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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함께한 형님이 서산 해미읍성에 반하셨네...

by 즐풍 2023. 2. 13.

2023-007

 

 

 

2023.1.22. (일) 16:28~17:30, 한 시간 탐방, 흐림

 

 

강원도에서 줄곳 생활한 형님은 충청 이남지역에 산재한 읍성을 볼 기회가 없었다.

오늘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 온 김에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과 해미읍성을 연달아 탐방한다.

서산 해미읍성은 화려할 것도 없는 옛날 성으로 산성만 생각한 형님에겐 의외의 풍경이다.

즐풍은 이미 많은 읍성과 산성을 경험한 데다 해미읍성은 벌써 네 번째이니 새로울 것도 없다.

 

순천의 낙안읍성, 고창의 고창읍성과 함께 서산의 해미읍성이 우리나라 3대 읍성이라는 것과

읍성이면서도 도성 역할을 한 수원화성도 아직 탐방하지 못했다고 하니 나중에 안내해 드려야겠다.

이러한 읍성을 포함해 산성을 물론 강화도에 많이 남아있는 진, 보, 돈대는 성곽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이미 조선 세종 때 학자인 양성보는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이다."라고 설파할 만큼 산성과 읍성은 많다.

 

 

□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하였다.

효종 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 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다.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출처_문화재청)

 

 

해미읍성은 평면 타원형의 평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 성내 면적은 약 194,480㎡ 에 달한다. 

성벽은 외면은 석축으로 내면은 잡석과 토사로 뒤채움을 한 편축식으로 축성되었다. 

성벽 외부에 해자가 설치된 흔적이 있다.

 

해미읍성은 일제강점기 이후 성내에는 민가, 관공서, 학교 등이 들어섰으나,

1975년부터 1981년 사이에 모두 철거되었다고 한다. 

 

 

안에서 다시 보는 진남문은 해미읍성으로 들어가는 정문이다.

 

관아로 들어가는 길목엔 옛날 무기를 재현했다.

오른쪽 하단 망에 돌이나 불을 붙인 무기를 성으로 날려 보내는 투석기다. 

 

성을 공격할 때 사다리를 펼쳐 성벽에 닿게 하여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성을 공격하는 장비다.

높은 사닥다리라고 하여 운제(雲梯)라고 하는 데, 엘리베이터는 중국어로 전제(電梯)라고 쓴 걸 볼 수 있다.

 

 

서산해미읍성회화나무 (瑞山海美邑城회화나무)

 

사적 제116호인 해미읍성 내 위치하는 회화나무는 지역주민들에 의해 호야나무로 불리고 있는데, 

이 나무는 1866년 병인박해와 관련이 있다.
당시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겸영장이 토포사를 겸하여 국사범을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내포지방의 천주교 신도들을 압송하여 처형하였는데,

이 나무에 철사줄로 매달고 고문을 하여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하였다.

                                                                                                                    (출처_문화재청)

 


병인년인 1866년부터 약 6년 동안이나 계속된 병인박해 당시 호서지방의 많은 천주교인이 목숨을 잃었다. 

더욱이 1868년 봄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조선 천주교인의 협조를 받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크게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호서지방의 천주교인들을 모두 잡아들이도록 명했다. 

호서좌영성인 해미읍성에 끌려온 천주교인들은 이 ‘호야나무’에 매달려 효수되거나 

성 밖 해미천 근처의 여숫골과 진둠벙에 생매장되는 등의 방법으로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해미읍성과 직선거리로 700m 밖에 서산지역의 천주교 신자의 순교지가 있다.

‘해미순교성지’는 교황청이 승인한 '국제 성지'로 선포된 곳으로 궁금하면... 

 

서산 해미읍성 인근의 해미순교성지 순례

2022_26 2022.3.6 (일) 오후에 탐방 서산 해미읍성을 둘러볼 계획을 세울 때 주변에 갈만한 곳이 있는지 지도를 검색했다. 약 700m 지점에 해미순교성지가 있다는 걸 알고 방문하기로 한다. 집을 나서

electee.tistory.com

 

회화나무 앞에 죄인을 잡아 가두는 옥사가 있다.

이곳엔 여러 명의 죄인을 황동으로 재현한 걸 볼 수 있다.

