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31. 목 06:52~13:34 (전체 시간 06:42, 전체 거리 17.km, 평균 속도 2.6km/h)
어제 한낮에 청명한 날씨가 너무 좋아 오늘 일기예보를 검색하니 마찬가지로 청명하다.
지난주말 북한산 단풍이 절정이었는데, 11월 초엔 남한산성 단풍이 한창일 것이란 소문을 믿고 오늘 휴가를 냈다.
작년 어느 블로그를 보니 남한산성의 단풍이 그렇게 멋져 보여 기어코 휴가를 내 찾아간다.
주말이면 강변북로가 제법 잘 빠져 45분이면 신사역에 닿는데, 평일엔 어떨지 몰라 첫버스를 이용하기로 한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샤워와 식사를 마치고 여유 있게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새벽 다섯 시는 이른 시간이라 아직 도로도 한산해 주말과 같은 시각에 논현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두 번 환승하며 남한산성역에 도착하니 6:45이라 아직 해 뜨기 전이다.
1번 출구에서 계속 직진해 1.8km를 걸어 드디어 본격적인 산행에 접어든다.
지하철 역에서 산행 들머리까지 거리가 너무 멀다.
남한산성 등산코스
돌탑공원
남한산성 입구의 단풍 나뭇잎은 아직 파랗다.
제법 오른 영도사 앞을 지날 때 비로소 단풍이 조금 든 나무가 보인다.
드디어 남한산성 성벽까지 올라왔으니 능선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양쪽으로 무릎 높이만큼 제1남옹성으로 연결된 성벽이 보인다.
가을 단풍이 높은 성벽을 오르지 못하고 옆으로 긴다.
남한산성 남문까지 600m를 걸어야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 200m 거리의 제7암문으로 들어섰다.
성벽이 제법 높아 월장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성안에서 본 제7암문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이다.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성벽의 방향을 방향을 바꾸어 암문을 설치한 것은 이 지형에 굴곡이 없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성벽이 적대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외부에서 암문이 관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안내문)
성벽을 들어서자 고도가 높아졌다고 제대로 된 단풍을 만난다.
시계 방향으로 돌며 첫 번째인 남문을 만난다.
남문(지화문)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다.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문이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이라고 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으로 들어왔다.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안내문)
남한산성(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백제 시조인 온조의 왕성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란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다.
왕자들이 피신한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곳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라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넓은 경작자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에 함락당하지 않고 47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작한 구조다.
인조 4년(1626)에 중앙부의 가장 큰 폐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안내문)
영춘정
남한산성에서 제일 큰 소나무다.
지금처럼 옛날에서 낙성식이 있을 때 기념 식수를 심는 문화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이 소나무는 수어장대가 생긴 1626년에 심은 소나무다.
그럴리야 없지만, 수어장대가 주인인 이 소나무의 기품은 수어장대만큼이나 늠름하다.
수어장대와 수어청
“한양 남쪽의 상비군, 수어청”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문과 남문 사이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지휘소 겸 적정 감시시설이다.
특히, 남한산성 방위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수어사는 조선시대 군사제도인 5군영 제도 중 하나인 수어청의 수장이기도 하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상비군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전쟁 중에 설립된 기관이 훈련도감이다.
훈련도감은 전쟁에 꼭 필요한 상비군을 훈련하고 유지하는 기관이다.
이 훈련도감과 함께 4개의 지방 상비군이 설치되는데, 그 중 남한산성에 설치된 군영이 바로 수어청이다.
조선은 훈련도감 설치 이후 수도 한양을 방위할 방법을 모색하여 먼저 화기를 사용하는 총포군을 양성할 수 있는 어영청을 설치한다.
다음으로 한양의 북쪽을 방어할 총융청을 설치한다.
총융청의 본부는 북한산성이었고 한양에 적군이 진입하기 전 북한산성에서 격퇴하라는 의미이다.
그 다음 설치된 것이 바로 남한산성의 수어청이다.
