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22
2022.12.8. (목) 07:31~10:38(3시간 7분 산행, 6.61km 이동) 맑음
대중교통으로 가려던 논산 노성산을 자차로 다녀왔다.
노성산뿐만 아니라 인근의 향적산까지 탄 다음 시간이 나면 부여의 부소산성까지 둘러볼 생각이다.
지방 산행에 차량을 갖고 가면 원점 회귀해야 하는 불편은 따르지만 시간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요즘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간 전쟁으로 물가가 폭등한다고 하지만 유가는 그런대로 견딜만한 수준이다.
세계 2강으로 주목받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땐 1주일이면 전쟁이 끝날 줄 알았는 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전황은 예상과 달리 요즘은 우크라이나의 판정승으로 기우는 느낌이다.
코미디언이 대통령에 당선돼 코미디 같은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전쟁으로 대 반전이 생긴 것이다.
이런 걸 보면 한 나라의 지도자가 갖는 덕목이 중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엊그제 북한 무인기 5대가 남한 영공을 휘젓고 다니며 농락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전투기가 발진했으나 추락하는 어이없는 사고까지 발생했으나 무인기는 한 대도 격추하지 못했다.
전투기 조종사가 민간의 피해를 우려해 소총을 제대로 발사하지 못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남는다.
그런 충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군을 책망한 군 미필 대통령이 더 꼴불견인 한심한 세상이 됐다.
오늘은 대통령이 보낸 신년 연하장을 두고 외국 디자인 도용의혹이 불거졌다.
건희 여사의 유명한 유지 표절에 이어 대통령의 연하장까지 표절, 표절, 표절...
대통령실은 당장 아니라고 반박했는데, 사실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용산 참사에도 사과하지 않고 모든 건 전 정부로 떠넘기는 대통령이라 믿기도 겁난다.
□ 노성산성(論山 魯城山城)
논산 노성산성은 해발 348m의 노성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백제시대 테뫼식* 산성이다.
노성산성은 산의 정상을 삼태기 모양으로 에워싸고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남쪽이 6.8m, 서쪽이 4.2m이다.
성벽은 직사각형 모양의 돌을 다듬어 쌓았는데 아래쪽에서부터 계단식으로
점차 안쪽으로 모여들도록 쌓아서 매우 견고한 모양새이다.
노성산성의 위치는 공주와 논산을 거쳐 연산으로 통하는 주요 지점에 있으며,
땅의 모양을 이용하여 성을 쌓은 점은 인근의 산성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성벽의 북쪽 정상에는 둘레 205m인 토루**가 있는데, 장수가 지휘를 하는 장대지(將臺址)로 여겨진다.
동벽 중간에 있는 둘레 50m의 사다리꼴 석축은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데,
「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봉수대가 황화산(현 논산시 등화동)과
월성산(현 공주시 옥룡동과 소학동)을 잇는다고 되어 있다.
성안에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사용했던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테뫼식: 산봉우리에 테를 두른 듯이 쌓은 산성 **토루(土壘): 흙으로 쌓은 성채
(안내문)
□ 궐리탑((闕理塔)
노성 궐리사는 공자가 탄생한 궐리촌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1716년 숙종 42년 노성의 니구산에 건립하였다.
「궐리」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퀄리탑 역시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퀄리탑은 높이 3.91m, 석주의 지름이 38cm이다.
오늘날의 기관명을 표시하는 현판과 같은 기능을 하였으며, 석주에 음각으로 쓰인 궐리(闕理)라는 글자는
송시열 선생의 제자인 문순공 권하상의 작품이다.
네모난 기단 위에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7개의 별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배흘림의 각주석을 세웠으며 꼭대기에는 정방형의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기단 위에 그려져 있는 북두칠성의 맨 끝 별이 공자가 탄생한 중국 곡부의 니구산을 가리키고 있으며,
탑 부분 옥개석의 흠 부분은 별의 빛을 의미한다는 설이 구전되고 있다. (안내문)
약 4m에 달하는 돌기둥은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잘 세웠다.