 

옥사 주변에 민속가옥을 만들어 방문객의 이해를 돕는다.

우리가 들렸을 땐 이곳에 다듬이질이나 여러 형태의 옛 모습을 재현하던 주민들이 모두 귀가한 상태다.

 

 

순천의 낙안읍성이나 고창의 고창읍성은 성벽을 따라 돌며 읍성을 더 자세하게 조망할 수 있다.

심지어 고창읍성은 매년 10월에 모양성제를 열며 답성놀이까지 한다.

서산해미읍성은 언젠가 성벽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막았다.

개인의 사고로 이후 방문객이 성벽을 못 걷게 하는 처사가 졸속행정의 표본이다.

 

민가 뒤로 보이는 동문인 잠양루(岑陽樓)

 

민속가옥을 지나 관아로 들어간다.

호서지역의 행정 중심 역할을 한 호서좌영이란 편액이 걸렸다.

 

이곳은 죄인의 심문하는 장소로 형틀이 갖춰진 걸 볼 수 있다.

 

현감 집무실인 동헌

 

현감 집무실을 재현한 모습

 

안에서 다시 보는 호서좌영의 정문

 

현감 집무실인 동헌 뒤에 있는 집무실

 

 

해미읍성은 최근까지만 해도 해미초등학교,면사무소, 우체국 등이 자리하였다.

주변으로는 민가 둥이 건립 되면서 성내시설 대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973년부터는 읍성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내부시설의 건물들이 점차 이전 및 철거되었다.

해미읍성 안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내아로 드나드는 중문

 

측면에서 보는 동헌

 

성은 효종(孝宗) 때, 호서좌영(湖西左營)이 자리하여 호서병영의 선임병영으로 기능하여

일반읍성과는 달리 일찍부터 병영이 설치되어 현감이 영장(營將)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1849년에 현감 겸 영장이던 박민환(朴聞 換)이 성곽을 크게 개축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 는 내포 일대의 천주교인들을 심문하고 처형하였다.

이처럼 해미읍성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과 기록을 고려할 때 읍성은 행정적인 기능과 함께

군사적인 기능을 겸하 여 왔으며, 상황에 따라 성이 크게 개축 •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지방 수령의 숙소인 내아

 

밖에 있는 객사

 

내아에서 보는 동헌 

 

 

 

해미읍성의 복원된 관아를 둘러보고 관아 위 야산으로 올라간다.

 

□ 청허정(淸虛亭)

정자(亭子)는 일반 가옥과 달리 자연을 배경으로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 
청허정은 조선 성종 22년(1491) 충청도 병마절도사(충청병사) 조숙기(曺淑沂, 1434~1509)가 세웠던 것을 
다시 복원한 것으로 조선 전기 학자 성현(成俔, 1439~1504)의 문집 『허백당집(虛白堂集)』에 그 유래가 전한다.
정자의 이름인 ‘청허(淸虛)’는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곳에 오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당부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 초기의 해미읍성은 충청도 육군사령부 역할을 하는 충청병영성으로 최고 책임자는 병마절도사(병사)였다.
조숙기가 병사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을 수리하면서 소나무 숲이 우거진 뒷동산에 청허정을 지었다.
이후 이곳에 온 관리들은 청허정에서 무예를 익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등,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1494년 방문한 충청감사 조위(曺偉, 1454~1503)는 주변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시를 남겼고,
권오복(權五福, 1467~1498)의 문집 『수헌집(睡軒集)』에 절도사와 수령이 청허정에 모여 지은 시가 전한다.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했던 이순신, 1790년 해미로 귀양 왔던 다산 정약용도 이 청허정에 머물렀을 것이다.
1872년 「해미현지도」에는 옛터(古址)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 자리에 일본식 신사(神社)가 세워졌다가 광복 후 철거되었고,
1976년 복원한 후 2011년에 다시 정비하였다.

                                                                                                              (출처_문화재청)

 

 

뒷동산에 잘 자라는 소나무가 이곳 읍성의 운치를 더한다.

 

북문인 암문

 

 

 

 

시간이 늦어 해미읍성은 서둘러 탐방을 마쳤다.

짧은 시간이지만 잘 복원된 읍성의 많은 것을 살펴봤다.

언젠가 다시 성벽을 돌며 읍성 전체를 조망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