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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새롭게 복원된 고창 무장읍성 탐방

by 즐풍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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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7 (금) 오후에 탐방

 

 

고창에 한 달간 거소를 둔 뒤 제일 먼저 한 것은 고창읍성 탐방이었다.

1년 만에 다시 본 고창읍성은 여전히 고색창연한 읍성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3대 읍성에 이름을 올린 고창읍성을 즐풍은 가장 아름다운 읍성으로 생각한다.

읍성 안에 민가는 없고 오직 복원된 몇 채의 관아만 둔 채 관리가 비교적 잘 되기 때문이다.

 

고창군은 고창읍성뿐만 아니라 무장읍성의 관리에도 진심을 다한다.

무장읍성은 일제에 의해 1907년 폐성령이 내려진 후 관리가 안 돼 그동안 농지와 민가가 들어섰다.

이후 점차 정부의 관리하에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농지와 민가는 사라지게 된다.

이번 방문에서는 조선시대의 관사와 성벽은 거의 복원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걸 확인했다.

 

몇 년에 걸친 복원공사는 현재 남서쪽 귀퉁이의 성벽공사가 곧 끝날 기세다.

이러한 기세를 몰아 서천 해미읍성, 순천 낙안읍성, 진주의 진주성과 이곳 고창의 고창읍성, 무장읍성 등을

‘한국의 읍성’을 연속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한다.

해당 지역의 읍성 관리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 기원한다.

 

 

 

□ 고창 무장현관아와 읍성

 

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능을 주어 무장진 병마사 김노(金蘆)가 쌓은 

길이 약 1.2km의 평지성이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동헌이 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 441m)·높이 7척(약 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 638m)이고 문은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옛 읍성의 모습을 연구하고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무장현관아와읍성 →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1.07.28 고시)

                                                                                                               (출처_문화재청)

 

서울대 규장각 소장, 무장 현지도와 관아

 

 

무장읍성 주차장은 평일이라 그런지 한가하다.

주차장에서 정문인 남문까지 250여 m 거리를 걷지 않고 남서쪽 모서리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 들어선다.

바로 이 느티나무 뒤로 보이는 성벽 복원공사가 끝나는 지점이다.

위 고지도를 보면 읍성의 출입문은 동문과 남문 두 곳이다.

무장읍성을 복원하며 석성이 끝나는 지점에서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하나 더 낼 것으로 본다.

지금도 공사 차량이 들어갈 수 있도록 경사면을 만든 걸 그대로 쓸 것으로 보인다.

 

성벽 위로 오르며 보는 읍성 내부 모습

 

고창읍성의 서북쪽은 토성이고, 동남쪽은 석성이다.

근대화 시기인 일제강점기인 1907년 폐성령이 내려진 후 정문인 진무루가 있는 남쪽 성벽은 사라졌다.

현재 남쪽의 석성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마지막 구간을 복원 중이다.

이 공사는 대략 한 달이면 충분히 끝나게 된다.

 

때로 석성보다 이런 토성이 아름답다.

토성은 풀이 자라게 되어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고, 복원도 쉽다.

 

2005년 항공사진을 보면 토성 부근엔 소나무가 가득했다.

다음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토성은 석성보다 이렇게 소나무나 느티나무 등 노거수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다.

 

2005년 초에 찍은 항공사진이다.

토성을 따라 긴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남쪽으로는 진무루(남문)가 보일 뿐 성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알 수 있다.

성 안쪽 동쪽으로 여러 건물이 보이고, 서쪽에는 농경지가 보인다.

 

카맵에서 제공하는 2008년 스카이뷰를 보면 왼쪽에 밭이 있던 자리는 발굴 조사 중이다.

오른쪽에 있던 건물의 대부분도 철거되어 사라진 걸 알 수 있다.

동서남북으로 크게 4면인 성벽 중 서·북·동쪽 면은  전부 토성인 걸 알 수 있다.

 

2020년의 스카이뷰를 보면 2005년은 물론 2008년 사진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북동쪽 모서리에 동문이 들어설 자리가 파헤쳐진 게 보이고,

그곳부터 남쪽 무장읍성인 A 지점까지 밖으로 긴 석축을 쌓고 안쪽으로 토성을 두른 게 보인다.

남쪽 무장읍성 건물 밖으로 반원형으로 옹성을 두른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변화 과정을 기본 에이스로 깔고 성을 한 바퀴 돌며 하나씩 살펴본다.

 

무장현 읍성의 공식적인 출입구는 동문과 남문이다.

동문과 남문은 성박 밖으로 반원형의 옹성을 쌓고 문루를 만들어 차량 통행이 어렵다.

여러 공사를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북쪽 토성을 이렇게 절개해 차도를 만들었고,

남서쪽 모서리엔 절개하는 대신 토성을 넘나들게 안팎으로 흙을 덧대며 토성을 살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어항과 무역이 활발한 법성포가 있다.

