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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일제가 고의로 파괴한 남원읍성의 실태

by 즐풍 2022. 12. 2.

2022_214

 

 

 

2022.10.22. (토) 오후에 잠시 탐방

 

 

아침나절에 순창의 용궐산과 채계산 등산을 끝내고, 오후엔 남원의 광한루원을 둘러봤다.

용궐산이나 채계산은 각각 두 시간 코스라 어렵지 않게 끝냈고, 광한루원은 산책에 불과하다.

광한루원을 탐방할 때 학생들에게 남원읍성 위치를 물었으나 알지 못한다.

카카오 맵이나 네이버 지도엔 남원성으로 표기하고 있어도 지역 주민은 알아들어야 한다.

 

남원의 고지도나 고서에서는 남원성이라 했는데, 문화재청에서 2011.7.28. 남원읍성으로 변경했다.

남원시 관광지도에 나타난 대로 내비에 남원성으로 찍은 다음에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지자체에서는 정부에서 정한 명칭대로 카카오나 네이버 측에 남원읍성으로 변경 요청을 해야 한다.

어렵게 찾은 남원읍성은 대부분 훼손되고 겨우 남은 성벽을 보며 많은 아픔을 느낀다.

 

 

 

□ 남원읍성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지방도시)을 설치하였고,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을 크게 다시 쌓고 수리하여 담을 높였다. 

그해 8월 조·명 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왜군에게 크게 패했고, 

이때 싸우다 죽은 군인과 주민들의 무덤이 만인의총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돌축대의 길이는 2.4km가 넘고, 높이 약 4m에 이르며 성 안에는 70여 개의 우물이 있었다. 

성 내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 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에도 너비가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구성을 볼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며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

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어, 과거 성내의 가로 구성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읍성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하고 있으며, 

규모가 크고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 반듯한 구성과 성내의 도로가

직선으로 구성된 점이 흥미롭다.

※(남원성 → 남원읍성)으로 명칭 변경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_문화재청)

 

고지도에서 보여주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남원성

 

동아일보에 실린 남원읍성 표시를 봐도 거의 정사각형이다.

 

남원읍성은 큰 돌을 밑에 쌓아 성벽 전체의 힘을 견딜 수 있게 했다

가지런히 쌓은 성이 반듯한 게 보기 좋다.

 

우리니라는 성곽의 나라라 할 만큼 많은 성곽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문헌이나 현지조사 등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위치가 확인되는 남한 지역 국가지정 -지방지정 비지정

성곽 문화재 약 2,200여 개라고 한다.

 

 

 

남원읍성에 있는 안내문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너무 간단하게 서술했다.

즐풍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성벽이 많이 허물어져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1911~1913년 사이에 전주-순천 간- 도로가 남원 읍성을 통과하여 개설되면서

성벽이 철거되고 기존 성벽의 자리에 도로가 개설되었다.

1931년 전주-남원선이 개통될 때 남원역이 생기며 북문이 완전히 사라졌고,

1936년 전라선 구간(이리-여수)이 완전 개통되면서 중간역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남원읍성이 거의 사라지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물론

관공서와 상가, 주택 등 건물이 들어섰다.

다행히 현재 남원역은 폐역이 되면서  남원시 신정동으로 이전했다.

현재 쉼터로 쓰이는 동충동의 구 역사에는  생태 공원이 조성되고, 

다행히 남원읍성 북문 및 북벽은 복원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라운드 진 성벽 왼쪽은 북벽, 오른쪽은 서벽이 시작되는 곳이다.

 

남원읍성 서벽을 따라 의총로가 남북으로 연결되고, 

북쪽면을 따라 최근에 교룡로가 붕맛길과 연결되었다.

 

계단을 따라 남원읍성의 남은 구간인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지점을 올라간다.

 

약 4~5m 정도 높이의 북벽 밖은 석성이고 안쪽으로 토성을 덧대여 

성성과 토성의 높이 단차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성벽 밑 왼쪽으로 옛날엔 해자가 있었던 것으로 낮은 도랑처럼 보인다.

 

남원읍성의 서벽이 시작되는 부분부터 북벽을 따라가면 약 170m 지점의 저 큰 나무가 있는 지점에서

성벽은 안타깝게도 사라지고 없다.

그래도 성벽이 있는 곳은 풀을 예초기로 밀어낸 걸 보면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 셈이다.

 

서벽과 북벽이 만나는 지점의 사거리

 

 

 

북벽 약 140여 m 지점에 밖으로 이렇게 치성을 돌출시켰다.

북벽 밖 양쪽으로 관리하며 적군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시설이다.

 

 

 

멀리서 보면 팽나무인 듯 보이는 노거수는 두 그루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 그루이다.

 

서벽은 짧게 끝난다.

 

 

 

북벽 안쪽의 토성

 

 

 

멀리 서는 두 그루처럼 보이던 팽나무도 가까이서 보니 한 그루라는 게 확실히 표가 난다.

이 팽나무야말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멋진 수형을 가졌다.

사실 나무가 깔고 앉은자리는 북벽의 토성이 지나는 길인데, 아직 복원 전이다.

나중에 성벽이 복원된다고 해도 이 나무만큼은 건드리지 않기를 희망한다.

 

팽나무와 만나는 지점 바로 앞에서 북벽은 이렇게 허물어진 채 끝난다.

 

팽나무라고 했지만 어쩌면 느티나무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앞 어느 주민이 감을 수확하고 있어 무슨 나무인지 물어보니 모른다고 한다.

 

성 밖에서 다시 보는 노거수 

 

 

 

치성 끝에서 보는 남원읍성 북벽 

 

 

 

 

 

 

다음은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에서 남원읍성의 중요 부분만 편집한 것으로

남원읍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남원읍성은 조선시대 읍성으로는 규모가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네모반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남원성이 우리나라 읍성에서는 드문 중국식의 네모난 모양을 갖추게 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정비된

도로망에 의한 영향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지적도에 의해 복원한 수치가 동벽 866m, 서벽 850m, 남벽 870m, 북벽 855m로 총둘레가3,441m이다.

남원성의 성벽과 더불어 4개소의 성문과 치성, 여장, 성벽 밖에 해자 등 읍성과 관련된 부속시설도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원성이 새로 개축된 것은 선조 26년(1593) 6월 임진왜란 중으로, 양마장이나 목책도니성과 같은

시설을 갖추었으며,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도 새로 개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양마장 등 중국식의 새로운 시설이 설치된다.

명나라 군대가 개축 작업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성문은 정유재란 때에 피해를 입었는데 숙종 18년(1692)에 4개의 성문이 중창되면서 복구되었다.

동문과 남문은 동학농민전쟁 때 남원성을 포위한 운봉 민보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북문은 1931년 일제강점기 남원역을 지을 때 철거되었고,

서문은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리를 하면서 철거되었다.

남원성은 초축 연대에 관해서는 견해에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통일신라시대로 보고 있으며,

고려 및 조선시대까지 경영되었다가 일제강점기 전후까지 남아 있었다.

 

 

 

남원읍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정사각형으로 만든 성이다.

동문과 남문은 동학농민전쟁 때 파괴되고, 북문과 서문은 일제의 사악한 계획에 따라 사라졌다.

지금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일부 구간만 복원이 가능한 상태이다.

복원 가능한 구간만이라도 조기에 복원하여 우리 민족의 얼을 다시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