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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삼성산~호암산 산행과 호암산성 탐방

by 즐풍 2022. 9. 5.

2022_163

 

 

 

2022.9.2 (금) 08:30~16:35(여덟 시간 산행, 11km 이동)

 

 

한여름 무더위가 지나갔으니 이제 다시 산행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젊을 땐 산행해도 별로 땀이 흐르지 않더니 어느 순간 땀샘이 터졌는지 요즘은 제법 땀이 많아 산행도 겁난다.

어느 연예인이나 축구 감독을 보면 유난히 땀을 많이 흘려 겨드랑이가 잠깐 동안에도 축축이 젖는 걸 볼 수 있다.

당사자들의 불편한 입장과 달리 관객은 이런 걸 보는 것도 꿀잼인 데, 즐풍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이번엔 바위가 많지만 높지 않아 힘들지 않게 오르면서도 풍경이 좋은 삼성산과 호암산을 연계 산행하기로 한다.

호암산을 다닐 때 호암산성이  있다는 안내문을 보기는 했으나 그동안 산성을 직접 본 기억이 없다.

이왕 산성이나 읍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오늘 산행의 중심은 호암산성이니 삼성산은 들러리인 셈이다.

하지만, 호암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 너무 오래되어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겠단 생각이 든다.

 

 

 

□ 삼성산

 

'삼성산'은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 

관악산은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 소재 온온사가 있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5리 지점에 있는 과천현의 진산이다.

삼성산의 유래 또한 설이 구구하다. 

보통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다.

아울러 삼성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정화시켜 「삼성산(三聖山)」이라 칭했다는 설이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불교계 일각에서는 불가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인 아미타불과 그 왼쪽에 있는 관세음보살 및 오른쪽에 있는 

대세지 보살을 삼성(三聖)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산중에는 삼막사를 비롯하여 염불암, 망원암, 안양사, 성주암(서울) 등의 사찰이 있다.

임진왜란 때 (1592)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역임하고 후에 우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생전에 

이 산에 올라 읊은 「차유삼성산운(次游三聖山韻)」이란 장시와, 일제강점기에 고백록(高百祿)의 시조가 전해진다, 

또 일찍이 (900) 왕건이 금주, 과주 등의 고을을 정벌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가다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안양사를 지어 오늘날의 안양시명이 탄생되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출처_대한민국 구석구석)

 

 

 

집을 나서며 필요한 건 다 챙긴다고 했는데, 핸드폰을 소지하지 않은 걸 알았을 땐 너무 멀리 왔다.

핸드폰에 있는 신용카드로 교통비를 결제할 수 없어 현금을 쓰려니 지하철 이용이 불편하다.

아쉬운 건 등산 앱 사용을 못하니 거리와 배지, 경험치, 순위 등이 올라가지 않는 것이다. 

결국 카메라 사진에 저장된 첫 번째와 마지막 사진으로 산행 시간을 확인하고,

카카오 맵을 통해 거리를 측정하니 정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저기 보이는 거대한 암봉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게 된다.

 

이 바위 참 거대한 거물을 보는 느낌이다.

분기탱천하게 하늘로 향한 미사일 같기도 하니 핏줄인 북한은 그만두고 중국이나 러시아에 한 방 먹여라.

그리하여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 영토인 만주와 연해주를 찾아오자.

 

바위는 거대하게 앞을 가로막지만 우측으로 난 길은 다닐만하다.

 

 

 

수리산 방향

 

수원 광교산, 백운산 방향

 

푸른 산에 불꽃처럼 일어선 바위가 멋지다.

 

경인교대 경기캠퍼스

 

 

 

 

 

학우봉

 

골격만 남은 암릉

 

 

 

 

 

지금까지 가장 많이 다녔던 북한산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삼성산, 관악산이 한계선이다.

관악산보다 작은 삼성산도 알고 보면 바위가 산을 멋지게 수놓았다.

호암산의 산성을 보는 게 주목적이지만 당장 보기엔 삼성산이 훨씬 멋지다.

 

관악산에 6개, 삼성산에 5개의 국기봉을 포함해 모두 11개의 국기봉이 있다.

최근엔 관악산 육봉 국기봉이 사라졌는데, 이 모든 국기봉을 도는 11국기봉 산행이 한 때 유행했다.

