드나드는 출입구를 만나며 이번엔 산성 밖으로 나가본다.
제법 규모 있게 잘 쌓은 산성은 높이가 약 4~5m 정도로 제법 높아 산성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지역이다.
이렇게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산성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데 산성이 높아 도저히 오를 수 없다.
제법 밖으로 돌고 난 뒤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마련된 곳으로 올라간다.
이곳 역시 성벽은 제법 높아 산성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는 지역이다.
성벽에서 자라던 나무가 태풍에 쓰러지며 성벽을 무너뜨렸다.
나무가 자라 노거수가 되면 거대한 돌이 수직으로 자라듯 큰 무게를 갖게 된다.
참나무는 뿌리가 깊지 못해 바람에 쉽게 쓰러진다.
간간이 성벽이 훼손된 구간을 만나기도 한다.
남포루가 있던 천경대다.
남고산성 둘레가 3km 정도에 불과해 벌써 거의 대부분을 돈 셈이다.
이제부터 서문지로 내려가는 구간이다.
이곳 성벽은 제법 높고 성벽 위는 계단으로 만든 게 불편했는지 성벽과 나란히 걷기 좋게 나무데크로 길을 냈다.
하지만 성벽을 따라 걸으며 조상을 숨결을 느껴본다.
계곡이 가까워지며 성벽은 제법 넓게 만들고 위에도 걷기 좋게 수평을 잘 맞췄다.
성벽은 계곡으로 떨어지니 포곡식 산성인 셈이다.
계곡을 따라 잠깐 내려가면 삼경사란 사찰이 있다.
즐풍은 내비 양이 안내하는 대로 남고사 입구의 서문지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며 불편을 겪었지만,
차량을 갖고 온다면 삼경사 아래에 있는 공용주차장에 차를 대는 게 운전도 수월한 게 좋다.
길과 만나며 갑자기 칼로 자른 듯 멈춰버린 성벽
도로에서 서암문으로 올라가는 길
성벽을 따라 내려오면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생각 없이 삼경사로 내려가게 된다.
도로를 내려가지 말고 잠깐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남고산성으로 오르는 길을 만난다.
잠시 오르면 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의 문인 서암문을 만난다.
안내문에는 서암문지라고 되어 있지만 이젠 서암문을 만들었으니 터라는 뜻의 지(址) 자는 없애는 게 맞다.
서암문이다.
안내문에 문설주석이 남아있다는 걸로 보아 나무로 문을 만들어 달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서암문을 지나며 제법 큰 바위가 성벽을 가로막아 자연적인 성벽이 된다.
이 바위 때문에 옆으로 돌아가야 새로 연결된 성벽을 만나게 된다.
새로 만든 성벽은 이렇게 바위에 덧대며 복원되었다.
이 끝은 절벽이니 일부러 갈 필요는 없다. 위험하다.
서문지에서 처음 산성을 오를 때처럼 진한 갈색 돌이 반긴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며 고려를 엎으려는 생각을 정몽주는 진작에 눈치챘겠다.
더군다나 이곳과 가까운 오목대에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로 스러져가는 고려를 비웃는다.
大風起兮雲飛揚 대풍기혜운비양 큰 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날리는구나
威加海內兮歸故鄕 위가해내혜귀고향 내 위력이 세계 만방에 더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누나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용맹한 인물을 얻어 온 사방을 지키리라
이 바위 두 번째 줄에 만경대라고 행서로 쓴 글자가 있으나 잘 보이지 않는다.
정몽주 글자나 이서구 시는 돌이 너무 단단해 깊게 새기지 못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다.
본을 뜨기 전에는 알아보기 힘들다.
□ 남고사지 (南固寺址)
이 터는 신라 문무왕 8년(668)에 명덕(明德) 스님이 세웠다고 하는 남고연국사(南固燕國寺)가 있던 자리이다.
「연국(燕國)」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산성 지역에 자리 잡은 절에 많이 사용되던 명칭이다.
조선 후기부터는 남고사로 불리었는데, 이 절의 승려들이 「남고산성」을 지키는데 한몫을 담당했다.
옛 남고사 터는 현재의 남고사 대웅전 서쪽 전방의 건물이 있는 곳이다.
현재 남고사 건물은 약 100여 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79년에 대웅전 등을 다시 지어 지금의 절 모습을 갖추었다.
(출처_문화재청)
서암문으로 돌아오는 것을 끝으로 남고산성 탐방을 끝냈다.
마지막으로 남고사를 둘러보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사찰은 썰렁하기만 하다.
한때 산성 안에는 관청, 창고, 화약고, 무기고를 비롯한 각종 건물이 즐비하게 있었다고 하니
읍성만큼은 아니더라도 군졸들이 이곳을 지키며 사람 사는 맛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건물도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쓸쓸한 사찰만이 이곳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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