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다시 방문한 오산시 독산성과 세마대지의 풍경

by 즐풍 2022. 8. 12.

2022_157

 

 

2022.8.5 (금) 오후에 잠시 탐방

 

 

자동차 정기검사를 하러 수원에 온 김에 몇 군데 공원을 탐방했다.

도심 속 공원이라 크기가 뻔하니 공원 하나에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수원의 만석공원, 효원공원, 월화원의 탐방은 천천히 돌아도 잠깐이면 끝난다.

그렇게 귀가하기엔 너무 싱거워 오산의 독산성을 한 번 더 들리기로 한다.

 

독산성은 지난 2021.12.5에 다녀갔으니 불과 8개월 만에 다시 방문하는 것이다.

이 산성은 읍성만큼이나 규모가 작은 데다 복원이 잘 돼 탐방도 어렵지 않고 재미가 있다.

낙엽이 다 졌을 때 본 독산성과 8월에 온산을 푸르게 뒤덮은 초목이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줄 것이다.

이제부터 푸른 옷으로 갈아입은 독산성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烏山 禿山城과 洗馬臺址)

독산성은 다른 이름으로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선조 25년(1592) 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이곳에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

선조 27년(1594)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고,

그 후 정조 16년(1792)과 20년(1796)에도 다시 공사했다.

성 둘레는 1,100m이고 문도 4개이지만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 때문에 이곳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있는데, 

권율 장군이 산 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지난번엔 대중교통을 이용해 마을부터 탐방을 시작했으니 산행과 겸했다.

이번엔 보적사 입구까지 차량으로 올라왔으니 산행이 아니라 산책을 하는 셈이다.

 

독산성 동문을 오르면 보적사 대웅전과 먼저 만나게 된다.

성 안에 사찰의 대부분은 산성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보적사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미 백제 시대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니 그렇다.

북한산이나 남한산성을 쌓을 때 성 안에 사찰을 먼저 짓고 승병을 만든 다음 산성 쌓는 데 동원된 사실이 있다.

이렇게 산성에 있는 사찰은 평소 중생을 구제하고 전시엔 승병을 조직하여 전쟁에 가담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약 3,000여 개의 성이 있다고 한다.

물론 남북한 다 합친 숫자일 것은 분명하다.

산에 있는 산성, 들에 있는 평성, 국경에 있는 장성, 수도에 있는 도성, 

지방 군·현에 있는 읍성, 해안에 남아 있는 해안성 등 이름도 위치에 따라 다르게 불린다.

 

하나 더, 임진왜란 때 축성한 왜성도 있다.

부산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여수에 이르기까지 기장성, 동래성, 부산성 등 무려 18개의 성을 지었다고 한다.

 

안내문을 보면 수원화성이 완공된 이후 협수 체제를 구축했다는 문장이 보인다.

이것은 왜적이 아산호를 타고 오산까지 오면 수원 화성으로 가기 전 오산에서

박살 내겠다는 심산으로 보인다.

북쪽의 청나라에서 수원 화성을 거쳐 남진한다면 오산이 2차 보루가 되는 셈이다.

 

 

동문(東門)

동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8 문확석이 각각 두 개씩 남아 있다.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와 이름이 없다.

동문은 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성문 안쪽에 보적사가 있다.

동문은 1982년에 정비하였다.

* 문확석: 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   (안내문)

 

제법 큰 느티나무가 오랜 역사를 가진 산성의 운치를 더한다.

마침 그늘 아래 탐방객이 담소를 나누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오전에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갔지만 하늘은 여전히 구름이 가득하다.

그런 날씨에서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살에 푸른 초목이 싱그럽다

우측 바위 위쪽에 있는 평평한 곳이 쌀을 말에게 뿌려 물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한 세마대로

성 안에 물이 부족해 장기전으로 가면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을 가진 왜군을 속인 곳이다.

 

지난겨울 갈색과 회색 일색이던 독산성의 풍경이 궁금하면...

 

경기 오산의 독산성과 세마대지, 보적사 탐방

2021_168 2021.12.5 (일)  2시간 산행, 6km 이동 맑음 2009년 하반기부터 산행을 시작해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은 산행에 집중했다. 가끔 지역 탐방에 나설 때 그 지역 명소를 탐방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

electee.tistory.com

 

 

 

성벽은 그리 높지 않아도 전시엔 유용한 지리적 이점이 된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성벽은 점점 높아져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 독산성의 연혁

 

백제 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알려짐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됨)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김천일의 항전과 권율 장군의 세마 병법으로 왜군에 항전한 일화가 유명하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쌓은 기록(순조 31년(1831)과 봉수대를 설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숙종 16년(1690)에는 수원화성과 함께 수원 유수부의 남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영조~사도세자~정조 3대가 모두 다녀간 성으로, 이곳에 머물러 백성의 고충을 위로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정조의 효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안내문) 

 

 

□ 남문

 

남문은 독산성의 정문으로 진남루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 「회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의 규모는 6칸이었으며,

영조, 정조, 순조 때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 말과 소가 다녔고 독산성의 주 출입구로 쓰였다.

