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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몽고군을 물리친 승전 장소인 안성 죽주산성

by 즐풍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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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1 (월) 오후에 잠깐 탐방

 

 

목우와 함께 진천의 두어 군데 관광 명소 탐방을 끝내고 귀로에 안성 죽주산성을 들린다.

요즘 산성과 읍성에 관심을 갖다 보니 마음에 담아둔 죽주산성을 경유하는 것이다.

사실 산성보다 읍성 탐방이 훨씬 편하다.

읍성은 말 그대로 읍에 만든 성이기에 탐방이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산성도 읍성만큼 탐방하기 쉬운 데가 많다.

서해안 인근은 남해안만큼 왜구의 출몰이 잦아 침입이 쉬운 읍성보다 지형상 유리한 산성도 많다.

이런 서해 인근에는 높은 산이 별로 없다 보니 산성이라 해도 읍성만 한 규모가 대부분이다.

죽주산성은 삼국과의 전쟁을 위해 처음 만들었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왜적과 대항할 산성으로 바뀌었다.

 

 

□ 죽주산성 (竹州山城)

비봉산(해발 391m) 동쪽에 연접한 해발 250m 봉에 있다. 

산성에서는 서쪽은 비봉산에 막혀 있지만, 다른 쪽은 원거리까지 조망된다.
죽주산성은 내성과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쌓은 성벽을 일부 공유하며 고려, 조선시대에 계속 수축되었다. 

초축 성벽은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곡간부를 감싸도록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둘레는 1,322m로 삼국시대 성곽 중 대규모에 속한다. 

성벽은 기저부를 계단식으로 정지하고, 내벽과 외벽 및 속채움까지 모두 돌로 쌓았다. 

성돌은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바른층 쌓기 방식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외벽에는 보축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이러한 축성법은 죽주산성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 신라가 쌓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려 고종 23년(1236)에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공격하자 죽주방호 별감 송문주 장군이 

15일 동안을 싸워 적을 물리쳤다. 

이때에 삼국시대에 초축된 성벽을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변이중·황진 장군의 부대가 이 산성에서 싸워 승리했다. 

임진왜란 후에도 수축이 이루어졌다. 

이때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의 외벽 경사가 완만해지고, 

특히 남치성은 모서리에 대석이 사용되는 등 왜성의 축성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곽의 곡륜(曲輪)을 특징으로 하는 왜성의 평면배치 양상이나, 

독특한 성문의 구조 등은 적용되지 않았다.
죽주산성은 여러 시기의 축성법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축성 기술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출처_문화재청)

 

 

 

장마가 지나간 뒤라 날은 푹푹 찐다.

좁은 산길을 올라와 주차를 하니 목우는 힘든 산행이라 여겼는지 차에서 쉬겠다고 한다.

즐풍은 죽주산성을 미리 봤기에 어렵지 않다는 걸 알고 카메라만 매고 산성으로 오른다. 

 

입구인 동문을 들어서며 시계방향으로 탐방을 시작한다.

 



오누이가 쌓았다는 이 안내문은 일전에 예산 임존성의 묘순이 남매와 비슷한 전설을 갖고 있다.

이런 전설을 보면 남존여비가 강했다고 생각하는 옛날의 여권은 지금보다 더 강했단 생각이 든다.

유교가 들어온 조선시대 이전이라면 남녀평등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을 것이다.

 

 

 

산성은 고목과 잘 어울린다.

산성의 세월을 온전히 다 본 고목은 없겠으나 제법 큰 소나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가난한 민초는 권력자들의 핍박에도 꿋꿋이 이 나라를 지켜왔다.

모래밭이나 바위틈에서도 등이 타는 햇볕이나 뿌리가 어는 추위 속에서도 살아난 소나무는

이 강산을 지켜낸 우리네 민초를 닮았다. 

 

죽주산성은 입구인 동물을 지나며 조금 경사가 있을 뿐 큰 경사는 없다.

산에 있으니 산성이란 이름이 생겼으나 여느 읍성을 걷는 정도의 편안함이 있다.

 

위아래는 남문이다.

 

 

 

이곳엔 암수 소나무가 한쌍 있다.

가지가 쳐진 건 암소나무이고 올라간 건 수소나무이다.

 

 

 

사실 이곳이 죽주산성의 정상인 셈이다.

왼쪽으로 가면 외성을 거쳐 비봉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내려가면 중성의 포루를 만나게 된다.

먼저 외성으로 발길을 돌린다.

 

 

 

 

 

 

 

외성으로 가는 길은 갑자기 낮아지며 바로 외성의 서문을 만나게 된다.

 

 

 

외성의 서문

 

외성의 서문을 지나 50여 m를 지나면서부터 산성의 흔적은 사그라지듯 사라지고 돌만 몇 개씩 보인다.

낮은 산성이 무너지며 흙도 같이 묻혔는지 지지부진한 상태다.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다시 중성으로 올라간다.

 

중성을 올라와 포루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중성과 외성의 경계선은 이런 단차가 있다.

 

 

 

 

 

중성 벽을 하나둘 끌고 올라가는 담쟁이덩굴 

 

 

 

신구 세대의 만남

 

오래된 성벽 

 

중성과 외성의 경계를 지키는 소나무 

 

 

 

 

 

북포루 가는 길의 북문

 

북포루가 있던 자리 옆으로 제법 오랜 세월을 함께한 고목의 한두 가지도 생명을 다했다.

 

포루는 성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성벽을 돌출시키거나

유리한 지세에 대포를 쏠 수 있게 장치한 누각이다.

동북쪽 치성 부근에 그 터와 포루 초석이 남아 있다.  (안내문)

 

북포루 상상도

 

북포루를 지나 동문 방향으로 이동한다.

 

 

 

동문에 도착하면 산 언덕 쪽에 송문주 장군의 사당이 있다.

고려시대에 몽고군과 이곳에서 싸워 이긴 송문주 장군의 사당인 충의사가 있다.

몽고군은 당시 세계에 적수가 없는 최대 강국이었으나 고려는 끝까지 분전하며 이곳에서 승리했다.

정말 신출귀몰한 송문주 장군이다.

 

 

 

송문주 장군을 모신 충의사 앞마당은 망초꽃이 핀 망초대가 그득하다.

망초대는 번식력이 강해 조금만 손을 안 봐도 금세 들판을 뒤덮는다.

담당 부서가 어딘지 손 놓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
망초는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철도가 건설될 때 사용되는 철도침목을 미국에서 수입해 올 때 

함께 묻어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철도가 놓인 곳을 따라 흰색 꽃이 핀 것을 보고 일본이 조선을 망하게 하려고 

이 꽃의 씨를 뿌렸다 하여 망국초라로 불렀고 다시 망초로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망초보다 더 예쁜 꽃이 나타났는데 망초보다 더 나쁜 꽃이라 하여 개망초라고 불렀다.

                                                                                                                      (출처_국립중앙과학관:야생화 과학관)

 

 

 

 

 

성 안쪽엔 이 시대에 들어와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못이 있으나 물은 없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보는 느낌이나 물이 없는 게 아쉽다.

지역의 많은 곳에서 부용정의 천원지방을 모방하고 있다.

 

 

이번 여름엔 제법 많은 산성과 읍성을 둘러본다.

태안에 좀 더 거주했다면 공주와 부여에 있는 더 많은 산성을 볼 수 있었으나

서둘러 귀가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이런 산성을 탐방하며 여러 시대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당시 치열했던 전투를 되새기며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