꼭대기에 옥개석을 씌워 여느 탑처럼 느끼게 만든 새로운 형식의 탑이다.
가장 간단한 형태의 돌탑인 셈이다.
노산의 노성 궐리사는 문이 잠겨 들어갈 수 없다.
우리나라에 논산, 오산, 진주 등 세 개밖에 없는 궐리사인데, 이렇게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없다니 다소 섭섭하다.
노성 향교 앞에 주차하고 명재고택을 지나 산행을 시작한다.
향교나 명재고택을 별도로 포스팅하기로 하고, 산을 오르는 동안 특별히 볼만한 건 없다.
노성산을 등산하다면 산정에서 보는 계룡산 등 주변풍경과 노성산성, 금강대도 노성본원 정도이다.
드디어 노성산성을 만나게 된다.
노거수 아래 석성을 처음 보며 다소 실망할 수 있으나 이것은 가장 낮은 석성에 불과하다.
전망 트인 곳으로 올라오자 건너편은 계룡산 국립공원이 보인다.
안개층이 뚜렷하게 보이며 안개에 가려진 가까운 거리가 너 멀게 보이는 특별한 풍경이다.
수묵화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지만 원근이 바뀐 느낌의 생경한 풍경이다.
좀 더 당겨본 계룡산 주능선
반듯하게 세웠을 국기봉이 바람의 세기를 견지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었다.
원형봉이라 저항도 적을 텐데, 바람이 셀 땐 제법 강력하게 몰아붙이나 보다.
이 산성은 논산군 상월면과 노성면에 걸쳐 솟아 있는 표고 348m의 노성산(魯城山) 정상부에서
남쪽 산 중복에 횡에 걸쳐 축조되어 있는 산복식(山復式) 석축산성이다.
성벽의 통과선은 북벽이 산 정상부를 에워싸고 양 능선을 따라 동벽과 서벽이 지나고 있으며,
산 중복에 남벽이 축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산성의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평면은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사전에서 발췌)
안내문에서 백제시대 테뫼식 산성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조선시대에 증개축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돌을 각기제 자르고 쌓은 건 대부분 조선시대 이후다.
물론 흰색 돌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누더기가 된 성벽은 대충 어디까지가 복원된 것인지 충분히 알려준다.
이왕 복원할 거 좀 더 성의 있게 했으면 좋았을 걸...
이 지점부터 우측으로는 막 쌓은 느낌이다.
이 산성은 화강암의 석재로 적심(積心)하여 외면(外面)만 축조하였는 데, 그 둘레는 수평거리로 894m이다.
성내에는 4개소의 우물이 시설되어 있는데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서문지 밖 남쪽으로 20m 지점에 1개소의 우물이 있는데 가뭄이 심할 때 이 우물을 이용한다고 한다.
성내의 북쪽 산 정상부와 동·서편에는 계단식의 지형이 형성되어 있는데 건물지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많은 토기 편과 기와 편 및 도자기 편을 수습할 수 있는데,
토기 편은 경질(硬質)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기와 편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승석문(繩蓆文), 격자문(格子文), 평행선문(平行線文)인 회색, 회청색,
회갈색의 연질(軟質)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경질 및 연질의 어골문(魚骨文)과 경질의 청해파문(靑海波文),
그리고 복합문(複合文)이 시문 된 와편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자기 편으로는 분청사기와 산성의 정상 부분에는 경사면을 삭토(削土)하여 만든 둘레가 205m인 토루가 있는데,
동쪽의 만곡 된 부분은 약 10m 정도 석축하여 침식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사전에서 발췌)
성벽의 위쪽은 이렇게 평탄한 모습이다.
여느 도성처럼 여장(평지에 쌓은 담장 같은 역할)은 없다.
