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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모양성제 축제를 앞둔 고창읍성 답성놀이

by 즐풍 2022. 10. 11.

2022_181

 

 

 

2022.9.27 (화) 15:00~16:25, 1시간 30분 탐방

 

 

고창 살기 이틀째인 오전에 이장님과 마을을 돌아보며 마을 탐색을 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등마을은 고창군 신원면 월산리에 있다.

대부분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전통적인 집성촌이라 혈연관계인 경우가 많다.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어느 지역보다 장년층은 많은 편이다.

 

짧게 지역 탐색을 끝낸 후 바다에 나가 꽃게 그물망을 끌어올리고 게 떼기를 마친 후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넉넉한 인심에 음식 맛도 좋아 갈수록 이 지역이 맘에 든다.

그러고 나니 오후 2시라 한가롭게 보내기 아까워 함께 지내는 젊은 친구를 데리고 고창읍성으로 왔다.

즐풍은 벌써 두 번째지만 매번 봐도 좋을 만큼 우리나라 3대 읍성에 속한 고창읍성이 가장 단아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외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졌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이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50,172평)로 

동‧서‧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 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성곽과 건물 14동을 복원·정비하였다

고창읍성의 축성 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고창읍성의 관아 건물 보수 때 나타난 상량문과 

각종 문헌 및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 축성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고창읍성은 조선 세종 32년(1450)부터 단종 원년(1453)까지 전라좌우도 19개 군·현에서 구간별로 분담하여 

축성한 흔적이 성벽 구간마다 각자(刻字)되어 있다. 

이중에는 무장시면(茂長始面)·무장종(茂長綜)이라는 흔적이 있으며, 

동문 옹성 성벽에는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이는 고창읍성이 계유년에 축조되었으며 무장현이 축성에 참여했다는 뜻이자,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고창읍성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창현성곽조(高敞縣城郭條)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간행했으나 단지 증보처에 '신증'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하였으므로, 

성종 때 왕명에 의하여 김종직 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제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성종 17년(1484) 이전의 계유년으로 

축성 연대가 압축된다 할 수 있다.
무장현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현이 되었으므로, 

계유소축의 계유년은 1417년 이후의 계유년이 된다. 

즉, 고창읍성은 1453년의 계유년에 축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병 없이 오래 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성 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효험이 있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 행렬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고 한다. 

손바닥만 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세 번 돈 후에, 일정한 지역에 그 돌을 쌓아두도록 했다. 

특히 윤삼월의 효험을 강조하고 있음도 겨우내 부풀었던 성을 밟아 굳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머리에 돌을 이게 함으로써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다지 게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성 밟기를 한 후 머리에 이고 온 돌을 일정한 지역에 쌓아놓게 한 것은 유사시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한 유비무환의 예지라 생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민속놀이를 통해 우리 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동원을 강제하지 않고 스스로 참여시키는 독특한 우리 문화의 양상을 알 수 있다.

                                                                                                                                 (출처_고창군청, 문화관광)

 

 

 

 

고창은 백제 때의 지명이 '모양현'이라 '모양성'이라고도 한다.

고창 사람들이야 고창읍성이든 모양성이든 어느 것이라도 의미가 같지만 외지인이 볼 때 모양성은 뜬금없게 들린다.

지역사회에서 명칭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점점 중요해진다.

제49화 고창 모양성제는 2022.9.30~10.4. 까지 모양성 일원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고창읍성 앞 공원에 여성들이 돌을 머리에 얹고 답성 놀이하는 조형물을 세웠다.

 

 

 

고창읍성의 정문인 공북루 앞에서 한 장 찰칵~

 

 

□ 공북루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고 배면은 화강석 돌기둥 위에 둥근기둥을 세워 만든 2층 문루이다. 

고창읍성에는 정문인 공북루(북문)와 등양루(동문), 진서루(서문) 등 3개소의 성문이 있다.

성문 앞에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여담)을 쌓아 성안에서 밖을 살필 수 있는 

현안과 총을 쏠 수 있는 총안(근총안, 원총안)을 만들어 놓았다. 

공북루 전후 사적기와 상량문에는 순치 3년 (인조 24년 : 1646) 병술 12월에 공북루를 소건하고 

그 후 3회에 걸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_고창군청, 문화관광)

 

공북루를 지나 시계방향으로 북동진하게 된다.

 

공북루 앞 옹성 위에서 보는 성벽 밖 풍경 

 

모양성은 공북루를 지나며 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성벽은 안전시설이 없어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은 고창읍성과 달리 성벽 위를 두세 명이 교행 할 정도로 넓은 데도 출입을 금지시켰다.

