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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한산모시 고장의 한산읍성과 건지산성

by 즐풍 2022. 12. 6.

2022_216

 

 

 

2022.10.25. (화) 15:05~16:40, 1시간 35분 탐방    맑음

 

 

한 달간 전북 고창에서의 「농촌에서 살아보기」 체험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다.

생각 같아선 아침 일찍 출발하면 귀갓길에 여러 명소를 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정 많은 고창 사등마을에선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한다.

점심은 안 먹어도 된다는 생각은 막상 상이 차려지자 눈이 휘둥그레 질 정도로 성찬이다.

 

고창농업기술센터에서는 김미란 귀농귀촌 팀장님과 인사이동으로 업무를 맡은 직원 두 명도 함께했다.

곰삭은 간장게장과 냉이나물 장아찌, 꽃게탕, 간자미 무침 등 전라도의 푸짐하고 맛난 음식이 차려졌다.

투덜대던 마음은 어딜 가고 맛난 음식에 정신없이 공깃밥을 추가해 먹기 바빴다.

식사를 마치고 주민들께 작별인사를 하며 떠나려니 아쉬운 생각이 밀려온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난 뒤 요즘 관심을 갖는 부여의 가림성으로 이동하는 데, 갑자기 읍성이 보인다.

이제 막 복원된 듯 각이 지게 잘 쌓은 석성과 붉은 단청이 유난히 돋보이는 누각이 눈에 띈다.

한산읍성은 이렇게 가림성 가는 길에 나타난 예상치 못한 보너스로 받은 읍성이다.

새 차를 사고 싶으면 전에 보이지 않던 그 차가 눈에 들어오듯 한산읍성도 이렇게 품에 안긴다고...

 

 

 

□ 한산읍성(韓山邑城)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의 수행을 위해 소재지를 둘러싸은 성이다.
한산읍성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돌로 쌓은 성이며, 

성의 둘레가 1,233m, 높이가 3m이고, 성 안에 도랑 1개와 우물 4곳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성의 둘레는 1,820m이며, 평면형은 서벽이 동벽보다 긴 사다리꼴 형태이다. 

서쪽과 북쪽의 성벽은 돌로 쌓았고, 남벽은 흙으로 쌓았으며, 동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았다. 

남쪽 벽의 중간에 서천-한산 간 지방도로가 통과하고 있어서 성벽이 잘린 것을 빼고는, 

나머지 대부분의 성벽이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고려 중기에 왜구가 강을 끼고 자주 침범해오자, 고을의 백성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성을 쌓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_문화재청)

 

한산읍성 고지도

 

 

 

 

한산 읍내로 들어가는 길의 읍성 연결을 위해 작은 터널을 만든 노력이 돋보인다.

 

동북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20~30m 정도로 짧게 끝난다.

 

자로 잰 듯 수평계를 이용해 한 치의 오차도 없어 공장에서 찍어낸 듯 보인다. 

 

누각 마루는 이제 막 대패로 민 듯 나이테가 선명해 잠시라도 누워

소나무 향기를 옷에 묻히고 싶을 정도로 상태가 좋다.

 

서쪽 방향으로 이동하며 보는 남문 누각

 

 

한산읍성은 남북의 산지와 중간의 평지를 이용한 평산성 형태이다.
복원된 구간이 아닌 남아있는 성벽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지었고,

현재 남아있는 가장 큰 돌은 길이 2.4m, 높이 60cm, 뒷 뿌리 70c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서쪽 방향은 산으로 올라가는 구간

 

서쪽 방향은 올라가다 보니 나무 숲에 막혀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산은 높지 않고 읍성 둘레도 1,233m에 불과하니 높은 건물에선 한 번에 조망될 정도로 규모가 작다.

성을 더 이상 관리하지 않은 기간이 110여 년 넘게 지나다 보니 이젠 나무가 제법 들어찼다.

 

산으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내려가는 길에 다시 보는 남문

 

산으로 올라가는 읍성 밖인 왼쪽은 성성으로 쌓고 오른쪽은 토성으로 쌓으며 성을 보강했다.