성벽의 돌이 빠진 곳에 무너지지 않게 고임장치를 설치하긴 했으나 견고하지 않을뿐더러
우측은 아예 밖으로 삐져나와 제 역할을 못하는 것도 있다.
이 토루 내부에 남북 22m, 동서 9m의 평탄지가 있는데
성벽(城壁) 중 동벽은 북벽을 이루고 있는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표고 240m의 조그만 봉우리를 감싸고 서쪽으로 남벽과 연결되고 있다.
능선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하다 보니 많은 굴곡을 이루고 있다.
동벽은 대부분이 무너진 상태이나 성돌은 화강암의 석재를 길이 40~50cm, 두께 25cm 내외,
돌부리 길이 30~50cm 정도로 다듬어서 편축식(片築式)으로 축조하고 있다.
그러나 동벽의 남단 일부와 북단 일부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고 있는데,
이 두 지점은 산 능선이 연결되고 있어 방어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처로 보인다.
성벽의 높이는 4m로 복원되었다.
남벽은 표고 240m의 조그만 봉우리를 감싸고 서쪽으로 계곡을 가로질러 구축되어 있다.
지형에 따라 ‘S’ 자형을 띠며 축조되어 있는데, 그 길이는 270m에 달하고 있다.
성벽은 적심 하여 외축 하였으나 대부분이 파괴되어 있어 일부 구간은 토루(士壘〕처럼 보이는 상태이다.
서남 모서리는 역시 산 능선이 연결되고 있어 협축식으로 축조하였다.
(출처_한국고고학사전에서 발췌)
조선시대에 쌓았던 형태와 비슷하게 복원되었다.
높이는 약 4~5 m 정도로 제법 높다.
복원 구간을 지나면 이내 석축이 허물어진 구간을 만나게 된다.
일부 구간은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그물망을 씌웠으나 형식일 뿐이다.
저 비스듬히 흙이 내려오는 곳에 나중에 서문을 만들 장소인가 보다.
창도주 토암 이승여의 묘라는 데 거창하게 금강삼종대성사부성산(金剛三宗大聖師父聖山)이라고 새겼다.
노성산성은 성벽의 둘레 894m. 면적 52,148㎡로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산성으로서는 보기 드룹게 규모기 크고, 또 오랜 기간에 걸쳐 시용된 성이기 때문에
성내에는 많은 평탄대지가 조성되어 있다.
노성산성은 그 위치나 규모·축성법 등으로 볼 때 논산시의 역사 문화적 위치를 대변해 주는 유적일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의 여러 가지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중요 한 유적 중에 하나이다.
현재 일부 복원된 노성산성 남문지 주변 평탄지에는 2005년 경부터 유불선을 합친 신흥종교인
금강대교(金剛大敎) 노성분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문화재 제43권 1호 발췌)
총 석의 '총(叢)'이란 그 어원의 형성상 풀이 떼 지어 나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착(着)의 아랫부분을 제외한
윗부분과 음(音)을 나타내는 취(取)로 이루어짐으로써 풀숲 또는 '떼 지어 모이다'란 사전적 정의에 따라
‘총 석(叢石)‘이란 떼 지어 서 있는 돌무더기를 지칭한다.
(문화재 제43권 1호 발췌)
l993년 이전에는 금강대교의 예배 전과 관리사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성벽에 인접한 주 변지역은 대다수가 밭으로 경작되었다.
이곳은 성내의 평탄면 중에서 가장 넓은 장소로, 금강대교 주건물을 중심으로 동서에 각각 우물이 1기씩 있다.
주변 지형과 성내에서의 위치, 평탄면의 넓이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성내의 가장 중심적인 건물이 있던 장소로
추정되지만 이미 금강 대교 노성봉원의 새로운 건물이 증축되었고,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정작이 이루어진
관계로 부분적인 형질변경과 지형적 교란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 제43권 1호 발췌)
총석사를 지나며 제법 높은 성벽 밑으로 지나간다.