이러한 국기봉을 다 돈다는 건 업다운이 무척이나 심해 체력과 인내를 요하는 힘든 여정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예 생각조차 못하지만, 즐풍은 벌써 세 번이나 끝냈으니 이렇게 많이 끝낸 사람은 없다.

언젠가 또 세상이 무료하다고 생각들 때 불현듯 고행을 자처하고 나설 때가 있을 것이다. 

 

삼성산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삼성산 국기봉이다.

 

뒤돌아 본 삼성산 국기봉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이 애처로운 소나무에 눈이 간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이 가지 저 가지 내어 주고 껍질까지 다 벗겨진 채 힘들어 삶을 이어간다.

등산객의 손을 너무 많이 탔다, 미안하다 소나무야...

 

숲 사이로 조금 드러난 바위에서 주변을 조망하는 등산객

 

어려운 듯 경사진 바위에도 발 디딜 틈이 있으니 조심스럽게 한 발 두 발 건넌다.

 

마지막 구간엔 전에 없던 와이어 체인이 걸렸다.

초심자들이 좋아하겠다.

 

건너편 관악산 정상

 

한참을 더 가야 하는 삼성산 정상

 

 

 

바위틈바구니 속에서 들락거리던 다람쥐가 결국 들어가더니 안 나온다.

녀석들은 야생동물 중 인간과 가장 친화적이다.

언젠가 설악산 토왕성폭포 전망대에서 다람쥐가 다가올 듯 말 듯하길래 빵 부스러기를 줬더니 

결국 손바닥에 있는 빵부스러기까지 먹는다.

그놈들 사람이 거의 해치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아는 모양이다.

 

삼성산 바위는 그리 높지 않아 돌아가지 않아도 조금만 용쓰면 쉽게 오를 수 있다.

보기엔 위험해 보여도 어렵지 않게 지나간다.

 

통신탑 등이 정상을 차지해 이곳에 삼성선 정상 표지석을 세웠다.

 

 

 

웬 바위가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크냐...

 

 

 

 

 

산악자전거를 타고 산을 오르내리는 바이크 마니아를 보면 존경스럽다.

기어 변속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거친 바위가 많은 골산에서는 들고 다닐 때도 많다.

이분은 바위 위에서 관악산 정상을 배경에 두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신다.

이왕 찍는 거 즐풍의 카메라로 찍어 드렸더니 무척이나 좋아하신다.

사진을 보내드렸더니 스벅 커피와 케이크를 보내주시는 과한 호의에 감사드릴 뿐이다.

 

이번엔 삼성산 국기봉 국기대로 올라가는 길이다.

 

국기봉 국기대를 목전에 둔 암릉

 

드디어 드러나는 국기대

 

이분 꽤 오래 국기대에 앉아있다.

가끔은 국기봉만 온전히 찍고 싶으나 이렇게 전세 낸 사람이 간혹 있어 방해를 받는다.

특히, 정상 표지석 앞에서 끼리끼리 모여 식사까지 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한심하단 생각이 든다.

사람이 들어가 살아나는 그림도 있지만 있어선 안 될 사진도 많다.

 

이번엔 제법 많이 걸어서 칼바위 국기봉으로 내려가는 구간이다.

이곳 역시 우회로가 있으나 산에선 이런 바위를 타야 양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기를 몸에 축적하게 된다.

 

칼바위 국기봉까지 가지 않고 바위 앞에서 사진만 찍고 다음 국기봉인 민주동산으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계속 직진하면 돌산 국기봉을 지나 서울대 방향으로 하산하지만, 

호암산성을 보려면 방향을 돌려야 한다.

 

 

 

 

삼성산 장군봉은 봉우리를 느낄 새도 없이 칼바위나 만주동산으로 가게 된다.

민주동산부터는 이미 호암산 경계에 들어서니 삼성산과 경계도 불분명하다.

관악·삼성산 11국기봉 순례를 할 때 민주동산 국기봉을 못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민주동산 국기봉의 태극기가 헤져 떨어질 지경이다.

