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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수원 화성이 아니라 화성의 당성 탐방

by 즐풍 2023. 4. 11.

2023_32

 

 

2023.4.9. (일) 오후에 잠시 탐방

 

 

화성 제부도를 갈 때 전에 확인했던 화성 당성도 다녀와야 하는 데 도도체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결국 "화성시 산성"으로 검색해 화성 당성이란 걸 알아냈다.

요즘은 점점 기억력이 떨어져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심하지는 않아도 부모님에 이어 형님까지 치매가 있으니 일종의 가족력인 셈이다.

 

 

 

ㅁ 화성 당성 (華城 唐城)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인 1차 성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인 2 차성으로 이루어졌다. 

현재는 동문지, 서문지, 북문지와 우물지, 팔각 건물지를 비롯한 방형과 장방형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당성이 소재하는 남양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으로서,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흥덕왕 때인 829년 당성진을 설치하면서 청해진과 함께 신라 해군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이곳은 당항성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당(唐)’이 새겨진 기와편인데 이는 당성군(唐城郡)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장대 추정지에서 출토된 토제마(土製馬)는 화성 당성에서 제사 의식이 있었음을 증명하며, 

중국에서 만든 백자완의 출토는 화성 당성이 대외 교역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출처_문화재청)

 

화성 당성 조감도_문화재청

 

 

 

(당성 → 화성 당성)으로 명칭변경 되었다. (2011.07.28 고시)

요즘은 대부분 이렇게 앞에 지역명이 들어가 위치를 더 분명히 밝혀주는 추세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먼저 만들었다는 1차 당성과 망해루, 건물지 등이 있는 곳인데

당장 걷기 편하게 우측으로 돌며 탐방을 시작한다.

 

화성 당성은 서해안까지 직선거리로 4km 정도의 짧은 거리에 있다.

정상에서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망해루 터가 있다.

주변이 나지막한 지대라 산성이 있는 이곳 구봉산(158.6m)은 같은 산줄기인 인근의 봉화산(168.6m)과 더불어

인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1차 당성이 있는 구봉산 정상

 

 

 

 

 

 

 

성벽은 최근에 거의 전체를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있던 석성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요즘은 돌을 기계로 재듯 가공하므로 보기 좋게 성벽을 쌓는다.

 

1차 당성은 정상부에만 일부가 남아있고, 나머지는 모두 2차 당성이다.

 

위 당성 2차 성 안내문에 나온 개거식과 현문식 성문이 궁금하여 한참이나 찾아서 올린다.

현문식 성문이 방어에 훨씬 유리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_한국 성곽의 연구)

 

2차 당성의 동문 추정지이다.

2차 당성은 여기부터 약 50여 m는 복원하지 않고 방치했다.

방치된 곳은 거의 평지에 가까운 지형으로 복원의 필요성을 못 느꼈나 보다.

 

ㅁ 집수지와 연못지

 

집수지와 연못지는 성 안에서 물을 이용하는 데 꼭 필요한 시설이다.

평면 형태의 네모꼴이며 돌로 쌓았다. 주변에는 건물터, 철기 생산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집수지의 크기는 9×14m이다. 남동쪽 모서리에 물이 빠져나가는 출구가 있다.

연못지는 집수지의 북쪽에 있는데 크기는 4.5×4.5m의 정사각형이다.

집수지와 연못지 안에서는 도기류, 자기류, 기와류, 석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 송대 지방요 자기편이 확인되어 당시의 대외 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유물이 많은 편이며,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2차 성이 오랫동안 쓰였음을 보여준다.  (안내문)

 

전망대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곳은 민들레 꽃이 많이 폈는데 키가 작아 바람에도 아니 흔들린다.

꽃받침이 밑으로 벌어진 걸 보면 외래종임을 알 수 있다.

 

2차 당성은 밖으로 급하게 흘러내려 동문 추정 장소에서 끝난다.

오른쪽으로는 황토 빛의 시멘트 산책로가 지나간다.

 

 

 

 

 

 

ㅁ 북문지

 

북문지의 현존 길이는 740cm, 폭은 260cm이다.

흙으로 다져 만든 성벽 가운데에 문지를 만들었으며, 좌우 측면은 돌로 마감했다.

문지 내부에 성문을 여닫는 시설인 문지공석이 2개 확인된다.

문지공석 위에는 지름 13cm, 깊이 8cm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에 철제 암확쇠를 끼우고, 성문의 회전축 하단부에는 수확쇠를 장착했다.

그러므로 성문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목재로 결구된 시설과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이곳 어디에 있는 돌 윗면에 문을 달 수 있는 구멍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처음 만들 때 본모습은 돌담을 직각으로 사람 키 높이로 쌓았을 것이다.

두 돌담 사이를 가로지르는 돌을 얹어야 성문을 달 수 있었을 테니 문을 그렇게 넓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1500년 세월이 흐르며 성벽이 낳이 무너져 원형을 찾기 어렵다.

 

당성의 최고봉이자 구봉산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망루로 오르는 구간의 토성은 산사태가 있었다.

올여름에 많은 비가 내리면 추가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워낙 가파른 곳이라 산사태가 깊게 쓸고 가 복원하기가 쉽지 않겠다.

 

최근 정상을 복원한 성벽과 원래대로 있던 성벽이 잘 구분된다. 