이 성벽은 배가 불쑥 튀어나와 잘못하면 붕괴될 위험마저 보인다.
성벽 위로 나무가 자라며 일부 유실되자 그곳으로 길이 생겼다.
이젠 다 자란 나무가 성벽과 어울려 토착민 행세를 한다.
나무의 힘은 미약한 듯 보여도 바위틈에서 자라며 바위를 갈라 부숴 트리기까지 한다.
이곳에선 성벽을 훼손하기까지 했으니 위용이 대단하다.
그동안 많은 산성을 탐방하며 이렇게 산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많이 봐왔다.
나무가 아무리 강하기로서니 돌에 비해 유한한 생명이라 언젠가 썩어 문드러지면 산성만 남으리...
어떤 용도의 집이었을까?
농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으니 농가는 아니고 굿당?
이곳은 남문 지다.
성벽은 화강암의 석재를 길이 40~50cm, 두께 25cm 내외, 돌부리 길이 40~50 cm 정도로 다듬어
바른 층 쌓기로 축조하였으며, 성돌 사이의 틈새는 주먹 크기의 쐐기돌로 채우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구간은 중간 부분 이상에서 할석(割石)을 그대로 이용하여 축조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높이는 4~7m로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다.
서벽은 급경사로 이루어진 자연지세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구축하였다.
따라서 동벽과 마찬가지로 지형에 따라 많은 굴곡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면석의 크기가 50 ×25cm 정도인 화강석을 이용하여 바른 층 쌓기로 축조하고 있다.
일부 구간은 남벽과 마찬가지로 치석(治石) 하지 않은 자연할 석을 이용하여 축조한 부분이 있다.
서북 모서리에는 주능선이 북주(北走)하고 있는 관계로 협축공법에 의하여 축조하였으며,
그 폭은 7~8m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지(門址)는 동 ‘서 ·남벽에 시설되어 있는데, 동문지는 동장대 북단에 있다.
이 문을 나서면 북쪽으로 연결되고 있는 능선을 이용하게 되어 있다.
이 문지의 폭은 6m이나 후대에 성돌과 토사로 폐쇄시켜 놓았다.
이 문지가 북쪽 능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방어 전략상 이를 폐쇄한 것으로 보인다.
서문 지는 서벽의 계곡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을 통과하면 가곡리에 닿을 수 있다.
문지의 폭이 6m인 개거식의 성문이다.
이 서문지도 성돌과 토사로 완전히 폐쇄해 놓았다.
한편 남벽의 계곡부에서 동쪽으로 80m 정도의 거리에 현재 성내로 통과하는 지점이 있어
이곳이 남문지로 추정된다.
또한 남벽에는 성내의 유수(流水)를 처리할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확인할 수가 없었다.
(출처_한국고고학사전에서 발췌)
남문 지를 날렵하게 복원하며 노성산성은 이곳에서 끝난다.
성벽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처음 등산할 때 만난 옛날 석성을 다시 만난다.
옛날 석성과 만나는 지점
이곳이야말로 고려시대 이전에 쌓은 석성이다.
노성산 산행은 사실 노성산성 탐방으로 끝난다.
금강대도 노성본원은 종교계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니 무신론자인 즐풍은 굳이 논할 필요도 없다.
임도를 따라 어렵지 않게 내려서면 노성 애향탑을 만나게 된다.
등산할 사람들은 이곳 주차장에 많이 주차한다.
오래전에 점찍었던 논산의 노성산성을 다녀왔다.
낮은 산 위에 테뫼식을 쌓은 작은 산성이지만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서 산성의 역할을 다한 곳이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신라와 백제,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싸웠을지 모른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는 고려 때 김부식이 지은 역사서라 변방의 노성산성이 들어갔을 리 없다.
이곳의 격전을 누군가 생동감 있게 복원하길 바란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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