마지막으로 설치된 왕의 직할부대 개념의 금위영까지, 5군영 체제는 조선후기까지 이어 지는 핵심 군사제도였다.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안내문)
의병의 중심지 남한산성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의 중심지 ”
을미의병(1895~1896)은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을 계기로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동경조일신문(아사히신문)’은 남한산성의 의병연합군이 1,600여 명이라고 보도했다.
위협을 느낀 일본군은 남한산성에 조선군 친위대 1개 중대를 보내 산성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의병연합군 ‘남한산성 연합의진’에게 격퇴당했다.
연합의진은 이후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지만 실패했다.
정미의병(1907~1910)은 광주(현재 성남)지역 출신 남상목, 윤치장 의병장이 활약한 시기였다.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활동하고 을미의병, 정미의병 이후에도 여전히 남한산성이 독립운동,
대일 무장투쟁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자 일제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남한산성의 광주군청을 경안동으로 이전시켜 버린 것이다.
이로써 300년 간 군사·행정도시의 기능을 해 오던 남한산성, 의병투쟁과 독립운동의 성지였던 남한산성은
이후 점차 주민들이 떠나가며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안내문)
청량당 이야기
“남한산성의 주민들을 지키는 수호신 이회 장군”
청량당은 이회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주민들이 신으로 받들어 모실 만큼 이회 장군은 남한산성의 역사에서 특별한 인물이다.
설화에 따르면 이회 장군은 성의 남쪽 성벽을 쌓는 공사비를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남한산성 서장대 앞에서 참형을 당했다고 한다.
구명 성금을 모으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던 아내는 사형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쌀을 여울에 모두 던지고 자신도 투신했다.
나중에 조정에서 조사한 결과 이회 장군이 쌓은 남쪽 성벽은 미완성이나마 견고하게 축성된 것이 밝혀졌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회 장군의 설화가 사실과 가상을 잘 섞어 재창조되었다는 점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 당한 이회 장군의 전설은 성을 쌓은 백성들의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신성의 대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회 장군은 산성을 쌓은 수 많은 백성들의 공감을 얻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것이다.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안내문)
청량당과 마주 보는 위치의 향나무
나무를 지키는 금림조합
“남한산성의 귀중한 숲을 지켜 후손에게”
남한산성의 산림은 매우 잘 보존되어온 아름다운 생태유산이다.
이는 오래 전부터 산성 내의 숲을 보호하고자 하는 산성 주민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근대화 이전의 생활연료는 나무였기에 20세기 초반 대부분의 산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산성 안의 나무는 예외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금림조합’을 만들어 순산원을 두고 도벌을 막아 보호한 덕택에 지금처럼 살아남았다.
금림조합은 남한산성의 숲을 보호하기 위해 산감(山監 : 산림감시원) 50명을 선출하여 매일 6명씩 교대로 산림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산감은 극빈자 계층에서 선발하였기 때문에 숲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취약계층의 구제에도 도움이 되었다.
남한산 금림조합의 노력은 이후 2016년까지 90년에 가깝게 지속되었으며,
덕분에 남한산성은 귀중한 생태문화자원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안내문)
위상이 남다른 4개의 문
남한산성에는 4개의 문이 있다.
한양의 4대문처럼 남한산성의 4개 문은 좌익문(左翼門 : 동문), 우익문(右翼門 : 서문), 지화문(至和門 : 남문), 전승문 (全勝門 : 북문)이다.
한양 도성의 문 이름들 과 비슷하다.
가장 크고 넓은 지화문은 좌익문과 함께 남한산성의 핵심 도로인 봉화로에 설치된 성문이다.
왕의 행렬, 마차와 수레, 여러 장사치들과 주민들이 드나들었던 지화문은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좌익문과 이어진다.
이 길은 남한산성 옛길의 가장 핵심적인 루트이다.
남한산성 옛길은 산성 로터리를 중심으로 북문, 서문, 남문을 일주하는 노선을 따라 이루어진다.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안내문)
오늘 날씨가 청명하겠다는 예보를 믿고 왔으나 구름이 조금 낀 상태에 시내엔 가스층이 있어 롯데월드타워도 흐리게 보인다.
