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_47
2023.4.27. (목) 08:08~12:07, 10.6km 산행, 3시간 58분 소요, 맑음
지난 월요일 서울 관악산 등산 후 이틀 쉬고 이번엔 세종시에 있는 운주산성으로 간다.
운주산과 가장 가까운 역은 전의역이나 첫 기차가 11:18에 도착하므로 산행하기엔 맞지 않다.
결국, 다음 역인 조치원역에서 버스로 환승해 운주산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 하차했다.
자차를 이용하면 바로 운주산성까지 갈 수 있지만 늘 편리함만 추구할 수 없다.
조금만 부지런 떨면 대전권역까지의 산행은 대중교통 이용도 할만하다.
ㅁ 운주산 (雲住山)
운주산은 세종시 전동면과 전의면에 걸쳐 있는 해발 459.9m의 나지막한 산이다.
주변 마을에서는 이 산이 제법 높아 보였는지 구름이 머물고 있다는 뜻으로 운주산이라 지었다.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엔 멀리 가기 힘드니 내 고장 산이 가장 높은 줄 안 것이다.
운주산 입구에는 운주산의 옛 이름인 고산을 따 고산사(高山寺)라는 사찰이 있다.
고산이나 운주산이나 모두 산이 높다는 뜻을 갖고 있다.
운주산에는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운주산성이 산 정상을 둘러싸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순간을 지켰던 운주산성이 있는 역사적인 명산이다.
(세종시 운주산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어 간단하게 즐풍이 정리했다.)
ㅁ 운주산성 (雲住山城)
운주산성은 북으로 천안, 청주는 물론 아산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중요한 군사적 거점지역에 축조하였다.
축조시기는 백제시대로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풍왕과 복신, 도침장군을 선두로 일어났던
백제부흥운동군의 최후의 구국 항쟁지로 알려져 있다.
「신 증동국여지승람」 전의 현 고적조에 간단한 설명이 나와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조선초기에는 이미 폐성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운주산성은 내성과 외곽성이 함께 갖추어져 있으며 성내에서 백제시대 기와 편이 출토되고 있다.
(출처_문화재청)
조치원역에 내리면 바로 앞 광장에서 운주산성 방향인 801 버스를 탈 수 있다.
카카오버스 앱에서 버스정류장 11071을 검색해 801 버스를 즐겨찾기 하면
조치원역 버스정류장에 801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을 알 수 있다.
잘못하다간 반대편 버스를 타면 낭패를 보니 기사분에게 전의역 방향인지 물어볼 것...
이렇게 지방 여행을 갈 땐 사전에 이용할 버스를 즐겨찾기로 설정하면 편리하다.
산행 가능한 시간인 17:00까지만 올린다.
운주산성 가는 길의 어느 펜션
지금부터는 고산사이다.
옆으로 나란히 쓴 시라 길어서 글자도 읽기 어렵다.
하여 두 개로 나누고 밑으로 연결하니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고산사 창건주이자 고고학자 최병식 박사 님의 시다.
고산사 도침당
종루각
백제국 의자대왕 위혼비
보통 석물은 문신을 앞에 두고 무신을 뒤에 세우나 이곳은 마지막 전쟁을 겪은 의자왕의 위혼비라는
특수성을 감안했음인지 무인석과 문인석의 위치가 바뀌었다.
적절한 자리 배치란 생각이 든다.
대웅전
고산사 경내를 간단히 둘러보고 운주산성으로 발길을 돌린다.
드디어 궁금했던 운주산성에 들어선다.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보일 만큼 깨끗한 돌이 가지런히 쌓였고,
성벽 밑에 핀 철쭉도 이젠 색이 바랬으나 여전히 성을 예쁘게 꾸민다.
서문, 남문, 북문에서 문지(門址)가 확인되는데 붕괴되어 자세한 형상을 알 수 없다.
성 안에는 성문과 건물터, 우물터 등이 남아 있는데, 정상부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제단으로 보이는 원형 대지가 있다.
