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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축구장보다 조금 더 큰 평택 농성(農城)

by 즐풍 2022.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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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3. (목) 오전에 한 시간 탐방

 

 

아내가 다음 주 월요일까지 휴가라 평소 관심 있게 봤던 평택 농성으로 간다.

어디 한 군데 볼일을 끝내고 내비가 안내하는 대로 갔더니 주차장이 아닌 농성 입구다.

서너 대 주차할 공간은 있으나 마을 안 좁을 길을 통과한 곳이라 마땅치 않지만 주차했다.

이어서 탐방하는 평택 농성은 읍성이나 진성도 아닌 농성(農城)이다.

평택 농성이 궁금해 「평택 농성」을 검색하면 2009년 7월 당시 평택 쌍용자동차에서 직원 2,646명을 

정리 해고하는 사측의 ‘경영정상화 방침’에 반발해 평택 공장에서 농성하는 뉴스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만큼 평택 농성은 규모가 작고 유명하지 않다는 반증이다.

 

 

□ 평택 농성(農城)

 

농성은 안성천과 아산만이 합쳐지는 지역에 형성된 평야지대에 있는 성이다.
이 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다.

성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전체 둘레는 약 300m에 이르고 성벽의 높이는 5~8m이다. 

동쪽과 서쪽에는 문 터가 남아있다. 성이 쌓인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성을 쌓은 이유로 삼국시대에 도적을 막기 위하여 쌓았다는 설,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평택 임 씨의 시조인 임팔급(林八伋)이 축조하여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는 설, 

고려시대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설,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전한다.

성 바로 옆에는 겨울철에는 따뜻한 물이, 여름철에는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평택 서부지역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성곽 문화재가 남아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아산만 일대의 해안방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유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출처_안내문)

 

해발 24m의 낮은 구릉지에 있다. 

성벽은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외곽을 감싸는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농성 주변은 낮은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있어 남쪽과 서쪽은 아산만 일대까지 바라보인다. 

농성 북쪽 2km 지점에는 진위천과 안성천이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향하며 동서교통의 요지이다.

농성의 평면 형태는 남북이 긴 장방형이다. 

전체 둘레는 337m이며, 외벽이 높이는 8∼10m로 성벽은 부분적으로만 조사되었다. 

토성 벽은 성토층이 두껍고 경사지게 조성된 것으로 보아 성토 다짐 공법으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문지는 동벽과 서벽의 중간 부분에 있다. 

통상 토성도 문구부는 석축으로 마감하지만, 농성은 측벽을 흙으로 마감했다. 

문지 바닥에는 석축배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유물은 회색 연질토기편, 기와편, 고려, 조선 시대의 자기편 등이 수습되고 있다.

농성은 삼국 시대에 쌓았다는 설과 신라 말기 중국에서 건너온 임팔급이 쌓았다는 설이 있다. 

고려 시대에 서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 등이 전한다. 

농성은 일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축성시기나 축성 목적이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다만 축성법이나 출토유물을 고려하면 고려-조선시대 군현의 창성(倉城) 일 가능성이 크다. 

농성은 우리나라 축성사에서 삼국 시대에 시작된 평지성의 계보를 이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출처_문화재청)

 

 

 

평택 농성은 앞서 현지에 있는 안내문과 문화재청의 안내문으로 규모가 작다는 걸 알았다.

FIFA에서는 2002년 월드컵 축구 이후에 국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경기장의 규격은 길이 105m, 너비 68m이다.

문화재청에서 발표한 평택 농성의 남북 길이는 134m, 동서 길이는 96m로 전체 길이는 337m이다.

그러니 국제 표준 경기장보다 조금 더 큰 정도에 불과한 작은 성이다.

 

 

농성은 1997-1998년에 지표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당시 성내에 밭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경작지들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둘레가 약 300m이며 타원형에 동쪽과 서쪽 성벽에 문지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농성의 정비 작업을 하여 2002~2003년까지 정밀 지표조사 및 시·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기존 성벽의 실측 수치와 약간 차이가 있었다.

평면은 남북이 긴 장방형을 취하고 있지만, 전체 둘레는 337m이다.

 

산성의 내부 면적은 5,984m㎡, 외벽선 기준 면적은 11,312m㎡이다. 

외벽의 높이는  5~8m이고, 내벽의 높이는 2.2~2.4m, 성벽 하단부 너비는 10~17m, 토루 너비는 2m 정도이다.

성벽이 회절하는 지점에서는 성벽의 규모가 최대치를 보였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평택 농성은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산 41-241-2 일대에 있다.

팽성읍사무소에서 서북쪽 1.5km 떨어진 지점에 해당하는 해발 24m의 낮은 구릉에 위치한다.

성벽은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외곽을 감싸는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농성은 입지상 평지성(平地域)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주변은 해발 15m의 비교적 낮은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있기 때문에 성벽은 주변에서는 돌출된 모습이다.