 

원래 있던 성벽도 끝을 잘 다듬어 제법 견고하게 쌓았다.

 

 

 

예전부터 있던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이 서해 바다와 약 4km 떨어질 만큼 가까워 안내문에는 망해루라고 했다.

옛날 이름을 알 수 없어 즐풍은 안내문 제목을 그냥 망루로 바꿨다.

 

 

 

 

ㅁ 망루지

 

당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망루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3칸인 건축물이다.

그 크기는 장축 640cm, 단축 630cm로 네모난 형태이며, 남서 편으로 계단시설이 확인된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6면이 다듬어진 초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외곽에는 안팎으로 돌의 면을 맞추어 쌓은 너비 80~90cm 정도의 기단 시설이 있다.

초석은 기단시설 안쪽 열 사이에 있는데, 초석간 거리는 약 210~22cm이다.  (안내문)

 

 

망루지 아래쪽에도 건물지를 알리기 위해 여러 군데 이렇게 철담장을 둘렀다.

 

 

 

망루 터를 바라보며...

 

 

 

한 여성이 위에서 쑥을 뜯고 있다.

이 흰꽃은 냉이나물의 꽃으로 이젠 쇄서 먹지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작은 노란 꽃은 무얼까?

성벽 끝을 멋지게 물들여 화성 당성을 가장 보기 좋게 만든 계절이다.

 

이곳 성벽이 유려하게 돌아가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현재 남양 홍씨의 일문인 당성 홍씨들이 자신들의 시조가 이곳에 배터를 잡았다는 점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우고, 관리사무소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남양 홍씨네 문중에서 당성을 관리했다고 한다.

 

 

 

 

 

진흥왕, 당항성으로 삼한일통의 디딤돌을 놓다

 

신라는 진흥왕 때에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 해상교통의 관문이자, 

해상군사요지인 당항성(黨項城)을 설치하여 활발히 대륙의 나라들과 교역을 전개하였다. 

남한강 유역을 확보한 진흥왕은 서해로 진출하기 위하여 크게 상주-보은-청원-증평-진천 안성-당항성으로 

연결되는 추풍령로와 상주 충주-여주 이천-광주 한주 강화로 이어지는 남한강 수로, 

그리고 영주-단양-제천-원주-횡성-홍천-춘천-화천-금화-회양-안변으로 나아가는 죽령로 등을 신설하여 

새로운 국토에 대한 수취와 지배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사실은『삼국사기』 권 제34 잡지 제3 지리 1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본국 경계 내에 삼주를 두었는데, 왕성 동북쪽으로 당은포로에 해당되는 것을 상주라- - - ” 하였다고 한다.

이 길을 통하여 진흥왕은 25년 (564년)에 조공을 위한 사신을 북제에 보냈고,

북제에서도 이 길을 통하여 565년 “사지절동이교 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훗校附樂浪那公新羅王)”으로

진흥왕을 책봉하였다.
이러한 거점지역을 고구려와 백제에서 그냥 두지는 않았다. 

양국은 이 지역을 차단하여 신라가 대륙의 니라들과 군사적 동맹을 맺지 못하게 노력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일례로 선덕왕 11년(642) 8월에 “(백제가)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당(唐)과 통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 태종(太宗)에게 위급함을 알렸다.”는 기사가 있어 

당항성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구당서(舊唐書)」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 인다. 

즉 “의장왕이 신라 40여 성을 공격하여 취하고, 고구려와 화친하여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의 입조지로를 

끊으려 하여 신라가 침범하였다.”는 기사에서도 당항성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출처_「서울·경기·인천 문화유산 이야기」에서 발췌)

    

 

 

 

당성 발굴조사에서 수습된 기와펀이 모아져 있다.

1차 당성은 2차 당성 밖에까지 벋어 있는 데, 그곳에는 이곳보다 많은 기와 편이 쌓여있다.

 

 

 

밖에서 보는 2차 당성의 성벽

이곳에서 사진 찍으려고 선 자세 뒤로 1차 당성이 이어진다.

1차 당성은 사실 육안으로 식별이 어려워 구분이 안 되지만 평평한 장소라 눈에 띈다.

아래쪽에 기와 편이 수습되어 쌓여 있기도 한다.

 

 

 

 

당성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개 있으나 즐풍은 신흥사에 주차했기에 차량 회수를 위해 되돌아간다.

화성당성방문자센터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길은 가까우나 더 고도를 높여 걸어야 한다. 

센터에서는 당성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수련원 건물 계단을 통해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신흥사 청소년수련원 회랑

 

ㅁ 전법륜(轉法輪) 상

 

이 전법륜상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6년의 고행 끝에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시어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하셨다.

이후 45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법을 설하여 수많은 중생을 교화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이 수레바퀴처럼 머무르지 않고

계속 굴러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적절한 가르침이기에 전법륜이라고 한다.  (안내문)

 

 

 

사천왕을 둘러보며 천왕문을 끝으로 화성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화성 당성이 작은 줄 알았더니 둘레가 약 1,150m에 달하는 포곡식 산성이다.

하나의 산성에 1, 2차로 나누어 산성을 만든 특이한 형태다.

신라 진흥왕 때 이곳을 포함해 한강유역을 확보하며 당나라 이전의 국가인 북제와 교역한 곳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삼국통일의 기운이 서서히 고조되던 시기의 당항성(당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