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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최근에 복원된 안산읍성과 관아지

by 즐풍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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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27 (토)  30여 분 탐방

 

 

산성이나 읍성에 관심을 가지며 주변에 있는 이러한 성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을 갖게 된다..

언젠가 수리산 수암봉을 안산읍성에서 출발했던 기억으로 오늘 안산읍성과 수리산 산행에 나선다.

안산읍성과 수리산 산행을 하려면 들머리와 날머리가 다르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좋다.

수원역에서 안산읍성까지 가장 빠른 직통버스인 8851 버스를 무려 50분이나 기다린 끝에 탔다.

수암파출소 정류장에서 내려 10여 분 이동하여 안산읍성에 도착했다.

 

 안산읍성이 자리한 곳은 예전 안산지역의 중심이다.

이곳에 1912년 개교한 안산초등학교를 비롯해 안산중·고등학교까지 있다.

1900년대를 전후해 이곳은 안산의 중심이었는데, 1976년 반월신공업도시가 생기며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후 여러 도시화 과정을 거쳐 안산읍성에서 6.5km 지점에 안산시청이 들어서며 이 지역은 변방으로 전락했다.

고려말부터 안산의 중심지였던 안산읍성이 있는 지역의 영화도 한순간에 끝난 것이다. 

 

 

 

□ 안산읍성과 관아지

 

고려시대 후기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사용된 읍성과 관아지이다.
전형적인 평산성(평지성과 산성의 쌓는 법을 아울러 벌판과 산을 이어 쌓은 성)으로 주변은 수암봉에서 서쪽으로 내려온 

소금절골과 작은골 사이의 능선이 읍성을 감싸며 남쪽에 관아지가 위치하였다. 

안산관아는 처음에 목내동 일대에 있다가 세종 23년(1441)에 수암동으로 옮겨졌고 현종 10년(1669)에 당시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50m 떨어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당시 해안으로 침입하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평시에는 행정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성의 형태는 모서리가 둥근 장방형을 띤다. 주요 방어 지역으로 여겨지는 서쪽과 북쪽은 자연 지형으로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성벽은 자연 능선에 덧붙여서 한쪽 면만 고른 편축식 석성으로 쌓았다. 

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가 주로 출토되었는데 특히, ‘康熙年…(강희년)’, ‘…正…酉…’ 명이 음각된 명문 기와로 보아 

강희년(1662~1772) 명 기와와 동일한 시기인 17~18세기로 볼 수 있다. 

정문인 평근루(平近樓)와 객사·동헌 등의 행정시설, 옥사와 창고가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어 주춧돌과 장대석, 

기와편 등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관아지는 일제강점기에 수암면사무소로 이용되다가 터만 남아있으며, 객사 건물은 2010년에 복원되었다.

                                                                                                                                                                 (출처_문화재청)

 

 

과거에는 안성읍성과 관아가 있었으니 안성지역 행정의 중심이었다.

행정의 중심은 곧 벼슬아치가 모여 사는 곳이라 당연히 상가와 민가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읍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고목이 많아 옛 영화를 이런 고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약 550년 되었다는 이 회화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다른 위치에서 보는 회화나무

 

 

안산읍성은 수암봉 서편 산자락의 낮은 구릉지에 넓게 걸쳐 있다.

안산은 서해바다 남양만의 관문에 해당하여 서해를 통해 수도권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는 중요한 지역이다.

안산읍성은 능선과 평지를 연결하여 쌓은 평산성이다.

성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모서리의 각이 줄어들어 둥글게 처리된 말각 사각형이다.

안산읍성 안에 있는 이 느티나무는 약 500년 정도로 추산한다.

역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현재 수암 마을 전시관에서부터 안산읍성 객사까지에 이르는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수암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1999년과 2007년 두 차례 발굴 조사를 하면서 '요 凹' 자형 건물 구조가 확인되었으며,

둥근 모양,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다듬은 돌과 자연석인 주춧돌이 함께 출토되었다.

같은 건물터에서 여러 형태의 주춧돌이 나타난 것은 1922년 수암면사무소가 처음 지어질 때 인근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사용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수암면사무소 건물터에서 나온 주춧돌과 석재들은 「안산읍성 및 관아지」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건물터 부근에 임시로 보관하고 있으며, 앞으로 「안산읍성 및 관아지」를 복원할 때 활용할 예정이다.