숯과 매탄터
“농성의 필수 연료, 숯의 보관소”
매탄터 또는 매탄처는 숯을 묻어 놓은 장소라는 의미이다.
남한산성에는 숯을 묻어 놓은 장소가 곳곳에 있었고 그 양도 상당했다고 한다.
남한산성 에 왜 숯을 묻어 놓은 것일까?
남한산성은 험준한 산세에 의지해 축조된 농성용 방어산성이다.
농성이라는 것은 적군이 물러날 때까지 성 안에서 버티는 전술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선 왕과 군대, 그리고 산성 주위 의 백성들은 모두 성 안쪽으로 이주한다.
이때 성 바깥의 논과 밭은 적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두 불태운다.
삼국시대의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 싸울 때 사람을 모두 소개하고 외부의 물자를 깡그리 불태우는 청야전술을 자주 사용했다.
남한산성에는 농성전에 사용할 연료를 항상 성 내부에 비축해 두었는데 보관이 용이하고 연기가 나지 않는 숯은 최적의 연료였다.
그래서 남한산성의 주둔군 막사 주위에는 숯을 대량으로 비축해 두었던 매탄처가 남아 있는 것이다.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안내문)
멀리서 보니 구불구불한 성벽이 만리장성처럼 보인다.
벌봉으로 나가는 암문이다.
병자호란
“우리 민족의 삶을 바꿔놓은 전쟁”
병자호란은 조선과 청나라가 군사력으로 부딪힌 동아시아의 대사건이다.
이 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급격하게 청나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우리 민족 역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 병자호란의 중심에 바로 남한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산성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각지의 근왕병과 지원병이 청군의 남한산성 포위를 물리치지 못 한 채 모두 패배했다.
설상가상으로 두 달 분의 비축물자가 바닥나자 결국 인조는 항복하기에 이른다.
인조는 송파에 위치한 삼전도로 걸어 내려가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이후 수많은 변화를 맞는다.
패배를 씻기 위해 북벌론이 대두되기도 하고, 명분 만을 중시하던 사상체계의 변화가 일어나 수많은 실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민중 계층에서도 패배한 전쟁의 결과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민담과 설화들이 창작되었다.
병자호란은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기폭제인 동시에 우리 민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역사의 분기점이 된 사건이었다.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안내문)
벌봉(蜂峰)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벌처럼 생겼다하여 벌봉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정기가 서려 있는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하여 이 바위를 깨트렸다는 전설이 있다.
벌봉은 512.2m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497m)보다 높기 때문에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쪽 성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을 청나라 군에 빼앗겨 작이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하여 화포로 성안까지 포격할 수 있었다. (안내문)
남한산성이 남한산을 중심으로 고원에 세워지다보니 산이란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작으나마 남한산 표지석을 보게 되니 산을 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동장대터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동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 동쪽이라 동장대라 불린다. (안내문)
동장대터에서 바라보는 벌봉 가는 방향
동장대를 지나며 도로와 접한 동문까지 내리막이다.
남한산성을 돌 때 단풍이 별로라 아쉬운 산행이었는데, 이렇게 포스팅하다보니 그래도 단풍이 제법 예쁘다.
올해 남한산성의 단풍은 별로 볼 게 없다.
남한산성 중에서도 단풍이 제일 좋은 곳은 산성마을도 아직은 단풍이 빠르다.
올해 단풍은 어디는 태풍이 지나가며 날씨가 안 좋아선지 가까이서 보면 볼품없다.
이렇게 멀리서 봐야 그나마 볼 만 하다.
남한산성의 사찰과 역할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어야 불교도 있다”
남한산성에는 유독 사찰이 많다.
남한산성 내에 있는 사찰의 이름을 하나씩 보면,
① 장경사 ② 망월사 ③ 동림사 ④ 옥정사 ⑤ 개원사 ⑥ 한흥사 ⑦ 남단사 ⑧ 천주사 ⑨ 국청사 ⑩ 영원사 등 무려 10개나 된다.
