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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무장읍성 안에 잘 복원된 관아 살펴보기

by 즐풍 2022. 12. 19.

 

 

 

2022.10.7 (금) 오후에 무장현 관아와 읍성 탐방

 

 

작년에 무장현 관아와 읍성을 탐방한 바 있으나 이번엔 고창에서 한 달 살이 할 기회가 생겨 다시 방문했다.

읍성 성벽을 석축으로 쌓는 작업은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석성 쌓는 작업이 마무리되면 인근에 있는 고창읍성만큼이나 반듯하고 멋진 무장읍성이 될 것이다.

무장읍성 포스팅은 진작에 끝났고, 게으름 끝에 읍성 안 관아는 이제야 마무리한다.

 

관아는 지역사회를 다스리고 소통하기 위하여 관원들이 정무를 보던 기관이다.

오늘날로 얘기하면 시청이나 군청 같은 관공서 건물이다.

지금의 지방에도 시(군) 청, 법원, 검찰청, 경찰서, 세무서 등으로 구분되지만 예전에 모두 관아에서 처리했다.

읍성이 아니라도 지방엔 감영, 도호부, 군, 현에 관아가 있다. 

 

 

 

□ 무장현 관아와 읍성

 

 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는 『무장현 관아와 읍성』는 읍성을 보호하는 읍성이 잘 남아 있다.

성 내부에 옛 고을의 중요시설인 객사와 동헌 건물이 현존하고 있으나 현재 문화재 명칭인 “무장읍성”은

성 자체만을 연상시킬 우려가 있어 성을 쌓은 목적과 성내부에 남아 있는 관아의 의미를 포함한 명칭인

“무장현 관아와 읍성”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이다.

향후 무장현 성과 내부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의 복원을 통하여 조선 관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비하여 문화체험의 장으로 활용할 뿐 아니라 민족 문화의 정체성 회복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출처_문화재청)

 

 무장현읍성 고지도

 

안쪽에서 보는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 

 

읍성 안에 관아가 있는 경우는 어느 곳보다 관리가 더 잘 된다.

객사 주변엔 노거수가 많아 엣스러운 풍취를 느낄 수 있다.

 

 

 

 

 

 

□ 고창 무장 객사 (高敞茂長客舍)

 

이 건물은 조선시대 무장현의 객사로 쓰이던 것으로 선조 14년(1581)에 건립하였다.
객사는 궐패를 모셔 두고 현의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는 정청과 왕명으로 지방에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의 숙소로 쓰이는 좌·우현으로 구성된다. 

이 객사의 정청은 바로 위까지 내려와 있다. 

눈썹은 초승달처럼 가냘프게 처리되어 있고 눈은 반쯤 뜨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초석의 석재 하부는 네모지게 상부는 반구형으로 다듬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외에 별다른 특징이 없다.
우현은 정청보다 지붕을 낮게 꾸미어 건물의 격식을 낮추었다. 

이 밖에 외대문 중문과 좌우량이 있었으나 남아 있지 않다. 

석축에 오르내리는 돌계단 등에도 호랑이·구름무늬 등을 양각해 놓아서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건물 정면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객사의 건물은 

면사무소로 사용하면서 일부 형질을 변경했던 것을 1990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편액이 걸렸다.

                                                                                                                                   (출처_문화재청)

 

 

다른 위치에서 보는 객사인 송사지관

 

 

무장읍성은 고려 때까지 무송(茂松)현과 장사(長沙)현 두 고을을 왜구 방비를 위해 하나로
통합하고 그 중간지점을 현의 치소로 삼아 읍성을 축조했던 조선시대 연안 읍성 중 하나다.

이 두 지역에서 송(松)과 사(沙)를 따 송사지관(松沙之館)이라 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의 제일 큰 느티나무에서 보는 송사지관인 객사다.

 

송사지관 앞뜰에서 보는 건너편 읍취루 

 

고을마다 관아 주변의 나무는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나무로 수백 년 이상의 고목들이다.

이들 노거수는 그간 관리가 잘 되어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는 '역사 기념수' 경우가 많다.

관아 속의 나무는 풍수를 보완하도록 식재하므로 경관 고고학에서 말하는 지표식물 역할을 한다.

 

 

진무루

 

읍취루 

 

읍취루 내부의 탁 트인 실내 공간

 

 

읍취루 복원기에 읍취루의 뜻을 적어 놓은 내용을 보면,

읍(挹)은 잡아당길 읍으로 자동사이고 동헌의 당호(堂號)가 취백당(翠白堂)이라

푸를 취(翠) 자를 취하여 읍취루라 하였다.

현감이 수시로 지역의 선비들을 모아 민원을 청취한 처소였음을 건물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아래는 1498년 전라관찰사 안침이 이곳을 방문하여 지은 시를 걸어놓은 것이다.

 

 

읍취루에서 보는 객사

 

송사지관 앞마당에서 보는 읍취루 

 

 

이렇게 관아는 건물마다 독자적인 당호를 갖고 있어 이를 현판에 새기고 있다.

고을의 옛 지명이나 고을의 특징, 지방관의 고을 통치에 대한 각오,

이른바 시정 지침이라 할 수 있는 통치 방향, 건물의 활용 방향 등 그 뜻은 다양하다.

오늘날에도 정부나 각 부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의 기본방향이 바뀌듯 당시 각 군현에

부임하여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 그 지역을 어떻게 다스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좋은 뜻을 취한 것이다.