                                                                                                                                                               (안내문)

 

 

 

 

취암지관(鷲岩之館)

객사는 외지에서 출장 온 관리의 숙소로 쓰는 곳이다.

2011년도에 복원했다.

鷲 자는 수리란 새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로 뒤에 수암봉이 있어 이를 한자인 취암(鷲岩)으로 표기한 것이다.

 

 

□ 안산객사

 

객사는 정청에 전폐(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 국왕의 친정을 상징할 뿐 아니라 지방관이 국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다.

고을의 수량이 집무를 보는 동헌보다 오히려 격이 높아 관아시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배치는 고을의 진산을 등진 채 남형을 취하여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았고, 관아 내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하였다.

객사는 한말까지 기능이 유지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그 기능이 중지되었다.

객사의 정청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익사보다 한 단계 높게 조성되었고,

좌우익사는 팔작지붕으로 온돌과 마루를 놓았으며,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축조되었다.

이곳은 1797년(정조 21) 8월 16일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하룻밤 묵고 간 적이 있어

'안산행궁'이라 불리기도 한다.

                                                                                                                                (안내문)

 

 

 

 

 

안산객사인 취암지관

 

복원할 당시의 모습

 

한옥은 단청을 하면서 공사가 마무리된다.

푸른 잔디 위의 누각에 붉은색을 칠한 기둥과 검은 지붕이 잘 어울린다.

 

또한 객사 주변에 느티나무 고목이 자리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낙락장송의 노거수도 자리했다면 더 바랄 게 없는 그림일 텐데...

 

안산읍성은 실질적으로 조선시대부터 그 역할을 해냈다면 적어도 300~400백 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안산읍성의 기능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1922년 수암면사무소가 들어섰다.

이후 면사무소 마저 헐리며 무주공간이었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며 국고의 지원을 받아 안산객사를 복원하였고,

현재 성곽도 절반 정도 복원했다.

 

 

 

 

성문 밖 공덕비 뒤 소나무가 있는 곳부터 제법 너른 마당이 있었겠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1990년 수원대학교 박물관의 조사에서 읍성 전체 둘레는 772m 둘레로 내부 면적은 36.000㎡(약 11,900평) 정도로 확인되었다.

 

이 성벽도 복원된 것으로 읍성을 쌓을 때도 밖은 석성, 안쪽은 토성으로 쌓았는지 모르겠다.

 

 

성을 쌓고 때를 한 장씩 얹은 것으로 그 사이사이에 지난 장마 때 빗물이 흐르며 몇몇 군데는 깊게 파인 곳이 있다.

심지어 성벽 위에도 골이 파여 깊게 도랑이 생길 정도니 연년이 그렇게 골이 깊어지면 어느 순간 붕괴될 우려도 있다.

안산시에서 사후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담당은 알기나 할까? 

 

 

 

 

 

라운드 진 모서리

 

 

 

 

 

 

 

 

 

마을로 내려가는 계단 겸 전망대를 일체형으로 만들었다.

 

 

 

 

 

 

 

안산읍성 성벽은 북문지를 지나 약 30m 전방에서 멈춘다.

안쪽 산책로와 성벽이 함께 끝난 나머지 구간은 언제 복원될지 모른다.

현대에 복원한 읍성이라도 마을이 형성된 구간까지라도 조속히 복원되기를 바란다.

 

 

 

성 안에서 소금절이골로 넘어가는 북문지이다.

 

 

 

관아와 관련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장소

 

약 650여 년 되었다는 은행나무에는 여전히 많은 은행은 포도알처럼 송골송골 맺혀있다. 

 

은행나무의 자태

 

이 성벽을 넘으면 바로 수암봉으로 가는 등산로와 만난다.

 

 

30여 분만에 안산읍성을 간단히 돌았다.

안산객사는 물론 안산읍성까지 최근 10여 년 안에 복원한 것으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은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 제법 큰 나무들뿐이다.

이런 노거수는 안산객사와 읍성의 성벽과 어울려 옛 영화를 재현하는 데 일조한다.

짧은 시간에 500~600년의 과거와 만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