북쪽과 동쪽에는 해발 20~30m의 낮은 구릉이 있어 시야에 제한이 있지만,

남쪽과 서쪽은 평야가 있어서 아산만(牙山灣)까지 시계가 양호하다.

농성 북쪽 2 km 지점에 진위천(振威川)과 안성천(安城川)이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향하는

교통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농성이란 이름은 성 안팎이 모두 농사를 짓던 농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농지란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

이 성을 두 차례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했음에도 성을 처음 쌓은 시대를 특정하지 못한다.

성을 처음 쌓을 때야 개똥 성이든 소똥 성이든 뭔가 이름이 있었겠지만, 

어느 순간 이름은 없어지고 농사를 지었던 땅이라 하여 지금은 그저 평택 농성으로 불린다.

 

 

성내부와 일부 지점에 대한 시·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외황과 문지에서 고려시대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기타 지점에서는 출토된 유물이 소량이라서 각 유구와의 연관성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기와의 경우는 1998년 지표조사와 동일하게 어골문과 격자문이 나타난 것들이 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기와들은 성형 상태가 불량한 특징을 보이는데,인근의 평택 덕목리성,

평택 비파산성(琵琶山城)에서 수습된 고려시대 기와와 유사한 현상이 확인된다.

그리고 동이, 편병,편호의 기형을 가진 고려시대 토기와 소량의 청자 편이 수습된 것도

평택 덕목리성, 평택 비파산성에서 출토된 것들과 유사하다.

자기류는 주로 14~15세기의 청자와 분청사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안에는 30여 그루의 소나무와 무궁화나무 몇 그루, 회양목이 조금 군락을 이루고 대부분은 잔디밭이다.

성 밖은 단풍나무를 비롯해 소나무, 잣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식재되어 있다.

지금은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텃새인지 철새인지 모를 귀여운 새 한 마리

 

인근 주민은 무념무상으로 성벽을 밟는지 생각을 정리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이 성벽을 밟으면 일이 잘 풀리면 좋겠다.

 

 

 

 

 

 

 

 

나무를 너무 밀식하면 키만 크게 자라니 볼품이 없고,

드문드문 심으면 자라는 나무의 모양새가 안 난다.

그래도 용문산 은행나무처럼 멋지게 키우려면 간격이 넓어야 좋다.

 

 

성 둘레가 짧으니 어느새 한 바퀴 돌고 다시 만난다.

 

 

충절공 임팔용 동상 아래엔 대한 자부심 가득한 안내문 중 공(公)이 평택 농성을 쌓았다는 글이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에서는 회의적인 입장이다.

 

 

 

농성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이 존재한다. 

 

첫째, 삼국시대 축조설은 과거 김해식(金海式) 토기 편이 이곳에서 수습되었다는 전언을 근거로 한다.

그렇지만 삼국시대까지 올라가는 토기류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둘째, 통일신라시대 축조설이다.

이것은 임씨 문중의 주장에 의한 것으로 『평택군지』에 실린 향토사 입장의 주장이다.

1998년의 지표 조사에서 수습된 토기류가 통일신라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보고되었으나,

이후 추가된 조사를 참고하여 다른 자료들과 비교해 본다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셋째, 고려시대 축성설이다.

조선시대 읍성이 석축성이 많은 점과 인근의 용인 처인성(處仁城)과의 입지와 형태 비교를 통해서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서 나온 대부분의 유물이 고려시대로 편년 된다는 점과 초축 당시의 유구로 파악되는

외황의 바닥이나 동문지 배수로에서도 고려시대 유물이 수습된 점에서 가능성이 높다.

 

넷째, 조선시대 축성설이다.

이는『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寶)』과 같은 조선 전기의 기록에 농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나 『팽성지(鼓城志)』와 같은 지방 지리지에 농성의 언급에 주목한 것이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왜구와 농성과의 관련성에 대한 언급도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성에서 확인되는 고려시대 유물들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으며,

민간 전언에 근거한 조선총독부 자료도 근거가 약하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농성은 구체적으로 어느 시점인지 단언하 기는 어렵지만, 출토된 유물이나 성벽의 구조가 용성리성,

덕목리성, 비파산성과 같은 안성천 북쪽에 있는 고려시대 토성들과 비교된다는 점에서 고려 전기에

만일대 해안방어와 관련하여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세 번째 방문에서 한국고고학전문사전을 읽으며 비로소 평택 농성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처음에 왔을 땐 이곳에서 어떠한 기왓장이나 토기도 발견할 수 없어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었었다.

그러나 이미 지표 조사에 이어 시·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대략 시기를 추정한다.

수습된 여러 유물들을 연구하고 논의하는 등의 유물들과 대화를 통해 언젠가 축조 시기를 특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