1979년에 개방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바닥엔 성문을 고정시킨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안내문)

 

바닥에 문확석이 있다면 성벽 위를 가로지르는 돌이 놓이고 그 돌에도 문확석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문을 고정시킬 수 있고 평동 위에 문루를 세울 수 있다.

문루까지 복원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성 안에서 보는 남문이다.

 

이번엔 성 밖에서 보는 남문

 

왼쪽 성벽은 밖으로 슬쩍 나와 치(雉)라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었다.

 

 

 

 

 

 

 

사방에 동, 서, 남, 북문이 있으나 이 문은 암문이라 불리는 일종의 비상문인 셈이다.

 

암문은 보통 적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은밀히 만드는 방법이 제일 좋다.

문을 가리기 위해 ㄴ자로 밖을 한 번 더 둘러주면 공격이나 방어도 훨씬 쉽다.

 

서문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했다.

정조 14년(1790) 정조가 행차할 때 서문을 이용했다.

1983년 복원하였으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킨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안내문)

 

조선시대 이후 성벽은 각을 잘 잡은 가공석을 주로 이용해 성을 쌓았다.

벽은 대체로 수직으로 세워 성벽을 이용하기 어렵게 만든 특징을 보인다.

 

 

서문

 

 

 

밖에서 보는 암문

 

 

성벽 위아래는 이렇게 성문을 여닫는 기둥을 세우기 위해 문확석을 만들었다.

문확석은 우리말로 지도릿돌이라고도 한다.

북문 성문 상단에 이렇게 평평한 돌을 가로지르는 방식을 평거식이라 한다.

 

 

 

성 밖으로 토성은 경사가 제법 높아 석성이 낮아도 방어하기에 좋은 구조다.

 

독산성은 성 둘레가 고작 1,100여 m에 지나지 않아 금세 도착한다.

벌써 보적사 건물이 일부 보인다.

 

여기서 소나무 숲을 통과해 세마대 건물을 보기 위해 올라간다.

 

보통 산성이나 읍성 등의 건물 편액은 정면에만 붙어 있다.

오산의 독산성에 있는 이 세마대는 앞뒤로 하나씩 다 붙어 있는 특별함을 보인다.

 

□ 세마대(洗馬臺)
 
세마대는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승전과 관련하여 성 안 꼭대기에 세워진 장대(將臺)로,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1957년 8월 15일 민간으로 구성된 '세마대 중건 위원회'에 위해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북쪽에는 '세마대(洗馬臺)'라는 현판이, 남쪽에는 '세마대(洗馬坮)'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중 남쪽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썼다.

1831년에 편찬된 「화성지」에는 세마대와 관련하여,
'도원수 권율이 독산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샘이 적어 오래 지키게 어려웠다.
적이 그것을 염탐하여 그것을 알고서는 급히 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권율은 군사에게 적을 향하여 말을 세우고 쌀을 흔들리게 부어 씻게 하였다.

그것을 본 왜적이 성안에 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포위를 풀고 갔다.
훗날 그곳을 세마대라 일컬으니 곧 지금의 장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안내문)

 

 

 

이 평지 아래쪽 바위 앞에 말을 세우고 쌀로 목욕시키는 시늉을 했을 것이다.

그래야 아래쪽에 진을 친 왜적이 볼 수 있었을 테니...

 

세마터를 지나 다시 보적사 경내로 들어왔다.

한동안 계속된 단청 작업을 끝내고 이제 막 짐을 싸 철수하고 있다.

 

대웅전 내부도 단청을 했는지 기둥이 반사될 정도로 깨끗하다.

덕분에 부처님 존안은 더 인자스럽게 보인다.

 

 

 

수원의 여러 공원 탐방이 빨리 끝나는 바람에 덤으로 들린 오성 독산성이다.

수원 화성에 비하면 현저하게 작지만 수원 화성과 협수 체제를 구축하였다 하니 그 중요도는 뛰어나다.

백제에서 시작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점점 더 다부진 산성으로 거듭났다.

작지만 복원도 비교적 잘 되어 산책하기도 좋은 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