 

 

읍취루 밖에 있는 작은 연못

 

작은 우물도 보인다.

 

읍취루에 여러 시문이 걸려 있는 가운데 신숙주의 시를 보면,

“외로운 성 위의 정자에 두 밤 자는데, 서풍이 꿈속에 맑게 불어오네.

오동나무는 남은 잎을 나부끼어 읊는 가운데에 늙어가고, 국화는 새 꽃을 늘어뜨린 게 특별히 밝구나.

육지 끝 바다 하늘에 먼 생각을 일으키고, 가을 깊은데 북과 호각소리 변방에 울리네.

높은 시에 화답하려 하나 좋은 글귀가 없으니 어찌 시를 지어 성명을 기록한다 하랴.”라고 심정을 적은 글이다.

 

 

읍취루와 사두봉의 나무숲 

 

 

성내리 사두봉과 용소

 

무장 고을 터를 반사[서리고 있는 뱀] 형국이라 하여 조석으로 양쪽 용소에서 안개가 솟아 나와 

고을 안을 뒤덮으면 경치도 좋거니와 이 기운으로 고을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게 되고 

또한 많은 인걸이 배출되어 옛날 무장 현령의 세력이 드세었다고 한다. 

예부터 ‘고창은 성자랑’, ‘흥덕은 양반 자랑’, ‘무장은 아전 자랑’ 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무장 고을은 지방세가 강하여 항상 이 고을에는 역량 있는 현감들이 부임해 왔다. 

만약 사람만 좋고 역량이 부족한 현감이 왔다가는 얼마 가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와 같이 바닥이 드세고 배타성이 강하다 보니 시장이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6㎞나 떨어져 있는 안진머리장[현 해리면 안산리 이상동]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이 장터는 사두봉에서 마주 보이며, 장날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시끄러우므로 

뱀이 이곳을 넘보아 장날이면 젊은 청년 한 사람씩 희생이 되었다. 

고을의 역대 현감들은 이 끔찍한 사건을 해결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어느 날 시주를 얻으러 온 중이 사두봉을 깎아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리게 해야 한다는 묘책을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사두봉을 깎아 메워 버리면 옛날처럼 번창하는 기운이 차츰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현감은 이제야 무서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고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두봉에서 안진머리장이 안 보이게 깎아내리고 뱀의 두 눈인 용소를 메우도록 했다.

그 뒤부터 안진머리장날에 싸움을 하고 살인을 하는 변은 없어졌지만 과연 무장에서 인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를 또 걱정하던 중에 도사 한 분이 지나다가 이 말을 듣고 일러주기를 사두봉에 나무를 심어

이 나무가 예전 사두봉 높이만큼 자라게 하고 남산 밑에 개구리 못을 만들면 이 뱀의 먹이가 생기게 되어

무장 고을은 다시 번영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주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고을 현감은 깎아내린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도 만들었다.

이 개구리 연못 자리가 지금의 무장 장터이고 객사 주변의 나무들은 그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출처_디지털 고창문화대전)

 

북쪽 성벽에서 보는 사두봉의 나무숲

 

사두봉의 느티나무는 하늘을 덮을 만큼 크고 우람하다.

 

 

 

 

 

사창이 있던 자리

 

 

 

내삼문을 지나면 관아의 중심인 동헌으로 들어가게 된다.

 

 

무장 동헌(東軒)

 

동헌은 조선시대의 수령이 정무를 보던 관아의 중심 건물로 1914년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무장현 동헌으로 사용되어왔다.
동헌은 조선 명종 20년(1565년)에 건립된 후 일제 강정기에는 일본군 무장수비보병대 사무실로 사용했다.

광복 후 무장국민학교 교실로 사용되는 등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대변해주는 건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용 용도에 따라 많이 변형된 것을 1989년 고증을 거쳐 원형으로 복원한 것이다.

당호인 취백당의 翠자는 소나무처럼 푸른 기상을 白자는 모래처럼 희고 결백한 정조를 상징한다.

이곳에서 정무를 보는 현감들이 소나무처럼 푸르름을 간직하고 모래처럼 청백하게 정무를 펼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안내문)

 

 

멀리서 보는 동헌

 

내삼문과 동헌 

 

동헌 뒤 노거수 

 

멋지게 자란 소나무

 

객사에서 동헌 쪽으로 이어지는 사두봉의 노거수들

 

 

 

 

 

 

 

 

 

먼저 포스팅한 무장현 읍성이 궁금하면 

 

새롭게 복원된 고창 무장읍성 탐방

2022_206 2022.10.7 (금) 오후에 탐방 고창에 한 달간 거소를 둔 뒤 제일 먼저 한 것은 고창읍성 탐방이었다. 1년 만에 다시 본 고창읍성은 여전히 고색창연한 읍성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electee.tistory.com

 

2005년에 찍은 무장현 읍성의 항공사진을 보면 창고나 농지로 쓰인 곳을 전부 복원한 것을 알 수 있다.

 

 

무장현 읍성과 관아를 둘러보며 그간 고창군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복원한 것을 알게 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 때 폐성령에 따라 남쪽 성벽이 대부분 훼손된 걸 복원하였고,

성 안에 사라진 여러 건물도 점차 복원하고 있으나 사창은 아직 주춧돌만 남아있다.

언젠가 모두 복원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