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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안성 죽주산성 탕방

by 즐풍 2023. 4. 7.

2023_030

 

 

 

2023.3.13. (월)

 

 

죽주산성은 7개월 전인 2022년 8월에 다녀간 적이 있다.

그런데도 다시 온 건 안성에 온 김에 하나라도 더 볼 생각인 데다 산성 탐방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 죽주산성 탐방코스를 보면 송문주 장군 사당까지 탐방했어도 2.2km에 지나지 않아 1시간이면 충분하다.

죽주산성은 내성과 외성, 중성이 혼합된 특이한 산성으로 외성까지 돌기엔 다소 부담이 된다.

 

 

 

ㅁ 죽주산성 (竹州山城)

 

비봉산(해발 391m) 동쪽에 연접한 해발 250m 봉에 있다. 

산성에서는 서쪽은 비봉산에 막혀 있지만, 다른 쪽은 원거리까지 조망된다.
죽주산성은 내성과 중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축 성벽을 일부 공유하며 고려, 조선시대에 계속 수축되었다. 

초축성벽은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곡간부를 감싸도록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둘레는 1,322m로 삼국시대 성곽 중 대규모에 속한다. 

성벽은 기저부를 계단식으로 정지하고, 내벽과 외벽 및 속채움까지 모두 돌로 쌓았다. 

성돌은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바른 층 쌓기 방식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외벽에는 보축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이러한 축성법은 죽주산성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 신라가 쌓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려 고종 23년(1236)에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공격하자 죽주방호 별감 송문주 장군이

15일 동안을 싸워 적을 물리쳤다.

이때에 삼국시대에 초축된 성벽을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변이중·황진 장군의 부대가 이 산성에서 싸워 승리했다.

임진왜란 후에도 수축이 이루어질 때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의 외벽경사가 완만하고, 남쪽 치성은 모서리에 대석이 사용되는 등 왜성의 축성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다각의 곡륜(曲輪)을 특징으로 하는 왜성의 평면배치 양상이나, 독특한 성문의 구조 등은 적용되지 않았다.

죽주산성은 여러 시기의 축성법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출처_안성시청)

 

죽주산성 탐방 코스

 

 

이 성벽은 동문지로 막 들어가기 전 북포루에서 내려오는 방향을 잡은 것이다.

 

 

주차장에서 잠시 올라오면 본격적으로 산성을 탐방하게 될 동문에 도착한다.

지금은 동문 위에 누각이 없지만, 예전에 있었음직 하다.

오늘도 여전히 반 시계방향으로 돌 생각이다.

 

 

 

ㅁ 죽주산성(安城 竹州山城)
 
현재 내성은 대부분 복원되어 원래의 현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현재는 남벽만이 잘 남아있다. 

중성도 대부분 복원되어 역시 원형 파악이 어려우며 북벽과 서벽의 회절부 치성 부분만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외성은 전체적으로 성벽이 잘 남아 있어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편축법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외성일부 구간에서는 협축성벽이 확인된다.
죽주산성은 죽산 분지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 북쪽, 남쪽은 청미천과 죽산천에 의하여 형성된 평야지대가 감싸고 있다. 

서쪽 시계는 비봉산에 막혀서 제한되어 있지만 나머지 방향으로는 원거리까지 아주 우수하다.

동쪽은 장호원까지 평야와 낮은 구릉으로 탁 트여 있어서 시계가 가장 좋다.

눈으로 보이는 산성은 북쪽으로 이천 설봉산성과 도드람 산성이 있고, 남쪽으로 안성 망이산성이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나 백제는 현재의 서울에서 이천을 거쳐서 충주와 청주 방면으로 진출했고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서 충주를 발판으로 한강 하류로 진출했다.

삼국이 대외 팽창을 하는 가운데 어떤 경우에서든 남북과 동서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는 죽주산성을

경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이 전략적 요충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은 죽주산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교통로가 뻗어 나 가고

그 교통로를 따라서 고대 산성들이 연이어 분포된 상황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죽산 지역에는 죽주산성과 함께 설성산성과 망이산성 둥이 인접하고 있어서 죽산 지역 전체가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되었던 사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죽산의 중요성은 나말여초(羅末麗初) 이후 많은 불교 유적과 유물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죽주는 인구가 밀집되고 경제적으로도 활성화되었던 지역이 분명하다. 

죽주산성은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개산군의 치소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나말여초에는 죽산 지역 호족 세력의 근거지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죽주산성은 고려시대에 죽주성으로 불렸으며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것을 

기록과 송문주 장군 사당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일단 폐성되었다가 임진왜란을 전후로 다시 수축되어 산성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1년 지표조사 및 중성 복원구간에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본성, 외성, 내성으로 구성된 3 중성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성내부에는 송문주 장군 사당을 비롯하여 문지 6개소, 치성 4개소 등과 더불어 

다수의 건물지와 우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둘레는 내성 1,125m, 중성 1,322m, 외성 602m이다.

성벽의 높이는 내성 2~3.5m, 중성 5~8m, 외성 4~5m이고, 너비는 내성 2~3.5m, 중성 5~8m, 외성 4~5m 정도이다.

