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_217
2022.10.25. (화)
고창에서 진행하는 「농촌에서 살아보기」 체험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먼저 한산읍성을 둘러봤다.
한산읍성은 작은 읍성으로 건지산의 건지산성과 이어지다시피 가까운 곳에 있다.
이 건지산성은 백제시대에 만든 것으로 백제 말기 당나라 군과 신라에 대항했던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
역사에서는 주류성으로 알려진 곳으로 국사 시간에 배운 기억이 난다.
한산읍성을 서둘러 본다고 했어도 부여 가림성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기울 때다.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즐풍 뒤로 두 팀이 차에서 내려 가림성을 뒤따라 오른다.
그 유명한 가림성의 사랑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데, 주변엔 10여 명의 진사가 진을 치고 있다.
그러니 이곳의 사랑나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는지 알겠다.
□ 부여 가림성 (扶餘 加林城)
부여 가림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쌓았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 둘러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석성의 둘레는 1,350m이고 높이는 4m가량이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므로 18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었다.
※(부여 성흥산성 → 부여 가림성)으로 명칭 변경되었다.(2011.07.28 고시)
(출처_문화재청)
가림성 가까이 가면서 보는 가림성과 사랑나무
가림성으로 오르며 보는 바위
가림성의 이 사랑나무는 2006년 서동요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드라마 대왕세종, 신의, 육룡이 나르샤, 영화 흥부 등 각종 예능의 촬영지로도 사랑받았다.
가림성으로 들어가기 전 밑에서 찍은 사랑나무의 규모가 대단하다.
가림성 입구에서 보는 가림성 성벽과 우측의 사랑나무 가지
진사들이 섭외한 젊은 연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들은 즐풍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계속 자세를 바꿔가며 모델이 되어 준다.
자세가 바뀔 때마다 셔터는 계속 울리고 이들은 카메라 찍는 걸 즐기고 있다.
즐풍 뒤에 있던 어떤 여성은 낙조의 오메가를 보고 싶다며 연신 중얼거리는 데,
바다로 나가야 일출이나 낙조에서 생기는 오메가를 볼 수 있다는 걸 모른다.
가림성 사랑나무도 중요하지만 해 떨어지기 전에 산성도 둘러봐야 하기에 자리를 옮긴다.
사랑나무에서 서북쪽으로 연결되는 성벽부터 들인다.
서산으로 기우는 태양의 붉은빛을 받은 성벽도 붉게 물든다.
이곳은 최근에 복원한 듯 흰색 일색의 성벽이다.
이 성벽에는 담쟁이덩굴이 기를 쓰고 오르고 있으나 벌써 잎은 대부분 떨어지고 없다.
담쟁이덩굴의 줄기가 성벽을 더 묽게 물들인다.
남문지 바로 앞에는 돌로 쌓았던 보루가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석재를 반출하여 제방을 쌓은 관계로 지금은 마치 토성처럼 되어 있다.
가림성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이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을 봐도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_충청권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고창에서는 단풍을 크게 볼 수 없었는데, 부여만 해도 위도가 높아 참나무에 제법 단풍이 들었다.
가을엔 이렇게 단풍이 남하하고 있다.
왼쪽 성벽으로 나가는 구간은 계곡으로 떨어지며 더 나가기 힘들어 되돌아왔다.
젊은 연인은 갔는지 다른 사람이 모델이 되어 사진을 찍는다.
사랑나무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성벽에는 들꽃이 노랗게 피었다.
이 꽃이 지고 나면 풀은 마르고 찬바람이 일겠다.
가림성 느티나무는 높이 22m, 둘레 5.4m이며, 백제시대 군사적 요충지인 가림성 남문에 위치한다.
가지가 하트처럼 보여 일명 '사랑나무'로 불리는 가림성의 랜드마크이다.
금강 하구 일원인 논산, 강경, 서천, 익산이 한눈에 조망되는 관측소 대표 나무로
넓게 펼쳐진 독특하고 아름다운 나무 모양은 바람의 영향으로 보인다.
오래전부터 사진작가들의 명소로 알려진 곳이며,
최근에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 장소로 알려져 많은 연인들의 '인생 샷' 명소로 사랑받는다. (안내문)
□ 부여 가림성 느티나무
부여의 남쪽, 백마강 건너 장암면과 세도면 및 임천면이 있고 강줄기가 감싸듯 강물이 흘러간다.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성흥산(286m)에 산 7∼8부 능선을 감싸면서 가림성(사적)을 쌓았다.
느티나무는 성벽만 남아있는 성흥산 8부 편평한 능선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수령 약 400년, 수고 22m, 흉고둘레 5.4m으로 넓은 원뿔 모양의 아름다운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무 아래서 논산, 강경, 익산, 서천이 한눈에 보인다.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지정 면적: 1,920㎡, 지정 일자: 2021.08.09
(출처_문화재청)
가림성 발굴 현장
북쪽과 만나는 동쪽 끝은 발굴조사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
하여 태사 유공의 묘로 들어간다.
왕건의 오른팔인 유금필 장군
유금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그가 후백제를 섬멸한 후 남방을 다스릴 때 부여의 임천 지역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패잔병들의 노략질이 심한 데다 악질이 퍼지고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겹쳤으니 백성들
의 삶이 사람의 삶이라 할 수 없구나. 빈민들을 구제하는 것이 왕을 뵈러 가는 것보다 더
급하다. 고을의 창고를 모두 열어 빈민들을 구제하라!”
임천의 비참한 실상을 본 유금필은 고을의 창고를 모두 열어 식량을 나누어 주고 둔전을
운영하여 민심을 수습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임천의 백성들은 유금필의 선정에 감동하여 사당을 세워 장군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산성 입구에 있는 사당은 1976년 이후 문중에서 별도로 사우를 건축한 것이다.
건물에는 ‘유태사지묘(庾太師之廟)’라는 편액을 걸고, 내부에 영정을 모셔놓았다.
(출처_충청권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성흥루 정자
부여 가림성은 너무 늦게 오르는 바람에 사랑나무 밖으로 지는 일몰을 구경하는 행운을 얻었다.
반대로 가림성을 여유 있게 살필 시간은 부족했으니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은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낙조의 풍경은 만나기 어려운 장면이니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부여는 백제 문화와 역사의 보고이다.
그중에 하나인 부여 가림성을 시간이 없어 서둘러 봤다.
시간을 내 부소산 낙화암, 부여 왕릉원, 정림사지 5층 석탑 등의 문화유산을 탐방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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