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3. (토) 오후에 잠시 탐방
강화도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광성보를 들린다.
이미 몇 차례 다녀간 곳이라 새로울 것도 없는 데다 일행과 함께 동행하여 개별적 행동에 제약이 따른다.
지금까지 안해루 자체가 광성보라고 생각했는데, 이 포스팅을 하며 항공사진을 보니 광성보는 따로 있다.
광해루 왼쪽에 광성보로 들어가는 계단이 있는 데 알지 못한 것이다.
강화도에 언제 다시 갈지 모르지만 가게 되면 2박 3일 정도 샅샅이 탐방해야겠다.
□ 강화 외성 (江華 外城)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년(1233)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강화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산성이다.
외성은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는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4년(1237)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비상시에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였다.
숙종 때 병자호란기(1636)에 허물어진 외성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고 돈대(墩臺)를 설치하였다.
영조 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나라에 건의하여
영조 19년(1743)에서 이듬해에 걸쳐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2001년 동양고고학연구소에서 실시한 오두돈 주변의 전축성 구간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에 의하면,
뻘층을 기초로 머릿돌을 올리고 그 위에 대형석재로 석벽의 중심을 삼고 그 위에 머릿돌을 올리고
다시 전돌을 여러 단 쌓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성은 높이 20척, 폭 5척이며, 6개의 문루(조해루·복파로·진해루·참경루·공조로·안해루)와 암문 6개소,
수문 17개소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강화외성은 고려 후기∼17세기 후반 도성의 구조와 축성기법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성은 벽돌로 개축한 전축성(塼築城)이 오두돈 주변(남측)에 남아 있어
수원 화성(사적 제3호)과 더불어 전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출처_문화재청)
광성보 (출처_문화재청, 2020년 사적정기조사)
안해루 왼쪽에 있는 광성보는 반원형의 보이다.
□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닷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었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광성보 → 강화 광성보)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출처_문화재청)
쌍충비각은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전사한 어재연(魚在淵) 장군과 그의 아우 재순 (在淳)의 비문(碑文)으로
어씨 종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손돌목돈대 (출처_문화재청, 2020년 사적정기조사)
손돌목돈대를 항공사진으로 보면 로마의 원형 경기장처럼 보인다.
제법 근사한 원형이다.
안에서 본 손돌목돈대
총이나 대포도 쏠 수 있게 만든 암문은 벽돌로 쌓은 멋진 손돌목돈대이다.
용두돈대 전경 (출처_문화재청, 2020년 사적정기조사)
바닷물이 빠질 때 유속은 더 빨라져 맨 아래쪽에 물살이 생기는 게 보인다.
이럴 땐 배를 타지 않는 게 상책이다.
천혜의 요새, 강화도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으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바다 자체가 거대한 방어막 구실을 하였으며, 개성에서 서울까지의 거리 가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유사시 짧은 시간에 피난할 수 있는 장소였다.
또한 토지가 넓고 풍부한 식량이 소출되는 양질의 토질로 이루어져 유사시 경제적으로 자립이 가능한 곳이었다.
뿐만이니라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의 물산이 수로를 통해 들어올 수 있어 서울·경기 일원의 풍요한
물자 보급로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시대에 몽고의 침략 당시 강화에서 30여 년간 대몽항쟁을 할 수 있었으며
오랫동안 국가의 군사요충지로 인식되었다.
조선이 개국되고 특히 인조대 정묘·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방상 강화도의 종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기마병을 주축으로 하는 청나라 군대는 수전에 약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이들의 침입에 대비한 피난처였다.
효종·현종·숙종대를 거치면서 강화도는 군사요충지로서 군사시설·군사무기 병력이 더욱 확충되어
남한산성과 함께 진략적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다.
조선말기에 이르러서 군함대의 출몰이 빈번해지자 평양·서울로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요충지로
부각되어 방어가 더욱 강화되었다.
(출처_「수자기(帥字旗) 136년 만의 귀한」에서 발췌)
용두돈대로 들어가는 길
용두돈대(龍頭墩臺)
좁은 강화해협에 용머리처럼 쑥 내민 암반 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교두보로 1679년 축성되었으며
병인·신미양요(洋擾) 때 치열한 격전지였다.
1977년 복원되었다.
진 ·보 ·돈대 설치
진鎭 보堡는 군사 기지를 말하며 진에는 첨사僉使나 만호萬戶가, 보에는 별장別將이 임명되었고,
각 진보에는 3~4개의 돈대墩臺가 소속되었다.
돈대는 적이나 타나는 것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해 해변 등에 설치하는 소규모의 방어시설물이다
(출처_「수자기(帥字旗) 136년 만의 귀한」에서 발췌)
강화도의 5진 7보 53돈대
병자호안(1636년~1637년) 이후 조선의 방어시설을 확충하면서,
강화도 해안을 방어하는 5개의 진(鎭)과 7개의 보(堡), 해안선을 따라 53돈대(墩臺)를 설치했다.
진은 대대, 보는 중대 규모의 군대이다.
