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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과 읍성 탐방/산성·읍성·진·보·돈대

신라의 왕궁인 경주 월성과 석빙고

by 즐풍 2023. 4. 23.

2023_40

 

 

 

2023.3.31. (금) 오후에 잠시 탐방

 

 

국립경주박물관, 둥궁과 월지 탐방에 이어 경주 월성에 오른다.

동궁과 월지 주차장에 차를 댄 뒤 월성과 첨성대까지 한 번에 둘러보기 좋은 코스다.

동궁을 나오면 바로 건너편에 월성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월성은 나지막한 구릉으로 여느 지역과 달리 다소 높은 지역이라 우물이나 연못이 있을까 걱정스럽다.

신라시대 약 1천 년간 왕궁이었던 왕실에서 쓸 식수가 가장 중요했기에 궁금한 마음이 앞선다. 

 

 

ㅁ 경주 월성 (慶州 月城)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한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안압지·임해전·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되었다.
 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탈해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탈해왕을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 왕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성의 동·서·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 터가 남아있다. 

성 안에 많은 건물터가 남아있으며, 1741년에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석빙고가 있다.

                                                                                                                                    (출처_문화재청)

 

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월성 가는 길 

 

최근에 복원한 해자다.

원래 해자를 말이 건너뛰지 못할 만큼 너비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곳은 잠시나마 속도를 줄이는 역할을 하겠다.

 

월성 북벽으로 올라가는 구간의 노거수

 

월성 서성벽에서 보는 동궁과 월지 방향은 숲만 보인다.

 

서쪽으로 기우는 석양

 

월성은 몇 년째 계속 발굴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곳에 방수천막을 씌운 곳은 이미 발굴공사가 끝난 곳으로 옛 명성에 맞게 왕궁을 새로 질는지 모르겠다.

 

석빙고

 

ㅁ 경주 석빙고 (慶州 石氷庫)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이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깥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와 입구 이맛돌에 의하면, 조선 영조 14년(1738) 당시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는 것과,

4년 뒤에 서쪽에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이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석빙고가 있는 지붕에 습기를 조절하는 환풍구가 드러난 게 보인다.

 

이곳은 월성의 성벽인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지역임을 어렴풋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이후 1,000여 년이 넘게 방치된 상태라 성은 제법 많이 무너지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래도 왼쪽 성 안과 표고 차이가 드러난 걸 볼 수 있다.

 

복원된 해자는 옛날과 방식이 많이 다를 것이다.

넓게 저수지 형식으로 복원해 멀리서 봐도 해자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월성(사적 제16호)은 신라의 왕궁으로서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87-1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월성은 동서 길이 890m, 남북 길이 260m, 바깥둘레 2,340m, 내부 면적은 207,528㎡이다. 

월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사서 등 다 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의 기록에 따르면 파사이사금 22년(101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월성’이라 지었고, 그 해 7 월에 왕이 월성으로 옮겨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월성은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궁으로서 그 자리를 지키며 위상을 이어나갔다. 

조선시대의 지리서인 『신 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월성은 형태가 반달과 같으므로 

월성이라 이름하였는데, 혹은 재성在城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실제로 월성과 월성해자에서는 ‘재성’ 명 기와가 출토된 예가 있다. 

왕궁으로서 약 800년의 시간을 지나 온 월성은 오늘날 신라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월성 주변으로는 신라 왕실의 원지園池인 월지와 태자의 거처인 동궁東宮, 첨성대, 황룡사, 분황사, 인용사, 

월정교와 일정교, 대릉원 등이 밀집 분포한다. 

이러한 주요한 유적의 분포를 통해 월성을 중심으로 왕경의 주요 시설이 조영 되고 신라가 발전해 나갔다는 

당대의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출처_경주 월성 시·발굴조사 보고서에서 발췌)

 

 

천년 고도인 경주에 터전을 두고 사는 주민들은 좋겠다.

어느 곳이든 눈에 뜨이는 곳은 문화재라 자긍심이 높겠다.

그런 경주시의 2023년 3월 인구 통계를 보면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25%나 되니 이곳은 초고령사회다.

즐풍이 사는 평택시의 같은 기간 고령인구 비율은 12.7%이니 아주 젊은 도시에 속한다. 