 

 

□ 호암산성

 

호암산성은 금천구의 주산인 호암산(347m)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 1,547m, 면적 133,790㎥이며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건축하여

군사적 전략 거점 및 행정 치소(기관)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서측에서 보면 소래와 남양만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어 지리적으로 육로와 해로를 방어하고,

공격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서해 연안과 한강수로, 내륙 교통로의 중간지점인 한강 이남 중심에 있어 삼국시대 양천고성·행주산성·오두산성을 잇는

거점 성곽이었으며, 당시 한강유역의 18개 신라 산성 가운데 북한산성, 남한산성, 이성산성 등에 이어 네 번째로 길었다.

고려시대에는 한강 수로를 통한 중국 무역의 경유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군대가 주둔했다고 알려져 있다.

산성의 형태는 동북에서 서남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이며,

축조 방식은 외벽을 돌로 쌓고 뒷면을 잡석과 자갈을 채우는 내탑법을 사용했다.

현재 동벽의 북쪽 성벽이 잘 드러나 있으며, 원형을 포함해 남아 있는 성벽은 1,016m이다.

산성 내의 시설로는 한우물(제1 우물지)과 제2 우물지,  건물지, 석구상이 있으며,

많은 경우 기와와 청동숟가가락, 철제 월형 도끼, 희령원보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내문)

바위 위에서 내려단 본 호압사 전경

 

이 계단으로 올라가면 석구상이 있다.

 

 

□ 석구상

 

석구상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경기읍지」의 「시흥읍지」에 있다.

'호암'이라는 바위가 현의 진산인 금지산(금주산, 지금의 호암산)에 있는데,

그 모양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닮아서 한양으로 도읍을 삼을 때 이 호랑이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바위의 북쪽에 돌로 만든 사자를 묻고 남쪽에는 돌로 만든 개를 묻었다고 전한다.

과거에 해태상이라 부르기도 했으나 그 형태가 개 가깝다고 하여 석구상이라고 부른다.

또 1990년 제1 우물지 발굴조사 당시 조선시대 건축물에서 석구지(石拘池)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확인되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2m가량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팔과 꼬리 부분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안내문)

한때 해태로 알려졌다는 이 석구는 눈을 감은 게 온순해 보인다.

두 눈 부릅뜨고 사주경계를 해야 하는데, 개보다 석수장이가 먼저 졸았던 모양이다. 

 

한우물 인근의 불영사 대웅전

 

□ 한우물(제1 우물지)

 

‘큰우물’ 또는 하늘 못(天井)이라는 뜻으로 서울 호암산성 안에 있는 두 개의 연못 중 하나이다.

통일신라 시기에 길이 17.8m, 폭 13.6m, 깊이 2.5m의 규모로 만들었으며,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길이 22m, 폭 12m, 깊이 1.2m의 규모로 증축하였다.

현재 물이 있는 부분은 통일신라 시기의 것이며, 

1991년 2차 보수정비공사에서 통일신라와 조선시대 두 식의 연지를 함께 복원하였다. 

문무왕 때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왜군과 전투를 하면서 이 우물을 군용 수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조선시대 건국설화와 관련하여 방화용이라는 설도 있으며, 가물 때에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남벽 상단에는 석구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재가 뒤집힌 채로 발견되었다.  (안내문)

 

 

□ 제2 우물지

 

제2 우물지는 한우물에서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직사각형 모양이다.

길이 18.5m,  너비 10m 이상, 추정 깊이 2m 이상의 규모이다.

길이 50cm, 너비 35cm, 높이 25cm가량의 화강암을 臣 자 모양으로 10단(높이 1.75m)까지 쌓았는데,

두 번에 걸쳐 15cm 정도 물려 쌓은 형태가 확인된다.

바닥 조성이나 석축 쌓기 방식, 석재의 크기와 모양 등이 제1 우물과 유사하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에는 ‘仍伐內力只乃末(잉벌내역지내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숟가락의 잉벌래(仍伐內)는 고려시대의 금천구 지명인 잉벌노(仍伐奴)와 유사하다.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지명은 여전히 고리에서 사용하던 잉벌노를 쓰던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잉벌내(지금의 금천)에 사는 내말, 즉 나마 벼슬을 한 역지라는 인물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안내문)

이젠 데스크탑보다 휴대가 편한 아이패드를 더 많이 이용한다.

화면이 작은 게 흠이지만 여기 저기 갖고 다니며 쓸 수 있어 좋다.