 

 

한산면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해 한산읍성에 대한 안내문이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안내문은 없고 한산읍성 종합정비계획 책자가 있다며 필요한 부분은 복사해 주겠다고 한다.

필요한 부분은 손쉽게 사진을 찍었다.

지금 본 남쪽 성벽은 올해까지 1단계 사업이 끝났다.

2단계 사업은 2023~2027년까지, 3단계 사업은 2028~2037년까지 이어진다.

이런 중기사업으로 복원될 예정이므로 앞으로도 15년 동안 계속 이어질 계획이다.

 

바닷가에 있는 읍성은 대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고을 백성을 지키려고 쌓은 성이다.

한산읍성은 조선 문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 4개소는 동학농민군이 성내로 들어오며 전소시켰다.

일제강점기인 1907년 폐성령에 따라 고의로 북서쪽과 동쪽 성벽 대부분이 훼손시켰다.

이후 읍성 안에 있던 동헌이나 내아, 형청, 향청 등을 면사무소, 순사 주재소, 한산공립보통학교 등으로 사용했다.  

 

 

한산읍성을 좀 더 보기 위해 한산 이씨 시조묘역을 지나 건지산 방향으로 올라간다.

 

한산 이씨 시조묘

 

한산읍성 묘역에서 조금 더 올라오자 한산읍성 북쪽 성벽이 나타난다.

 

위 지도에 보면 북쪽 성벽은 거의 남아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앞에 보이는 대숲에서 성벽은 사라진다.

하여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서쪽 성벽과 만나는 지점의 치성까지 올라간다.

 

 

 

 

성벽에서 잠시 밖으로 내려와 석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한다.

제법 큰 돌로 각을 맞춰 잘 쌓았다.

조선시대 세종 연간의 학자인 양성지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했다.

자료를 찾기 위해 서천군지로 확인해 보니 서천군에는 서천읍성, 한산읍성, 건지산성 등 

읍성과 산성, 진성을 합해 모두 31개의 성이 소개되었다.

서천군은 바다와 접해있기도 하지만, 금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배가 들어갈 수 있다.

이곳 한산면도 금강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4km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다.

고려시대 때부터 왜구의 손쉬운 바닷가는 물론 배를 타고 내륙까지 들어와 곡식 등을 약탈했다.

이곳 대부분의 성은 신라와 격정을 치르거나 왜구로부터 백성의 안전을 위한 성일 수밖에 없다.

이중에 일부는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을 것이고, 구한말엔 동학농민군이 다녀가며 풍파를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일제강점기에 놈들은 우리 민족의 구심점을 없애기 위해 폐성령을 내렸다.

 

 

성 밖은 석성을 쌓고 안쪽은 토성으로 쌓았다.

 

 

 

읍성이라고 하지만, 건지산과 연결되는 3부 지점쯤 된다.

건지산 정상에 일부 석성으로 쌓은 건지산성이 있다고 하니 잠시 후 올라가 본다. 

 

이곳이 북쪽과 서쪽이 만나는 지점으로 모서리에 치성을 쌓았다.

이 치성은 건지산으로 연결하는 이동통로를 나무 데크로 연결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건지산으로 올라간다.

건지산 정상이라고 해야 170m에 지나지 않는 낮은 산이다.

 

순하게 생긴 산책로 느낌이다.

 

워낙 낮은 산이니 등산이랄 것도 없이 산책 삼아 쉽게 올라왔다.

정상엔 이름도 없는 팔각정이 있으니 건지정이라 하자.

 

 

 

 

 

 

 

 

 

산성이 있다고 해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백제 말기에 당과 신라군에 대항하던 성이라고 하니 7세기 중반이다.

벌써 1,300년도 훨씬 전에 쌓은 성이라 긴 세월을 견디며 무뎌지고 훼손되어 찾기도 힘들다. 

 

이 둔덕은 토성인데 왼쪽에 석축이 쌓였는지 알 수 없다.

