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_158
2022.8.18 (목). 오후에 잠시 탐방
그저께 관악산으로 가려던 계획을 스틱을 지참하지 않아 동네 뒷산인 부락산을 올랐다.
덕암산을 거쳐 산행 마감을 평택 정도전 사당으로 잡았으나 곧 버스 탈 시간이라 사당은 탐방하지 못했다.
이때 여성 해설사 님을 만나면서 평택 여행의 중요한 팁을 몇 개 얻었다.
그중에 하나가 평택에 없다고 생각한 산성(읍성)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이왕 멋진 평택 농성으로 행차하는 마당에 목욕재계하고 이발소에 들려 머리까지 깎았다.
이발할 때가 되어 두발 정리를 하니 몸도 마음도 상쾌하니 기분도 좋다.
막상 도착한 평택 농성도 용역회사에서 예초기로 안팎의 모든 잔디의 풀을 깎아 산뜻한 느낌이다.
처음 만나는 상견례는 이렇게 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관통한다.
□ 평택 농성 (農城)
해발 24m의 낮은 구릉지에 있다. 성벽은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외곽을 감싸는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농성 주변은 낮은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있어 남쪽과 서쪽은 아산만 일대까지 바라보인다.
농성 북쪽 2km 지점에는 진위천과 안성천이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향하는 동서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농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이 긴 장방형이다.
전체 둘레는 337m이며 외벽이 높이는 8∼10m 다.
성벽은 부분적으로만 조사되었다. 토성 벽은 성토층이 두껍고 경사지게 조성된 것으로 보아
판축 공법이 아니라 성토다짐공법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문지는 동벽과 서벽의 중간 부분에 있다.
통상 토성도 문구부는 석축으로 마감하지만, 농성은 측벽을 흙으로 마감했다.
문지 바닥에는 석축배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유물은 회색 연질토기편, 기와편,
고려, 조선 시대의 자기편 등이 수습되고 있다.
농성은 삼국 시대에 쌓았다는 설과 신라 말 중국에서 건너온 임팔급이 쌓아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고려 시대에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등이 전한다.
농성은 일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축성시기나 축성 목적이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다만 축성법이나 출토유물을 고려하면 고려-조선시대 군현의 창성(倉城)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농성은 우리나라 축성사에서 삼국 시대에 시작된 평지성의 계보를 이어주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_문화재청)
평택 농성의 스카이 뷰다.
밖에 있는 흰 선은 탐방로이고, 안에 봉긋하게 솟은 토성은 직사각형에 양쪽 배가 조금 부른 형태이다.
전체 거리는 약 300m라니 대한민국에 이렇게 작은 성이 있다는 게 놀랍다.
동남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바로 동쪽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농성에서 평택천의 내리문화공원까지 직선거리는 1.5km에 지나지 않는다.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 왜적이 평택천(안성천)을 타고 올라올 때 방어하기 좋은 위치다.
평택이란 지역이 워낙 저지대라 농성 주변으로 반경 10km 이내엔 큰 산이 없어 농성은 평지성인 셈이다.
주차장에서 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농성 오른쪽 위를 지나가는 사람의 상체로 밖의 성곽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
농성 입구에서 서쪽 방향에 충절공 임팔급 상이 있다.
안내문엔 임팔급이 당나라에서 귀화하면서 이곳에 농성을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임팔급은 서기 782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데,
그로부터 1,200년이 지난 성의 상태가 이렇게 온전한 걸 보면 온전히 믿기는 어렵다.
물론 중간중간 개·보수가 이루어지긴 했겠으나 문서로 고증된 사실은 없다.
평택 농성(農城)이다.
성을 분류하는 기준으로 산에 쌓은 산성,
임금이 있는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도성,
지역의 군·현의 읍에 쌓은 읍성,
우리나라에도 국경선에 쌓은 천리장성이 있으나 기록만 있을 뿐 실체가 없는 장성 등이 있다.
그런데 평택 농성은 읍성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너무 작다.
이 성을 쌓았을 땐 없었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성 안을 밭으로 경작하면서 농사를 짓게 되자
농성(農城)으로 불리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임팔급 상을 지나 서쪽에 있는 문으로 통해 농성으로 들어간다.
농성 안은 밖과 달리 평균 4~5m 고도가 높다.
성벽 안쪽으로 조그만 수로가 지나가며 배수를 원활하게 돕는다.
서문 입구에서 성벽 위로 오를 때 흙이 유실되지 않도록 나무 계단을 새로 설치했다.
북쪽 끝엔 소나무가 약 40여 그루 잘 자라고 있다.
농성의 휴식 공간인 셈이다.
농성 안팎은 잔디가 잘 관리되어 보기 좋다.
오늘은 이 잔디를 깎아 마른풀을 전부 포대에 담아 밖으로 이동시키는 걸 보았다.
용역회사는 용역회사대로 수입 잡고, 시에선 문화재를 잘 관리하니 보기 좋다.
성 안팎의 고저 차이가 눈에 띈다.
일설에는 이 농성이 곡식 저장창고라는 설도 제기한다.
조운선에 곡식을 싣고 서해안을 따라 한양으로 가던 길에 폭풍이라도 만나면
행담대교 다리 밑을 따라 평택천에 들어와 농성에 저장하기 딱 좋은 장소다.
평택은 충청도와 경계에 있으나 교통이 편리하다.
대부분 평지에 가까워 대규모 주택단지나 공장이 들어선다고 해도 토지 평탄화 작업이 편하다.
이런 이유에 더해 인력 흡수가 좋은 평택에 삼성전자 공장이 들어서고,
대규모 주택단지가 들어서며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니 평택은 기회의 땅이다.
이곳이 곡식 저장창고였다면 건물이 적어도 몇 개는 들어선 자리에 주춧돌이 제법 보여야 한다.
그런데도 주춧돌로 쓰였을 만한 돌은커녕 자갈조차 안 보인다.
그렇다면 곡식 저장창고로 보기도 사실 어렵겠단 생각이 든다.
이 역사의 미스터리 한 퍼즐을 누가 맞출 것인가?
이 문제는 이곳에 흥미를 느낄 역사 학도에게 맡기자.
오늘 이곳을 방문한 즐풍이 이발을 하고 왔듯 농성도 막 예초를 끝낸 시점이라 산뜻하다.
실질적인 농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동문이다.
예초한 풀을 모아 마대포대에 담아 차량으로 이동하는 걸 봤다.
이런 작업 끝에 알맞게 탐방하니 더욱 산뜻한 느낌이다.
문헌에 따르면 남한의 읍성 수는 109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 대부분의 읍성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고의로 사라지거나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가 팽창하며 대부분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
도심과 떨어져 살아남은 평택 농성은 평지성에 포함되나 읍성의 성격으로 보기는 어렵다.
읍성은 전란 시 어느 정도의 백성을 수용하며 전란에 대비해야 올바른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이 농성은 백성들과 농성(籠城)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만큼 규모가 작다.
용역회사 직원이 성 안에 예초한 풀을 긁어모으며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다.
평택 농성은 돌 하나 없는 토성으로 둘레가 300m밖에 안 되는 작은 평지성이다.
언제 어떤 목적으로 만든 성인지 제대로 밝혀진 게 없다.
여러 이설이 있으나 성의 보존상태로 보아 오래되지 않은 느낌이다.
조선시대에 만든 것이면 기록을 찾을 수 있겠으나 없는 걸 보면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었겠단 생각이 든다.
이 의견은 전적으로 즐풍의 사견임을 밝히니 신봉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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