고려말부터 왜구의 노략질과 침입으로 인해 법성포 주변과 마을에 피해가 심하였다.

나라가 안정된 조선 초기인 1417년(태종 17)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읍성을 만들게 되었다.

 

 

무장읍성은 해발 60m의 사두봉을 중심으로 구릉성 야산을 장방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 만든 평지 읍성이다. 

행정적인 기능을 우선하는 다른 읍성들과 달리 군사적인 거점으로서의 기능이 더 강했던 읍성이다.

 

성 안쪽 사두봉 방향 

 

북쪽에서 동쪽으로 넘어가는 구간부터 석성을 쌓으며 고지도를 참고로 동문과 옹성을 복원했다.

고지도엔 문루가 없으므로 욕심을 부려 문루를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체성의 규모에 대한 기록은 각종 문헌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 地理志)」에 ‘석성으로 둘레 658보’로 기록하고 있고,

문종실록(文宗實錄)에서 “둘레 1470척, 높이 7척, 여장의 높이 1척, 문 2개소가 있는데,

옹성이 있고 해자의 둘레는 2,127척(尺)이고 적대가 없으며, 여장이 4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 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資)』에

"무장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 2,639척,높이 7척 안에 우물이 두 개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기록한 「조선보물 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讀調査資料)』에

“무장읍성 석축 둘레 550간, 높이 약 1간 반, 거의 붕괴하였다.”라고 하였다.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 상량문에 의하면 1417년 처음 창건한 이래 1581년에 개건 되었고

이후 계속적인 개건과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근래 남문 주위의 정비 • 보수가 이루어졌다.

                                                                                                                (출처_한국고고학 사전 성곽·봉수 편)

 

 

성 안에서 보는 동문 

 

 

 

동쪽 성벽을 따라 내려가며 보는 동문 옹성의 입구

 

 

 

동문 입구부터 남쪽 남문을 지나 서쪽 토성과 만나는 지점까지의 석성은 최근에 복원하며 쌓았다.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던 석성을 조선시대의 사료를 기준으로 복원한 것이다.

 

 

 

 

 

성벽을 복원하고 나니 밖에 보이는 전봇대가 눈에 거슬린다.

이런 전봇대로 전부 지중화하면 보기 좋은 데, 우리 세대가 끝날 때까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읍성의 남쪽 진무루가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성 밖으로 지금은 잔디밭이 보이지만 예전에 해자가 있던 자리다.

일제 강점기에 사라진 이후 해자는 복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잔디밭으로 만들었다.

 

읍취루 앞 작은 연못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두 개 있다는 우물 중 하나다.

 

읍취루와 작은 연못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

 

읍취루

 

진무루를 감싼 옹성 위 병영의 깃발

 

옹성 위에서 바라본 진무루

 

 

 

 

 

 

성으로 출입하기 위하여 성벽이 잘린 성문 구간은 성을 방어하는 데 가장 취약한 곳이다.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항아리 형태로 덧대어 쌓은 성벽으로서 옹성 위에서 성문으로 진입하는 적을

측면이나 후면에서 공격할 수 있으므로 성문의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높인 구조물이다.

외부에서 성문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남문을 두른 옹성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벽과 성문 주위에 여장을 설치해 방어력을 높였다.

 

 

 

읍성의 남쪽과 서쪽이 만나는 지점의 마지막 남은 석축 성벽의 복원 구간

석성을 어떻게 쌓는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곳이 남문의 성벽 밖에 해자가 위치했던 곳이란 걸 알려준다.

 

해자가 있던 곳을 화양목을 심어 위치를 특정한다.

 

 

 

옹벽 안으로 들어와 보는 진무루(남문) 

옛날 조정에 문서를 보낼 땐 비단이나 종이 두루마리에 글을 써 둘둘 말아서 봉인했다.

이런 두루마리에 글을 쓸 땐 세로 쓰기를 좌로 쓰는 게 유리했을 것이다.

옛글씨는 대부분 이렇게 좌로 쓰기가 보편적이다.

 

남쪽 석성과 만나는 서쪽 토성에도 약 50여 m를 석축을 덧대려고 이렇게 석축을 쌓을 공간을 만들었다.

복원하면서 새롭게 석축을 쌓을 구간으로 복원하며 읍성을 더 단단하게 보강하는 셈이다.

 

서쪽과 만나는 남쪽 성벽의 마지막 복원구간 공사도 거의 끝나간다.

고창군은 우리나라 3대 읍성에 무장읍성을 포함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준비를 거의 끝내 가는 중이다. 

 

 

무장읍성을 두 번째 방문하며 더 자세하고 많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

석성의 대부분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며 북·서쪽 토성만 일부 남은 것을 최근 동·남쪽 석성을 복원 중이다.

이 복원 공사도 거의 끝나가므로 무장읍성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우리나라 3대 읍성과 더불에 무장읍성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읍성 안에 있는 무장현 관아는 따로 포스팅했으니 궁금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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