이렇게 토상을 쌓지 않고 자연적으로 생겼을 리 없다.

 

왼쪽이 정상에서 내려오던 능선으로 자연적인 성벽으로 보인다.

 

건지산에서 본 건지산성은 어디까지가 성벽이고 산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도드라지게 높거나 팔각정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건지산성이거니 할 뿐이다.

오늘은 건지산성보다 한산읍성에 관심을 갖고 이어서 부여에 있는 가림성으로 가기도 바쁘다.

다시 내려와 한산읍성 서쪽과 연결하기 위해 올라왔던 치성으로 내려간다. 

 

건지산성으로 가는 능선의 토성

 

다시 한산읍성 치성을 만난다.

 

낮은 구릉이나 서벽은 제법 경사지게 내려간다.

 

뒤돌아 본 치성

 

성벽 안쪽은 이렇게 토성으로 급격하게 내려간다.

 

성은 소나무와 잘 어울린다.

소나무는 척박한 토사나 심지어 바위에서도 잘 자란다.

이런 소나무는 오천 년을 끝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살아온 우리 민족을 닮았다.

어느 면에서 소나무와 우리 민족은 동일시되기도 한다.

 

바위라 할 만큼 큰 돌 한쪽면을 다듬어 석축을 쌓는 데 이용했다.

이렇게 큰 돌을 중장비도 없이 인력으로 옮긴다는 건 무척이나 고된 일임이 틀림없다.

인구도 많지 않았을 때라 집집마다 장정 한두 명씩 동원되며 많은 공력이 든 한산읍성이다.

 

이 성벽은 과수원인지 일반주택인지 몰라도 담장으로 쓰는 것도 모자라 철책까지 설치했다.

언젠가 성벽은 복원되며 수용될 텐데, 이렇게 개인 용도로 철책을 써도 되나....

 

어이구, ㅉㅉ...

 

이곳은 낮은 석축 위를 토성으로 마무리했다.

 

우리나라 3대 읍성인 순창의 낙안읍성, 서산의 해미읍성, 고창은 고창읍성 외에도

진주성, 고창의 무장읍성 등은 복원되어 본래의 읍성 역할을 다 한다.

정부나 자체에서도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고 많은 돈을 들여 수용하며 복원 중이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이렇게 성벽 밑까지 농경지로 쓰게 되면 붕괴되고 훼손될까 염려된다.

무지한 주민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이제 성벽은 이곳에서 끝나며 도로가 생기도 주택이 들어선다.

1900년도 초까지도 읍성 안에는 관아가 있어 개인주택이 들어선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곧이어 1907년 폐성령이 내려지며 읍성은 이리저리 무너지고 끊어졌다.

무주공산이 된 성에 너 나할 거 없이 점령하고 주택과 상가가 들어서며 철저하게 훼손되니 가슴이 아프다.

 

 

 

지현리 3층 석탑

 

탑신석의 수로 보아 원래 5층 석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석탑의 높이는 2.05m의 3층 석탑으로 지붕돌인 옥개석 3매와 탑신석 4매로 구성되었다.

옥개석 모서리에 풍탁(풍경)을 달았던 풍탁공이 뚫려있다.

1층 탑신에 새겨진 66자의 명문에는 고려 성종 10년(991)에 한산 지방의 호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뜻을 담아 이 탑을 세웠다고 새겼다.

 

다시 마을을 지나 한산면사무소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량을 회수한다.

 

 

생각지도 않은 한산읍성을 둘러보며 서천지역이 왜구의 침탈이 많은 지역이란 걸 알았다.

호남평야와 가까운 데다 금강을 타고 들어오기 쉬운 지리적 영향이 크다.

근세에 들어서며 동학농민군과 일제강점기라는 격동의 세월을 지나며 한산읍성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이곳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때 국운이 다해 입은 많은 피해 중 하나다.

이제 다시 떨쳐 일어나야 하는 데, 요즘 이놈의 세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