이놈의 아이패드는 한자 변환이 안 돼 결국 복사 뜨기로 모셔와야 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 건물지

 

산성 중앙부 제2 우물 주변에 시기를 달리 하는 건물지(터)들이 중복된 채 발견되었다.

우선 기단이 딸린 건물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이 건물이 없어진 후 지역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건물 받침이던 초석을 옮겨서 23×27m 범위에 걸쳐 넓은 평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많은 기와가 출토되었고, 이중에는 상당량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도 포함되었다.

현재도 곳곳에서 통일신라시대 기와편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축조 시기를 확정할 수 없는 문비석, 네모꼴의 석렬, 외곽의 자취가 확인되었으나,

남아 있는 유구(자취나 흔적)들이 매우 복잡하여 건물지(터)의 규모와 형태를 정확하게 고증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안내문)

건물지를 실제로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요철이 있으나 사진으로는 구별이 잘 안 된다.

 

호암산성은 신라시대에 만든 것이라 벌써 1,500년의 세월이 흘러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일부 구간은 거대한 바위 군락이 좁은 간격으로 밀집해 자연적인 호암산성을 만든 곳도 있다.

그나마 찾은 것이 마지막 구간에 겨우 눈에 띔 만큼 드러난 것이다.

 

 

 

 

 

□ 신랑각시바위(사랑바위)

 

옛날 호암산 아랫마을에 믿음직한 총각과 어여쁜 낭자가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양가 집안이 대대로 앙숙으로 지내 온 터라 부모들은 이들의 관계를 반대하면서 다른 사람과 혼인시키려 했다.

낭자는 부모님의 심한 반대를 못 이기고 깊은 밤을 틈타 집을 뛰쳐나와 산에 올라 목숨을 끊으려 했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총각은 사랑하는 낭자를 찾으러 칠흑같이 어두운 산을 헤맨다.

 

그러던 중 산 중턱 절벽 위에 홀로 서서 세상을 하직하겠노라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낭자를 발견한다.

나뭇잎은 스산한 바람이 흔들거리고 달빛은 그제야 휘황찬란하게 비치는 절벽,

그 앞에서 만난 이들은 손을 맞잡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서로 닦아 주며 달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맹세 기도를 올리며 밤을 지새운다.

 

절절하고 애절한 이 여인의 사연은 마침내 달님에게 전달되었다.

달님은 진실된 이들의 사랑에 감동받아 영원히 함께 살 수 있도록 그 자리에 마주 보며 우뚝 선 바위로 만들어 주었다.

이후 산 아래 마을 선남선녀들이 이곳을 찾아 손을 맞잡고 사랑을 고백하면 혼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결혼 후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리면 옥동자를 점지해 주었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해로하는 행복한 가정을 성원해 주었다는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안내문)

얼굴을 맞대듯, 밀어를 나누듯 가까이 있는 신랑신부바위

 

 

 

관악산 삼성산 11국기봉 첫 번째 종주기

탐방일자 : 2012.11.03.토 07:25-17:30(10시간)  날씨 : 맑음 11국기봉을 가자던 솔담님이 사무실 업무가 바쁜 관계로 빠지게 되어 혼자 가게 됐다. 11국기봉을 굳이 탐방할 뜻은 없었으나 기왕에 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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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11국기봉 두 번째 종주기

2015.8.29.토 07:15-17:55(10시간 40분 산행, 약20km)   날씨: 구름 많으나 맑음 남들 다 산 스마트폰을 가장 나중에 구매하고 나니 이모저모 쓸모가 많다. 여러가지 편리한 가운데 가장 요긴하기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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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삼성산 13국기봉 종주기

2019.08.24. 토 06:15~17:35(전체 시간 11:20, 전체 거리 22.3km, 평균 속도 2.1km, 휴식 시간 1시간 20분) 흐린 후 갬 무박으로 설악산을 가려던 계획은 성원 부족으로 무산됐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 행사가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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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산성을 보고자 했으나 끊어진 단락 두어 개만 봤을 뿐 흔적은 거의 없다.

그나마 복원한 한우물과 제2 우물지, 건물터로 산성의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서울에는 제법 많은 산성이 존재한다.

수도 한양을 둘러싼 한양도성, 북한산성, 아차산성, 몽촌토성, 호암산성, 불암산성 등으로

서울이 통일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란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