또 성 안에서는 백제 토기 편과 기와 편이 출토되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자기편과 기와편도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고대 산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_세종시청)
운주산성을 탐방하며 잠시 쉬기 좋은 팔각정
운주산성은 1989.12.29. 연기운주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2.7.1. 해제되었다.
이어서 같은 해인 12월 31일 운주산성이란 명칭으로 세종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연기군이 2012.7.1. 세종시로 편입되며 연기군 지역 명칭을 빼고, 같은 해 연말에 운주산성으로 새롭게 지정된 것이다.
운주산성은 백제 멸망 후 풍왕과 복신, 도침장군을 선두로 백제부흥 운동군의 마지막 구국항쟁 지이다.
정상에는 백제 부흥군의 호국 충혼이 서려있는 백제의 얼 상징탑과 기우제를 지낸 원형 제단이 세워져 있다.
독립 기념관과 마주하고 있는 상징탑은 삼층 기단과 삼각모형은 백제, 신라, 고구려 삼국의 정립을 의미하며
삼층 기단 위의 조형물은 백제 산성과 찬란했던 삼국 문화를 의미한다.
(출처_세종시청)
도토리 거위벌레가 알을 낳기엔 너무 이른 시기인데 벌써 나무줄기를 톱으로 썬 듯 바람개비를 타고 지상에 낙하했다.
보통 8~9월이면 도토리에 알을 낳고 나뭇가지를 잘라 낙하산처럼 착륙시키는 데, 연습용인가?
운주산성 입구엔 복원이 잘 됐으나 50여 m 시계방향으로 돌면 석성은 무너진 채 방치되었다.
더 복원하면 좋겠지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운주산의 산성을 보면 그 많은 돌을 어디서 구했는지 참 궁금하다.
반듯한 돌도 많은 걸 보면 밖으로 쌓는 부분은 보기 좋게 가공했고,
안쪽에 쑤셔 넣는 돌은 자연 상태 그대로 썼겠단 생각이 든다.
백제의 얼 상징탑 건립기
운주산성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백제성으로 삼국사기에 고사성(古沙城)으로 전하고 동국여지승람에
고산산성으로 전한다.
460m의 고지에 둘레 3,200m가 넘는 거대한 이 산성은 정북에 직산의 위례성을 보고,
정남에 계룡산의 천왕봉을 보며, 웅진왕도 시대에는 국방의 제일선을 담당하고,
국말에는 구국항쟁의 기지로서 이름 높은 연기 주류성이었다.
그러나 1,3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도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서 알길 없으니
애석하게 여겨 풀을 베고 길을 길을 다듬어 옛 모습을 드러내고 돌을 깎아 탑을 세운다.
충의롭고 슬기롭던 백제의 얼을 상징하며 그 뜻을 오늘에 되살려 영원토록 후세에 전하여 빛내기 위함이다.
1990년 11월 29일 연기군수
고유문(告由文)
국가나 일반 개인의 집에서 큰일을 치르고자 할 때나 치른 뒤에,
그 이유를 신명이나 사당에 모신 조상에게 고하는 글을 읽는 곳
즉, 제를 지내는 곳이다.
앞에 큰 봉우리는 망경산, 뒤에 물러난 산은 동림산이다.
운주산성은 세종시 전동면 청송리 67번지인 해발 459m의 높은 산인 운주산(雲住山)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는 일지맥의 서쪽 끝부분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다.
운주산성은 옛 전의현(全義懸) 지역 내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변에 축조된 고려산성(高麗山城)-이성산성(季城山城)-금이성(金伊城)과 같은 연결고리 없이
읍내리의 분지상에서 동쪽으로 4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독립하여 자리하고 있다.
운주산성은『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이 제작된 16세기 이전에 초축 되었다가
폐성되었고『호서읍지(湖西邑誌)』가 제작된 이전 어느 시점에 읍치가 설치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가 발간된 19세기 이후 다시 사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헌으로 확인되는 운주산성은 '고산산성(高山山城)’으로 불리다가 읍치와 기우제단이 설치되면서
‘운주산성’으로 개명되어 전해오는 것으로 보인다.