문지는 내성 2개소(남문 1 • 2),  중성 3개소(동문 •서문 • 남문), 외성 1개소(북문 및 수구지)이며,

추정 연못지는 2개소이다.
성벽은 축조 시기가 확인되는 부분은 중성 서벽 부분으로 최소한 총 3차례 정도 각각 다른 시기에 

성벽이 축조되었던 것이 감지되고 있다. 


출토된 유물은 초기 철기시대의 옹형토기, 점토대토기(姑土帶土器),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

대부토기(臺附土器), 조합식우각형 파수(組合式牛角形ffi手), 발형 토기(錄形土器) 편 등이 있고,

삼국시대 백제의 승문연질토기 편과 고배류, 호류(菌類)가 출토되었다.

신라계 유물로는 대형호편, 병 편, 파상문토기 편, 단각고배(短脚高杯) 편 등이 출토되었다.

고려시대는 ‘광초(官草)’ 명기와 및 막새류, 조선시대는 백자 편 및 각종 평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죽주산성은 삼국시대 이후 고려 및 조선시대 임진왜란에 이르기까지 산성 전체에 대해 대규모의 변화가 있었다. 

내성과 외성, 그리고 중성의 3중 구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시기마다 성벽을 중축했거나, 축소했던 것을 보여준다.

아직 산성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가 이뤄진 상태가 아니기에 차후 진행되는 조사의 성과에 따라

산성의 시대별 변화상을 알 수 있겠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 편)

 

안에서 보는 동문은 현재 암문 상태로 되어 있다.

 

 

 

 

 

이렇게 성벽을 살짝 외곽으로 돌출된 곳을 치성이라 하는 데,

이렇게 만든 이유는 양쪽으로 계계하기가 쉽고 성벽으로 오르는 적군을 활로 격퇴하기 쉽기 때문에 만든다.

안내 지도에서는 중성의 동남치성이라고 했다.

 

 

 

 

 

 

 

 

 

중성 남문지

 

중성 남문에서 바라본 남쪽 성벽길

 

 

 

이곳은 중성의 서남치성에 해당하는 곳으로 죽주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해당한다,

시원스럽게 뻗은 소나무 수형이 보기 좋다.

 

죽산 시외버스터미널 방향이다.

 

 

 

산성을 쌓고 봉우리를 산성 높이로 고르게 펼쳐 넓은 쉼터를 만들었다.

이 정도 넓이라면 군사훈련을 하고도 남겠다.

나중에 북포로가 있는 곳을 살펴볼 기회가 있겠지만, 그곳도 장소가 넓어 훈련하기 좋은 곳이다.

 

 

 

석성의 대부분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지만 언젠가 다시 쓸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성 안의 푸른 소나무가 보기 좋다.

 

 

 

중성과 외성으로 분리되는 지점의 이정표다.

 

저 성벽 끝에서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경사면은 외성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10여 m 내려가면 외성 서문지가 나타난다. 그렇게 나간 외성은 북포루와 만나게 된다.

 

 

 

 

 

 

 

 

 

 

 

내성이 거의 직각으로 꺾어지는 지점이다.

 

 

 

 

 

 

 

성벽을 따라 내려가며 바깥에 나무와 만나는 지점에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바로 북문이다.

 

가까이서 보는 북문 

 

ㄷ 자 돌담은 포루가 있던 흔적이다.

 

이런 포루가 놓였다면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포루 밖은 앞서 본 서문에서 외성으로 나간 성이 산세를 따라 움직이다 이곳 북포루와 만나게 된다.

 

포루를 중심으로 제법 넓은 공터가 있어 훈련 장소로도 쓰였겠다.

 

 

 

처음 산성 탐방을 하던 동문이다.

여기서 방향을 돌려 송문주 장군 사당으로 올라간다.

 

송문주 장군 사당은 충의사란 편액이 걸렸다.

사당 안에 영정이 있겠지만, 문이 잠겨 볼 수 없다.

 

 

송문주(宋文胄) 장군

 

1231년(고종 18) 귀주성(龜州城)에서 몽고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낭장(郎將)에 초수(超授)되었다.

1236년에는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이 되었고,

다음 해에 몽고군이 죽주(竹州)를 공략하자 15일 동안을 싸워 끝내 적을 물리쳤다.

이때 구주성싸움의 경험으로 몽고군의 작전과 장비를 잘 알아 적절히 대응하였으므로,

성안의 사람들이 신명(神明)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 공으로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이 되었다.

                                                                                              (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문주 장군 사당 아래쪽에 우물이 흐른다.

그 우물물을 이용해 중간중간 작은 연못을 만드는 공사를 진행 중이다.

 

 

 

세 군데 작은 연못을 지나 마지막에 천원지방의 이 연못을 지나며 죽주산성의 운치를 더한다.

 

 

죽주산성은 언제 보아도 멋지다.

이 산성에서 송문주 장군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몽고군을 물리쳤으니 산성의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했을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에는 변이중·황진 장군의 부대가 이 산성에서 싸워 승리를 했다.

역사에 밝혀지지 않았지만 더 많은 싸움에서 이 산성을 지키기는 쉬웠을 것이다.

산성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