언젠가 추락사고가 있은 후 막아놓은 것이다.

이렇게 좁은 성벽에 안전시설을 설치할 수 없으니 각자의 책임으로 조심할 수밖에 없다.

 

고창읍성은 낮은 구릉을 따라 읍성을 만들어 지내가 낮은 곳의 성벽은 5m 전후로 높은 편이다.

 

성 안은 소나무 숲이 무성해 고창읍성에 고전적 운치를 한층 더한다.

읍성 안에서 자라는 대나무 숲은 「추노」, 「왕의 남자」, 「관상」 등의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에 들어가기도 했다.

다음 기회가 있으면 이 대나무 숲인 맹종죽을 꼭 봐야겠다.

 

동문인 등양루에 시야에 들어온다.

이 즈음에서 사진을 찍다가 스틱을 놓쳐 성 밖으로 떨어졌다.

등양문이 닫혀있어 결국 4m 높이의 성벽을 타고 내려가 회수해야 했다.

평소 산행할 때 바위를 타며 익힌 기술을 요긴하게 활용했다.

 

 

 

 

반대편에서 보는 등양루

 

등양루의 창문을 토해 보는 성 안 소나무 숲 

 

 

 

등양문 옹성으로 들어오는 적을 감시하거나 화살이나 총으로 섬멸할 목적으로 만든 치성에 앉아 봤다.

 

 

 

소나무 숲은 잘 관리돼 성벽 너머까지 가지를 내밀며 세상 나들이에 나선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이 유별나게 사랑하는 나무다.

헐벗은 모래밭이나 심지어 바위에서도 뿔리를 내리며 자라는 게 우리네 민초의 어려운 삶을 대변하는 느낌이다.

어느 지역의 읍성보다 튼실한 소나무 숲이 보기 좋다.

 

 

 

 

 

성 밖의 소나무 풍경도 보기 좋다.

 

 

 

서문인 진서루(鎭西樓)

진서루는 서쪽의 진영, 또는 서쪽을 진압하는 데 필요한 누각이란 뜻일 것이다. 

 

뒤돌아 본 성벽의 모습

 

 

 

진서루를 둘러싼 옹성 위에서 본 누각

 

 

 

 

 

진서루 성벽 끝으로 치성이 밖으로 빠진게 보인다.

저곳은 남쪽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진서루 방향과 남쪽 모두를 관장할 수 있는 요충지다.

그러니 치성을 필수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중요 지점인 셈이다.

 

진서루에서 정문인 공북문 방향으로 방향이 꺾이자 양쪽을 감시하기 위한 치성을 밖으로 뺐다.

 

진서루가 끝나는 지점에 성벽 위로 총이나 대포를 쏘며 방어하고 공격하기 좋은 시설인 여장을 쌓았다.

 

진서루를 지나며 성벽은 고도를 갑자기 떨구며 정문인 공북루로 향한다.

 

이 성벽은 비교적 넓게 만들었는데, 이동 편의를 위해 시멘트 계단을 설치했다.

 

성벽 위에서 보는 정문 밖 공원 

 

 

 

□ 옥(獄)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 또는 원옥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여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쳤는데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이다. 

이 자리에는 조선시대의 옥이 있었으나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3년에 발굴 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에 원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출처_고창군청, 문화관광)

 

한때 이 고창읍성 안에 고창여고 교정이 있었다.

1945년 12월, 1회 입학식을 가진 고창여고는 1960년 5월 이곳 고창읍성으로 학교를 옮겼다.

이후 1986년 11월, 현재 위치인 고창읍 교촌리로 이전했다.

26년간 고창읍성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그때 그 학생 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정에서 공부한 셈이다.

꿈 많고 생기발랄했던 그 시절과 이 고창읍성을 그리워할 졸업생들이 많겠다.

 

 

사진을 찍을 때 마침 트럭이 빠져나온다.

이 트럭에 견주어 대충 높이가 가늠되니 정문은 대략 4~5m 정도로 추정된다.

 

 

 

 

 

 

고창읍성·무장읍성(고창군)은 낙안읍성(순천시), 해미읍성(서산시), 진주성(진주시)과 함께 

'전국 읍성도시 협의회'를 구성하여 '한국의 읍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공동 등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읍성의 보존 상태가 좋은 다른 지역에서도 뜻을 함께하여 동참하는 계기가 되어,

'한국의 읍성'이 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도록 성원하고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