운주산성은 전의면(全義面)과 전동면(全東面)에 있는 산성 중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전망은 매우 좋다.
동쪽으로는 청원군(淸原郡)을 지나서 청주시(淸州市)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조치원(鳥致院)과 청주-조치원 간의 넓은 평야, 서쪽으로는 전의읍내와 전동면 일대,
북쪽으로는 천안시(天安市)와 목천면(木川面) 둥지가 발아래 내려다보인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이곳의 바깥 성벽 일부는 무너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한다.
이렇게 반듯한 곳은 모두 최근에 복원한 곳이다.
운주산성은 세 차례의 조사를 통해 성곽의 규모와 축성 시기, 성내의 유적 현황이 대체적으로 밝혀졌다.
성곽의 둘레는 3,098m에 이르며, 내성과 외성으로 된 특이한 형태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성내에는 문지와 건물지, 우물터, 추정 절터 등이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사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운주산성은 막연하게 백제산성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보다 명확한 축성시기를 밝히기 위해 1997년에 1차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동문지 및 동문지 바로 안쪽에 있는 건물지 1동이 확인되었으며,
이때 동문지와 건물지 내부에서 많은 양의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발굴조사된 지역에서 정작 삼국시대 백제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아
운주산성의 축성시기라든가 축성목적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새롭게 서문지 바로 안쪽에 있는 넓은 대지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
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사용되었던 건물지 1동과 조선시대 건물지로 추정되는
할석층 4곳과 성벽의 축조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벽의 축조 방법은 성벽을 쌓기 위한 기초부는 생토층을 정지한 후 그 위에 회색 점질토와 회색점질토+
작은 할석을 3m 폭으로 깊이 1.8m 정도 단단하게 다져 넣어 다짐토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벽면을 구축하는 데 사용된 석재는 기단토 위에 형태가 고르지 못한 대형의 석재를 놓고
2단부터는 장방형 또는 방형으로 가공된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2단은 안으로 20~30cm 정도 들여쌓기 하였다.
성벽의 성석은 옆으로 눕혀서 쌓아 올렸는데 아래위로 경계선이 평행선을 이루며 돌과 돌사이 틈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바른층 쌓기 하였다.
부대시설로는 배수구와 추정문지가 확인되었지만 성벽과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주변지역은
교란과 훼손이 심하게 이루어졌다.
이번 조사에서는 많은 양은 아니지만 백제 토기 편이 출토되어 백제 구지현(九知懸)의 중심성으로서의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앞으로 운주산성에 대한 연차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운주산성의 초축 시기나 성격 등을
명확히 밝힐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_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 편)
이곳이 동문지 안쪽에 건물 터로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작은 울타리를 세웠다.
운주산성은 이곳에서 층을 이루며 밖으로 한참 물러나 성벽을 만들었다.
당연히 고증을 거쳤겠으나 다소 특이한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는 방어에 제일 취약한 구조로 보인다.
제법 간격이 넓은 취약지대다.
건물 터가 있던 장소의 큰 마당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가는 성벽은 제법 높게 쌓았다.
이곳은 도두리자게 높은 토성 형태의 산성이다.
이곳에 세운 정자는 탐방객을 위한 것이다.
예전 망루나 장대는 아니고 휴게공간이다.
이렇게 급한 경사를 내려가면 처음 들어온 곳과 만나게 된다.
입구와 만나는 지점으로 이곳의 산성은 이곳에서 끝난다.
다시 만나는 운주산성의 출입구
성 안쪽에 있는 두 개의 저수지 중 하나다.
철쭉도 이젠 끝물이라 붉던 색상도 이젠 색이 빠져 많은 탈색을 보인다.
봄날은 이렇게 덧없이 흐른다.
멀다고 느꼈던 운주산성을 직접 탐방하고 나니 의외로 가깝게 느껴진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신라·백제·고구려로 삼분되어 치열하게 싸우던 곳이다.
그러다 나라 잃은 설음에 이곳을 배경으로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순간을 바친 곳이다.
이곳에서 자란 사람들은 백제의 후손인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산성과 읍성 탐방 > 산성·읍성·진·보·돈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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