 

경주는 땅 속에서 물이 많이 솟아난다는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우물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러한 점은 기록에도 반영되어 여러 우물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왕궁에 있었던 우물은 궁정宮井, 왕궁정王宮井 등으로 표기되었다. 

다만 왕궁 자체의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이들이 반드시 월성 안에 위치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 현유가 해화엄 조에 등장하는 금광정金光井은 구체적인 이름이 드러나고 그 위치도 짐작할 수 있다. 

즉 왕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왕궁으로 스님을 불러들였는데, 그가 우물물을 솟아나게 했으며, 

이 모습을 보고 궁궐 안 사람들이 놀랐다고 전한다. 

이에 금광정은 월성 내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잠깐 동안 우물의 물이 솟아 나와 그 높이가 7장丈 가량이 되어 찰당刹幢과 더불어 같게 되었는데, 

궁 전체가 놀랐고 그로 인 하여 그 우물을 금광정金光井이라 이름하였다.

『삼국유사』 권 4 의해 5 현유가 해화엄.                          (출처_경주 월성 시·발굴조사 보고서에서 발췌)

 

 

또한 연못에 대한 기록도 나타난다. 

즉 경덕왕 19년(760)에 궁중에 큰 못을 팠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현재 월지 月池가 조성된 시점을 문무왕 14년(674)으로 보고 있는데, 

이 기록을 기존에 조성한월지의 확장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팠다(穿)’는 표현을 존중한다면 새로운 연못을 만든 기록으로 보아야 하며 이는 월지와 다른 연못 이 된다.

2월에 궁궐 안에 큰 못을 팠다.

『삼국사기』 권 9 신라본기 9 경덕왕 19년.                     (출처_경주 월성 시·발굴조사 보고서에서 발췌)

 

 

이렇게 월성 안에도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면 왕궁에서 쓸 생활용수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1,000여 년 동안 궁궐을 옮기지 않고 계속 왕궁의 기능을 다했을 것이다.

 

월성 아래쪽에 보이는 첨성대

 

월성 아래쪽 숲이 우거진 곳은 경주 계림이다.

계림과 첨성대는 별도로 묶어서 포스팅할 예정이다.

 

 

 

 

30여 년간의 발굴조사와 3년여의 정비사업 끝에 옛 기능과 모습 회복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1984년부터 시작된 30여 년간의 발굴조사와 2018년 말부터 시작해

3년여간의 정비사업을 마친 경주 월성해자를 오는 31일부터 국민에게 공개한다.
  * 해자(垓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물도랑 또는 못


경주 월성 해자는 1984년 시굴조사 과정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2021년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된 곳이다.

그 결과, 월성 해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땅을 파서 물을 채운 수혈해자(竪穴垓子, 4~7세기)였고,

통일 후에는 수혈해자 상부에 석축을 쌓고 물을 가둔 석축해자(石築垓子, 8세기 이후)로 변화한 것이 밝혀졌다.

이러한 석축해자 방식은 수혈해자 본연의 방어기능에 조경적 의미가 더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에 정비를 마치고 공개되는 해자는 지하의 수혈해자와 석축해자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상태에서

그 상부층에 통일신라 석축해자의 구조와 형태를 최대한 재현하고 해자 본연의 기능인 담수가 가능하도록 했다.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사업의 하나로 2018년부터 총 101억원(지방비 포함)이 투입된 월성 해자

재현·정비사업은 총 길이 550m(최대 폭 40m)에 이르는 규모로,

해자의 재현 외에도 관람객 탐방로와 경관조명, 순환식 용수설비 등이 포함되었다.

남쪽으로는 자연해자의 역할을 하는 남천이, 북쪽으로는 인공해자가 월성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재현하여

월성 해자의 옛 기능과 모습을 회복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다.

                                                                                                (출처_'22.03.28. 문화재청 보도자료)

 

월성에서 계림으로 나가는 출구다.

월성은 한 바퀴 돌면 좋겠지만, 형님의 연세를 생각해 바로 계림으로 이동한다.

 

해자 사이를 지나며 월성의 서성벽을 둘러본다.

 

 

 

지금까지 월성의 서벽 일부만을 걷고 그 중가 지점에서 계림으로 빠져나간다.

월성을 들렸다고 해도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으로 겨우 일부만 봤을 뿐이다.

언젠가 월성의 궁궐이 일부라도 복원되면 그때 더 들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