왜 이리 많은 사찰이 있는 것일까?
호국불교의 성지라는 신앙적인 측면과 함께 절이 많았던 또 하나의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승군의 편성 때문이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비로소 군사력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스님들은 목탁 대신 사람을 살리는 활인검을 들고 의병들과 함께 큰 활약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인조는 1624년 남한산성을 축성하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병을 조직적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운다.
그 결과 남한산성에 총 9개의 사찰(늦게 창건된 영원사 제외)이 들어서게 된다.
8도 승병들의 주둔지로 8개의 사찰이 배치되 었고 총괄본부의 역할을 하는 사찰이 하나 추가되어 9개가 된 것이다.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안내문)
사찰 주변의 단풍도 멋지나 아직 단풍이 제대로 들지 않아 방문은 생략한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멋진 단풍 풍경이다.
동문(좌익문)
남한산선 네 개의 대문 중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있으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동문은 좌익문이라고 한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안내문)
2014.6.22. 남한산성은 우리나라에서 11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카타르 도하)
등산코스 남한산성 옛길
“남한산성 등산의 매력은?”
일제강점기부터 등산객의 많은 사랑을 받은 남한산성의 매력은 무엇일까?
남한산성은 약 세 개의 산에 걸쳐 축조되어 있는 성곽이다.
남한산성의 최고봉인 남한산(552m)은 수도권 남부지역 주민들이 새해가 될 때마다 해맞이 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많은 등산객은 남한산, 청량산 두 곳 모두 해돋이를 보기에 일품인 장소라고 한다.
등산과 함께 남한산 성의 역사유적을 즐기는 방법으로 산행을 겸한 문화재 순례이다.
등산코스가 다양하고 자연경관이 우수하여 등산 애호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201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이후 다양한 문화유산, 잘 보존된 우수한 자연환경,
서울과 수도권 도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편리한 접근성 덕분에 많은 시민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 안내문)
수문
제2남옹성
옹성은 일반적으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이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용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옹성은 둘레가 318m로 다른 옹성과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안내문)
제2남옹성치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치가 설치되엇으며, 이 중 본성에 4개, 봉암성에 1개가 있다.
제2남옹성치는 남장대 바로 앞에 설치되었으며, 남한산성 치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남쪽은 지형이 완만하고 성벽의 굴곡이 약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설치했다. (안내문)
남장대터
이곳에 도착하며 산성을 한 바퀴 돌았다.
남한산성 마을의 단풍이 가장 좋다기에 내려갔으나 아직 단풍이 다 들이 않았다.
잠깐 마을을 둘러보고 서둘러 귀가한다.
남한산성 산성리
“한양 다음으로 큰 완전한 소비 도시, 산성리”
조선시대 한양은 2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18세기 후반 산 업혁명 시기 영국 런던의 인구가 5만 명이었다는 사실에 비교해 보면 가히 한 양의 인구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남한산성 옛길이 위치한 산성리 지역은 한양에 인접한 소비도시였다.
토박이 주민에 따르면 산성 내 주민들이 주변 마을사람들을 촌놈 취급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이다.
1627년 (인조 5년) 광주부의 읍치(邑治 : 행정중심지)를 산성 내부로 옮기면서 산성리의 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95년 갑오경장 이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광주유수부가 폐지되고,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까지 일어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규모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일제에 의해 산성 내에 위치하고 있던 광주군청이 경안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
군사도시, 행정도시의 위용은 완전히 사라지고, 근대화 시기로 접어들며 주요 도로가 남한산성을 제외한 채 건설되었다.
이후 한강 이남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은 한적한 마을로 점차 변화하여 잠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홈피 안내문)
행궁 입장료가 2,000원이다.
경기도민은 무료 입장이라는 데,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아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한다.
남한산성 단풍은 4~5일 뒤가 절정이겠다.
단풍이 절정이라 해도 벌써 잎이 말라가므로 별로 볼게 없겠다.
오늘도 단풍은 별로였으나 사진은 그래도 제법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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