돈대는 경사면을 자르거나 흙을 돋우어 평탄하게 만들고 옹벽을 구축한 곳을 말한다.
돈대의 형태는 원형과 방형이 있는데,
성을 쌓기 곤란한 지역이나 교차사격이 가능한 지점에 성곽 대체시설로 죽조하였다.
1679년(숙종 5) 병조판서 김석주의 건의로 15,000명의 인력을 투입하여 80일 동안
48개의 돈대를 설치하고 이후 추가되었다. (안내문)
1618년(조선 광해군 10년 ) 고려시대 외성올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으로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 되었다.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된 것은 1745년으로 이때 안해루(按海樓)란 성문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신미양요의 가장 격렬한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즈가 통상을 표방하면서
아세아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올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올 전개하였다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도람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미군은 맥키 중위를 위시하여 3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하였다.
당시 미군의 병기는 9인치 8인치 둥 85문의 대포였고 조선군은 정조준이 안 되는 대포와 소포 등이었다.
미군은 조선군의 용감한 군인 정신에 놀라 4월 25일 퇴각함에 48시간의 한·미전이 끝났다.
우리는 여기서 필사 항전의 군인 정신올 본받아야 한다.
신미양요 때 성책과 문루가 파괴된 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광성돈 안해루 손돌항돈, 용두돈과
신미양요 때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다.
특히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자주 정신과 호국의 기상올 이어받기 위하여 강화 유적올
보수 정화하면서 세운 「강화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출처_문화재청)
신미양요는 1871년 여름 강화도에 침투한 미국 함대에 대항하여 저항하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투였다.
당시 조선군은 대부분 전사하고 조선군을 지휘하던 본영의 수자기와 당시에 사용되었던
조선군의 화기는 미국 해군의 전리품이 되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미국은 우리의 우방국이 되었고,
그간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 보관 중이던 수자기는 2007년 10월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 깃발은 한가운데에 수帥 자가 그려진 총지휘관을 상징하던 군기로 그 규모도 엄청나거니와
현존하는 유일한 장수 깃발이다.
수자기는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당시의 실태를 대변해 주는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병사들의 용기와 불굴의 국난 극복정신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출처_「수자기(帥字旗) 136년 만의 귀한」에서 발췌)
깃발의 의미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의 전투에서는 깃발과 북, 징 등이 유일한 명령 전달수단이었다.
군대의 조련, 진을 치는 법, 호령 등에 대한 규정 등을 설명한 「병학지남兵學指南」 (l787년)에 따르면
기順는 색으로 신호한 것이고, 북은 소리로 신호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장수와 군사들은 귀르는 정과 북소리만 듣고, 눈으로는 깃발의 방향과 색깔만을 볼 것이며,
누구를 막론하고 입으로 명령하는 것은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군사운용에서 군기軍旗 체계는 그만큼 중요하였다.
(출처_「수자기(帥字旗) 136년 만의 귀한」에서 발췌)
대장이 있음을 의미하는 수자기
콜로라도 함상에 게양한 수자기의 실제 크기
좌측부터 브라운 상병, 퍼비스 일병, 틸톤 대위
용두돈대를 끝으로 광성보 탐방을 마치고 되돌아 나간다.
가는 길엔 소나무 숲이 좋아 어느 때든 탐방하기 좋은 코스다.
몽고의 침입
고려 고종 18년(1231) 몽고의 제1차 침입을 당했다.
살레탑이 거느린 몽고군은 개경 부근까지 침입하였다.
1232년(高宗 19년)에 고려는 수도를 강화로 옮기고 항전에 들어갔다.
강화는 개경에서 가깝고 유목민인 몽고군이 육전에는 강하나 해전에는 약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강화에 천도한 다음 달인 8월에 몽고의 장군 살레탑이 다시 고려로 침입했다.
이들은 개경과 강화를 우회, 한양산성을 공략하고 수원의 소읍인 처인부곡에서 살레탑은
승병 김윤후(金允候) 장군의 화살에 사살당하고 퇴각했다.
고종 22년 (1235년)부터 동 26년 (1239년)까지 4년 동안 고려를 공격하던 몽고군은 경주까지 내려가
고종 37년, 38년에 침입이 있었으며 46년 장기 항전체제도 한계가 있어 고려 태자 전이 몽고에 가서
화평교섭을 하니 이를 수락, 1260년 元나라 세조(후빌라이)가 고려 측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광성보는 안해루 왼쪽에 보이는 층계를 지나 암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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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탐방을 마치고 잠시 강화인삼백화점에 들렀다.
몇몇 통장님은 인삼이나 관련 제품을 구매하기도 했다.
잠깐 다녀온 광성보이지만, 미국과 맞서 싸우며 적이었던 미군도 그 용기를 높게 산 신미양요 전투였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수자기를 찾아오는 쾌거도 만들었다.
이렇게 어디를 가든 고려시대부터 구한말까지 격전지였던 강화도는 살아있는 노천 박물관이다.
알고 보면 더 의미 있게 다가오므로 자료 수집을 많이 했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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